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곳입니다. 단장 각하."
나는 제피르를 연대장이 있는 곳 으로 안내했다. 크라그 연대장 더스 틴은 요새 안 작은 창고 안에 감금 되어 있는 상태였다.
끼이이익.
창고 문을 열었다. 내부의 광경을 목도한 제피르가 표정을 찌푸렸다.
"자네도 참 지독하구만."
나는 그의 말에 무어라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그만큼 연대장 의 몰골이 꽤나 심각했으니까.
연대장 더스틴은 한쪽 팔, 한쪽 다리가 잘려있었으며, 다른 힘줄들 마저 끊어져 사지를 못 움직이는 상태였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몸통과 머리뿐.
녀석이 고개를 들어 올려 이쪽을 바라본다.
"…한지훈."
연대장 더스틴의 눈동자에는 적 개심과 분노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내려다봤다.
더스틴 크레이그. 크라그 연대를 지휘했던 연대장. 그는 정복 전쟁 당시 카렌의 전쟁영웅이었다 한다.
하지만 전쟁영웅이라는 것도 이미 과거의 일. 지금은 사지가 못쓰 도록 불구가 된 가련한 지휘관에 불과하다.
나는 병사들에게 심문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곧 병사들이 의자를 나르고 녀석을 밧줄로 묶었다.
제피르가 더스틴을 바라보며 혀 를 끌끌 찼다.
"참 사람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그 더스틴 연대장이 이렇게 될 줄이야."
"각하께서 아는 군관입니까?"
"그래. 이놈 때문에 내 마법단이 마나포션을 지급받지 못해 곤란했 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였지.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만."
제피르는 마치 품평하듯 더스틴 의 얼굴을 살폈다. 더스틴은 이를 갈며 제피르를, 그리고 나를 노려본다.
피식. 제피르가 웃었다.
"기개가 꽤 대단한데. 불구가 되어서도 저토록 적개심을 보이다니 말이야. 보통이라면 절망할 터인 데."
그의 말대로, 더스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임에도 패 기를 잃지 않았다. 눈빛은 야수처럼 빛났고, 시선은 또렷했다.
절대 절망하지 않겠다는 듯 굳건 한눈동자.
훌륭한 군인이 아닐 수 없다. 이 토록 곧은 신념과 기개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명 성이 널리 퍼졌던 것이겠지.
"하지만 그래봤자다."
후욱. 제피르가 연초 연기를 더 스틴의 얼굴을 향해 뱉었다. 꽤나 매캐할 텐데도, 더스틴은 굴하지 않 겠다는 듯 눈을 감지도, 표정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 꿋꿋한 모습에, 제피르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이제 심문을 시작하지."
제피르가 오른손을 그의 정수리 위에 올렸다.
우우우웅….
곧 그의 손끝에 푸른색 빛이 일 렁이며, 마법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먼저 정신방벽을 부숴주마."
그는 마법을 사용, 더스틴의 정신방벽을 파괴하려 한다.
웅웅웅웅!
청색 마나광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어둑한 창고 안이 푸른색으로 물들어갔다. 공기가 진동하고 대량 의 마나가 유동한다.
"제기랄!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제국새끼들!"
그 흉흉한 기운을 알아차린 것일 까. 더스틴이 마침내 입을 열어 욕 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죽여버린다! 너희들은 반드시, 죽여…!"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제피르가 그의 정신방벽 파훼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번쩍!
더스틴의 정수리 위로 마법진이 떠올랐다. 대형마법은 아닌 듯 그 크기는 상당히 작았으나, 마법진에는 기기괴괴한 문양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꽤나 상위의 것으로 보이는 마법.
하기야, 사람의 정신을 주무르는 마법이 바로 정신계통 마법이다. 내가 마법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고위 마법일 것이다.
제피르가 나직이 읊조린다.
"일단계 방벽, 파훼."
키기기직-! 하는 소음이 울렸다.
"끄으으으으으!"
더스틴이 이를 악물고 신음한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침이 흐르기 시작했고, 눈동자 또한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다.
제피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녀석. 정신방벽이 생각보다 단단하군. 나름대로 단련된 녀석이 야."
그는 그리 말하며 계속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더스틴의 정수리 위에 올라온 마법진이 시시 각각 움직이며 그 패턴을 바꾸어간다.
나는 그것을 보며, 문득 어떤 것을 떠올렸다.
'무슨 퍼즐 맞추기 같네.'
마법진이 빠르게 움직이며 여러 복잡한 문양들이 짜 맞춰진다. 그럴 수록 문양은 규칙성을 이루었고, 점차 마법진의 빛이 밝게 타오른다.
그렇게 마법이 발현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커억! 쿨럭!"
더스틴이 각혈하기 시작했다. 제피르가 표정을 찌푸린다.
"의지력 하나는 정말 대단하군. 일단계 정신방벽 파훼에 이렇게 오래 걸린 건 처음이야."
"저거 각혈하고 있는데, 괜찮은 겁니까?"
"괜찮다. 뇌가 맛이 가서 그런 거니. 잘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라. 이 단계 방벽, 파훼."
웅웅웅웅웅웅!
마법진에서 더욱 큰 소음이 일기 시작했다. 푸른색 빛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간다. 그리고 더스틴 연대장 의 콧구멍에서도 시뻘건 핏물이 줄 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제피르가 요청한다.
"이 녀석, 포션을 먹여라."
"포션 말입니까? 알겠습니다."
포션은 죽어가는 조직을 살릴 수 있을 뿐, 이미 잘려 완전하게 괴사 해버린 신체까지는 되돌릴 수 없다. 때문에 더스틴이 포션을 섭취한다 한들 다시 팔다리를 움직일 수는 없을 터.
나는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녀석 의 입에 흘려 넣었다. 더스틴이 흘리는 피의 양이 조금씩 줄어간다.
"삼 단계 정신방벽 파훼."
우우우웅….
마법진이 빛을 가라앉히고, 잠시 후 적막이 찾아왔다.
제피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녀석의 정신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제 심문작업을 시작하 지."
제피르는 의자를 끌고와 그의 앞에 걸터앉았다. 그가 품속에서 종이 와 펜을 꺼내들고 묻는다.
"네 녀석. 이름은?"
"… 더스틴, 크레이그…."
"더스틴 크레이그… 나이는?"
"마흔일곱…."
"고향."
"카렌 왕국, 크레이그 백작령…."
보아하니 이 녀석, 꼴에 백작위 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심문 과정을 바라봤다.
정신이 완전히 파괴당했기 때문일까. 더스틴은 제피르가 묻는 말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너희가 이곳 루벤 지방에 온 이유는?"
"제국 침공 전, 침공로인 루벤 지방의 지형정보를 얻고, 미리 장악 해두기 위해서…."
"카렌 왕국이 제국을 침공하는 시기는?"
"이 주일 뒤…."
역시. 예상대로 카렌 왕국은 근 시일 내에 침공해오는 듯했다.
과거 블랙오케스트라와 비슷한 시기다.
"루벤 방면으로 침공해오는 카렌 왕국 측의 병력은 어느 정도지?"
"동부군… 4개 군단… 도합 8만……"
"다른 방면으로는."
"제국 북부방면… 남부군… 6개 군단…."
제피르의 심문이 계속된다.
"대충 얻을 만한 정보는 다 얻었다."
제피르는 그리 말하며 창고 밖으로 나왔다. 나 또한 그의 뒤를 따 라 나왔다.
"아무래도 카렌 놈들. 제대로 전쟁을 벌이려 하는 것 같다."
이번 심문으로서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카렌 왕국이 이곳, 루벤 방면으로 쳐들어올 것이란 것. 그 수가 무려 8만, 다른 방면의 침공군까지 합하면 카렌 측의 병력은 무려 20만에 달한다는 것.
20만의 침공군. 절대적은 수가 아니었다.
"한지훈 천인장. 이로써 카렌 놈 들이 루벤 방면으로 침공해 온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제국 국방성에서는 이곳 루벤에 방어선을 꾸릴 것이다."
제피르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 봤다. 어째서인가.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다는 흉흉한 소식임에도 불 구하고, 그는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나는 새삼 체감했다.
'저 전쟁광.'
제피르는 진정 전쟁광이었다. 그는 무려 20만의 병력이 쳐들어온다는 것에 걱정하거나 우려하기 보단, 그 많은 병력을 상대로 마법을 퍼 부어댈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으니 .
"우리 군이 방어선을 전개하는 데에는 약 일주일가량이 소모되겠지.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고."
화르륵.
그가 재차 연초를 꼬나 물며 그리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제국군이 방어선을 꾸리는 데는 약 일주일이 소요될 것이었다.
무려 20만의 군대를 틀어막아야 한다. 그에 맞춰 대규모 병력을 운 용해야 할 터. 준비할 것이 결코 적지 않다.
최소한 일주일, 길면 이 주일가 량의 시간이 소요되겠지.
"곧 이곳에 다수의 군단이 배치 될 것이다. 한지훈 천인장, 자네는 요새를 증축하고, 보급망을 정비해 야 한다."
그가 흘깃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게다가 자네는 저 북쪽 산맥의 자원을 개발까지 해야 하니. 그동안 정말 바쁘겠군 그래."
"그렇습니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하겠군요."
나는 제피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나는 한동안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요새를 증축해야 한다. 방어군과 보급이 올 수 있도록 도로망을 정비해야 하며, 북쪽의 매장자원들도 개발해야 한다.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 리라.
"그럼 나는 돌아가 보지. 오랜만에 황궁을 가보겠군."
"황궁에는 어인 일로…."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직접 황제 폐하를 알현해 보고해야 하니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수고하게 한지훈 천인장. 나중에 전장에서 보자고."
그는 그리 말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전쟁이라."
공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공국전쟁보다도 그 규모가 훨씬 커다랬다.
카렌 왕국에서만 20만의 병력이 쳐들어온다. 문제는 카렌 왕국만이 제국을 침공해오는 것이 아니었다.
4개 국가 동맹의 일시다발적인 침공.
제국은 4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하게 된다.
픽 웃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되려나."
과거 시나리오에서는, 제국은 너무나도 힘겹게 전쟁에서 승리했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승리였다.
양면전쟁은 절대 피해야 하는 것 이었다. 다수의 전선이 형성된다면 그만큼 전력을 집중하기 힘들어지 니까.
헌데 제국은 4개의 국가, 4개의 전선, 도합 팔십만에 달하는 대군을 상대했음에도 결국 적의 군세를 모두 몰아내고 추후 막대한 영토를 취하게 된다.
그야말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은 놈들의 침공을 막기 위해 막대한 수의 병력과 물자를 동원했고, 결국 국력이 크게 쇠락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어떻게 될까.
"내가 좀 구른다면. 적어도 북부 방면은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을 텐데."
나는 전시나리오의 기억을 가지 고 있다. 그 기억들을 잘 살린다면 보다 빠르게 전쟁을 끝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야 한다 만.
잠시 생각해보고는, 결심했다.
"이번 전쟁으로 최소한 군단장 계급 정도는 되어야겠어."
군단장 정도 된다면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군단장은 천인장의 바로 윗자 리.
이번 전쟁 동안 활동한다면, 군단장 계급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되 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지로 돌아갔다.
"랑스. 영지는 별 이상 없나?"
영지에 도착한 뒤. 나는 곧장 랑 스를 찾았다.
내 물음에 랑스는 고개를 끄덕이 며 대답했다.
"네. 영지는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한지훈 님. 중요 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만."
"손님?"
손님이라니. 그것도 그냥 손님이 아니라, '중요한' 손님이라니. 그게 누구일까.
랑스가 어떤 곳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에 나는 그곳을 바라보았고, 곧 새로운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발을 길게 기른 노신사였다. 옷은 고풍스러웠고, 몸짓은 귀티가 흘렀다.
고고한 분위기를 휘감은 노년의 인물.
직감했다.
'고위 귀족인 것 같은데.'
저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몸에 휘감을 수 있을 정도라면, 꽤나 오랫동안 남들의 위에서 군림했어야 한다.
게다가 저 노인이 입고 있는 옷 들 또한 몹시 비싸 보이는 것들 뿐. 고위 귀족으로 추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반갑습니다, 한지훈 라이젠 경. 엑시포드 루비에 백작입니다. 부족 하지만 재무성 차관직을 맡고있지 요."
백작. 그것도 재무성 차관이라니, 예상대로 중앙의 거물이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민다. 악수를 권하는 제스처.
나는 그와 악수하고, 그의 소개 가 이어졌다.
"한지훈 경, 루벤 북쪽 산맥의 자원들에 대해 드릴 제안이 있습니다만."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직감했다.
'그리 유쾌한 일로 찾아온 것 같 지는 않은데.'
그의 눈동자에는 무언가를 노리는 기색이 떠올라있다.
아마도 내 자원을 탐내는 것일 터.
나는 그의 얼굴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