113화.
엑시포드 루비에 백작. 제국 재 무성 차관.
그가 눈앞에 있는 한 청년을 바라본다.
'한지훈.'
검은 머리, 검은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이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쯤 될까. 퍽 날 선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도무지 머리를 굴릴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속으로 미소 짓는다.
'애송이겠군.'
몇 달 전만 해도 평민이었던 사 내라 들었다. 전장에서 여러 공훈을 세웠고, 그전공을 인정받아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다 하던가.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 무력이 퍽 대단하다 하던가.
하지만 녀석은 정치 경험조차 없는, 귀족 작위를 하사받은 지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한 애송이다. 이런 애송이라면 벗겨먹기 쉬우리라.
그가 입을 열었다.
"최근, 소문이 들리더군요. 루벤 지방에서 새로운 자원들이 발견되 었다고."
엑시포드는 최근 '윗선'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다.
요한바르첸 총독령 변방 접경지 대, 별다른 장점 하나 없는 빈곤한 영지 루벤 지방. 이곳에서 여러 자원들이 나왔다고.
퍽 대단한 자원들이라고 한다.
철광석, 마나석 같은 전략 자원 들부터. 미스릴과 오리할콘, 아다만 티움 등 극도로 높은 값어치를 지 니고있는 희귀광물들까지.
탐이 날 수밖에 없다.
엑시포드는 혀를 굴려 계속해 말을 이었다.
"한지훈 라이젠 경. 경은 그 자원들을 개발하려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엑시포드 백작 각하."
엑시포드는 한지훈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우묵한 검은색 눈동자. 그는 한지훈의 그 건조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경도 알다시피. 자원을 개발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자금이 소요됩니다. 그리고 그대의 영지, 라이젠 남작령에는 그럴 만한 자금이 없겠지 요."
엑시포드 백작은 시선을 돌려, 관사 안의 풍경을 바라봤다.
영주성조차 없는 가난한 영지다. 이런 빈곤한 곳에서 거대한 광산을 세우고, 마물을 퇴치하며, 수많은 인부들을 고용할 돈이 없을 터.
그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 며 제안했다.
"다른 귀족들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투자라…."
나는 바로 앞의 노신사를 주시한다.
고고한 기세를 가지고 있는 고위 귀족. 게다가 재무성 차관 타이틀까지 달고 있다. 중앙의 거물이라기에 절대 손색이 없는 인물.
고민했다.
'뭘 꾸미는 거지?'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내 영지는 벽촌 중에 벽촌 이다. 인구는 고작 1만에 불과하며, 산업은 농업이 고작.
헌데 이런 벽촌에 재무성 차관이 라는 거물이 직접 행차해왔다.
'수상해.'
그저 직감이었다. 하지만 내 직 감은 결코 허술하지 않다. 이 눈앞 의 노신사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시선을 돌려 랑스에게 말했다.
"랑스. 이분을 응접실로 안내해주 었으면 하는데 ."
사실 응접실이라기엔 그저 소파 두어 개와 테이블을 가져다 둔 것에 불과했지만.
랑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한지훈 님."
"엑시포드 백작 각하, 실례합니다 만 먼저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겠 습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서 말입니다. 지도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지훈 경. 천천히 오시지요."
랑스가 엑시포드를 안내하며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곧 집무실로 쓰이는 방안에는 적막이 자리한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벌레. 나와라."
-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내가 부르는 소리에 요정들이 하나둘 등장한다. 나는 녀석들에게 요청했다.
"저 엑시포드라는 백작에 대해 알아볼 수 있나?"
- 지금?
"그래. 지금 당장."
요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연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은은한 녹색 광휘가 일렁이고. 직후 가느다란 자연력의 선이 만들어져 어딘가와 연결되었다.
이 요정들은 아마도 엘프들과 통신하고 있으리라.
'엘프의 정보력은 대단하지.'
대륙 곳곳에 엘프들을 잠입시키고, 자연에는 무수히 많은 요정들을 풀어놓은 것이 바로 엘프들이다. 그네들의 정보지원이 있다면, 사람 한 명 뒷조사 하는 것 따위 몹시 쉬운 일이리라.
잠시 후.
- 좋아! 알아냈어!
요정이 그리 외쳤다.
꽤나 빠른 속도였다. 고작 10분 쯤 지났을까.
요정이 입을 열었다.
- 엑시포드 루비에 백작. 루비에 백작가의 가주이자 재무성 차관이 래. 그리고… 아, 잠깐.
무언가 새로운 연락을 받고 있는 것인지. 요정이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녀석이 말한다.
- 알키온 후작가와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데 ? 알키온 후작가, 한지훈 너랑 악연으로 얽힌 사이 아니야?
역시. 불길한 직감은 항상 빗나가지 않는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응접실로 향했다.
"늦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엑시포 드 백작 각하."
"괜찮습니다. 한지훈 경."
엑시포드는 삭막한 집무실 안에서 앉아있는 상태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볼까요."
그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쳤다.
차갑고 냉철한 눈동자다. 저런 눈이 사업가의 눈이라는 걸까?
그에게 물었다.
"아까 전, 다른 귀족들의 투자를 받아들이라 하셨는데 .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그가 막 입을 열려할 때, 랑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녀석은 테이블 위에 찻잔 두 개를 올려놓고는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찻잔을 들어 올려보니 홍차였다.
'그러고 보니 마일루 상단에서 이것저것 줬었지.'
이런 가난한 영주가문에서 홍차 같은 사치품을 살 돈이 있을 턱이 없다. 이 홍차 또한 마일루 상단에서 넘겨준 것이리라.
노인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한지훈 경. 채권을 발행하시지 요."
"채권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영지의 지분을 담보 로 채권을 내어 자금을 융통한다면, 보다 쉽게 자원을 개발할 수 있겠지요."
즉 빚지라는 소리다.
나는 얼른 찻잔을 들어올렸다. 차를 마시기 위함이라기보단, 표정 이 구겨지는 것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누굴 호구로 알고.'
채권을 왜 발행한단 말인가? 당장 이곳에 자원이 매장되어있다는 소문만 퍼트린다면, 온갖 자본이 흘 러들어와 영지를 풍족하게 살찌울 터인데.
그의 개소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상단과 연계도 해야 하지요. 자원을 캐낸다 한들, 그것을 유통할 수 있는 상단도 필요할 터 이니 말입니다."
"상단이 라…."
"저는 일리아 상단을 추천합니다. 이 영지에서 나는 자원 모두를 감 당할 수 있을 정도로 꽤 커다란 상 단이지요."
저 노인이 굳이 상단을 추천하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 의문을 풀어준 것은 요정이었다. 녀석은 여전히 은신한 채, 나에 게만 들리도록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 일리아 상단. 알키온 가에서 운영하는 상단 이름이야.
역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본다.
'그러니까 채권으로 한번 뜯어먹 은 다음, 상단연계로 또다시 뜯어먹 으려 하려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하고 있자, 엑시포드는 품속에서 여러 서류들을 꺼내 보인다.
"자, 이게 그 서류들입니다. 채권 발행서와 상단 계약서이지요. 한번 살펴보시지요."
시선을 내려 엑시포드 백작이 꺼내든 서류들을 바라봤다.
먼저 채권 발행서를 들어 올려 살펴본다.
솔직히,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정상적인 서류였다. 게다가 조건도 예상외로 꽤나 좋았다. 평범한 영주들이라면 냉큼 도장을 찍을 정도로.
그때, 내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 한지훈. 저 종이에 마법이 걸 려있어.
'마법?'
목소리는 여전히 은신해 내 곁에있는 요정의 것이었다. 녀석의 말이 이어진다.
- 응. 마법. 위장마법으로 보이는데 . 한번 저 종이에 마나를 흘려봐 봐. 그러면 진짜 내용을 알 수 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에 미량 의 마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종이의 문구가 조금씩 변해간다.
나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염병할. 미친 새끼들.'
하마터면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마나를 흘려 넣자 드러난 서류의 본래 모습. 그곳에는 사채업자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폭탄 금리가 자리 해 있었다.
슬쩍 시선을 들어 올려 엑시포드 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내가 함정을 간파했다는 것도 모른 채, 여전히 가식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장난이 너무 심한데."
"… 한지훈 경?"
엑시포드가 나와 눈을 마주하려 한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무시하고, 뒤이어 상단 계약서를 살폈다.
역시나 겉보기로는 꽤나 좋은 조건의 서류. 그곳에도 미량의 마나를 흘려 넣자 서류가 다시금 일변한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너무나 불합 리한 조건의 계약서.
피식.
"아예 뼛속까지 긁어먹으려고 작 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만."
"… 그게 무슨 말인지? 한지훈 경."
"뻔뻔도 하셔라."
노인을 노려보며 서류를 테이블 위로 내던졌다. 녀석이 그것을 들여 다본다.
"… 이런."
서류를 확인한 녀석의 얼굴에는 냉철함이 깨지고 당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서류의 위장마법을 간 파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그는 잠시 서류를 바라보더니, 클클 웃기 시작했다.
"그래, 눈치챈 건가. 과연 대단하 구만, 한지훈 라이젠. 설마 마법을 간파할 줄은 몰랐어."
나는 서류에 오러를 밀어 넣어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서류는 푸른색 불길에 바스러져 재로 화해 떨 어져 내린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인 줄 알 았다만. 예상 외로 감각이 날카로운 가 보군."
엑시포드의 어투는 존대에서 평 대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저쪽의 수작질을 알아내자, 본래의 고압적인 태도로 나를 마주하는 것이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물었다.
"제가 그리 어수룩하게 보였습니까."
"얼마 전만 해도 평민이었다고 들었으니까. 먹음직스러운 먹이라 생각했지."
"뭐. 그렇겠지요."
솔직히 엘프와 요정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함정을 간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서류에 걸려있던 위장마법은 꽤나 정교했었으니까.
놈에게 물었다.
"알키온 후작이 시킨 일입니까."
"호오. 내가 알키온 후작가와 관계된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뭐,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10분 전 알았지만.
그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뭐. 게딘 알키온 후작께서 주신 정보이긴 하다만."
"역시 후작의 끄나풀."
"한지훈. 자네가 이쪽의 장난을 눈치챈 것은 칭찬해주지."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고는, 턱을 괴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자네는 무조건 채권을 발행해야 하고, 일리아 상단과 계약해야 해."
"제가 할 것 같습니까?"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엑시포드의 눈빛을 읽었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눈빛이다.
수작질이 들켰음에도, 저자신감 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가 싱긋 웃는다.
"다른 상단들은 자네와 거래를 하지 않으려 할 테니까."
"… 그게 무슨 소리인지."
"한지훈. 자네 생각보다도, 이제 국에서 알키온 후작가의 영향력은 크다."
엑시포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움직임 이었다.
그는 응접실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아까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재무성 차관이다. 그런 나조차 알키 온 후작가의 영향력을 받고 있지. 이 말이 이해가 되는가?"
사실 눈앞에서 있는 엑시포드 백작의 지위는 결코 낮지 않았다.
재무성 차관. 재무성이라는 부처에서 장관 바로 다음 2인자라는 뜻 이다. 그런 그가 알키온 후작의 영향력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
"앞으로 자네 영지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지."
그가 응접실의 문고리를 잡으며 고한다.
"게딘 후작께선 제국 내 여러 상 단들에게 압력을 넣을 것이고, 자네 와 계약하지 못하게 할 거다. 그리고 국방성에도 영향력을 행사해 그쪽이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하게 할 거고."
"게딘이라는 양반. 정말 속이 좁 군요. 자기 아들이 대련에서 좀 졌 다고 이런 개수작을 부리는 겁니까?"
"오오, 한지훈. 자네는 이게 그대련 때문이라 여기고 있군."
그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지훈. 자네의 영지는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먹이네.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만약 자네가 알 키온 후작가와 악연이 없다 한들,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거다."
"이런 개수작을 걸어온 게 알키 온과의 악연 때문이 아니라, 그냥 탐욕 때문이었습니까?"
"뭐 그렇지. 그만큼 자네 영지가 품고 있는 가치가 막대하니 말이네."
달칵. 그가 문을 열어 응접실 밖 으로 나선다.
"명심하게, 한지훈. 자네는 그대의권세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어. 자네는 영지를 지켜내 지 못할 거다. 모든 것을 잃을 바 에, 적당한 이익만 얻고 나머지는 후작께 바치는 게 좋을 걸세."
그는 그리 말하고는 터벅터벅 걸 어 관사 밖으로 향한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며 읊조렸다.
"엿이나 먹으라지."
내가 별다른 인맥조차 없는, 그저 평범한 신흥귀족이라면 놈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후작이라는 직위는 높았고, 놈의 영향력은 커다랬으니까.
아무리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을 캐내어 유통하지 못한다면 그저 쓸모없는 돌조각일 뿐이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봐, 벌레."
- 한번만 더 그렇게 부른다면, 정말 화낼 거야?
"마일루를 불러줘."
- 마일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일루. 그 엘프 상인 녀석 말이야."
아마도 제국 내다른 상단들이랑 은 거래를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일루는 다르다.
마일루 상단을 운영하는 마일루는 엘프다. 그리고 엘프 여왕의 지시 아래, 모든 엘프들은 내게 전폭 적으로 협조하고 있는 상황.
씩 웃었다.
"영지. 제대로 발전시켜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