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마이사 슈베츠.
슈베츠 왕국의 핏줄을 이은 왕 족. 게임 속 연합 중앙군의 최고사 령관으로서 나를 대적했던 이.
그녀는 분명 천재였다.
녀석의 지략은 날카롭게 빈틈을 찔러 들어 왔었다. 고귀한 카리스마는 휘하 병력이 명령에 복종하도록했다.
녀석에 의해 패퇴했던 내 군단이 몇 개였는가. 또 녀석이 기어코 사 수해냈던 도시는 몇 개였는가.
마이사는 시대의 천재였고, 연합 의 영웅이자, 내 라이벌이었다.
그리고 지금 녀석은….
"나를 써먹겠다고? 설마 그 참모 니 뭐니 하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말하는 건가?"
애새끼의 모습으로 내 앞에 있다.
마이사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미간은 가늘게나마 찌푸 려져 있었다. 내가 뜬금없이 자신의 방으로 쳐들어 와, 일하라 하는 소리가 영 와닿지 않는 모양.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트리며 말했다.
"그래. 너를 써먹을 거다. 언제까 지나 빈둥거리게 할 수는 없잖아."
사실, 그동안은 마이사가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그녀가 군략에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내 휘하 병사들에게, 이 녀석을 참모로 여기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녀석을 소동 겸 행정관으로 부려먹었었다. 부대 내 잡 일을 도맡고, 내가 해야 할 행정작 업들을 짬 처리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마이. 네가 군을 지휘해라."
"… 내가 지휘하라고? 병사들을?"
"그래."
"병사들이 나를 따를까? 나는 여자에다, 나이도 어린데."
"그건 괜찮아. 네가 지휘할 건 제국군이 아닌 영지군이니까."
제국군은 본질적으로 내가 소속 된 국가 제국의 군대였다. 그들은 오직 직속상관의, 나아가 제국의 주인인 황제의 명령만을 따른다.
하지만 영지군은 다르다.
나는 이곳 루벤 지방 라이젠 남작령의 영주가 되었다. 그리고 영지 군은 영주의 군대.
명목상이나마 내 양녀가 되어 가문의 일원이 된 마이사라면, 영지군을 지휘할 수 있다.
"영지군이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자신 없는 듯한 목소리.
지휘할 병사들의 수가 고작 백 명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군대다.
그녀는 자신이 군을 지휘하는 게 상상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에 나는 대답한다.
"너라면 할 수 있다, 마이.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너는 군략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네 재능이라면 아무런 문제없다."
그녀는 아직 누군가를 지휘해본 경험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군략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고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그녀에게 경험을 시켜줄 셈이다.
백 명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것으로 시작해, 계속해 경험을 쌓고 더 많은 병력을 지휘하게 된다면. 언젠가 내가 기억했던 마이사 중앙군 최고사령관처럼 위대한 군관이 될 수 있을 것이리라.
"…내 재능이라."
마이사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가 마주친다.
마이사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깨끗한 푸른색이었다.
"한지훈. 너는 정말 신기한 사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 그대와 만났을 때. 그대는 내가 철저하게 숨겼던 본래 신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간파해냈었다."
마이사의 본래 신분은 슈베츠 왕국의 왕녀.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 고 포트 갈레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시스템의 정보를 받아 그녀를 찾아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조차 깨닫지 못한 재능을 발굴해내려 하고 있지."
그녀는 자신이 군략에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대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지훈. 그대는 정말, 내게 군략의 재능이 있다 여기고 있어. 어째서? 나는 군 따위를 지휘해본 적이 없는데 ."
그야 시나리오에서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픽 웃으며 대답한다.
"그런 게 있어."
나는 그녀를 데리고 관사 밖으로 향했다.
"영주님! 오셨습니까!"
나와 마이사는 천천히 걸어 마을 중앙, 군영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미리 연락받은 영지군들 이 대기하고 있었다.
도합 백여 명의 군인들.
그들을 살펴보고는, 피식 웃었다.
"확실히 많이 바뀌었네. 예전 모습은 정말 후줄근했었는데 ."
영지군의 장비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군복인지 누더기인지 구분이 안 가던 복장이 깔끔한 녹색 군복으로 통일되어있다. 꽤 준수한 품질의 금속 경갑과 투구를 착용했고, 무기 또한 날이 제대로 살아있는 신품들 로 지급되어있다.
이 정도면 장비만 보았을 때 제국군에 그리 꿀리지 않는 정도.
나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보급 장비들은 모두에게 제대로 지급되었나?"
"네! 그렇습니다. 전 영지군이 새로운 장비를 보급받았습니다."
"아무나 장비들 좀 보여줘 봐.
직접 살펴보고 싶군."
겉보기에는 꽤 괜찮아 보인다만. 그래도 꼼꼼히 살펴본다. 아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지휘의 가장 기본이니까.
병사가 장비를 하나씩 가져와 건 넸다. 그것을 살피며 평했다.
"꽤 괜찮네. 방어구는 편하면서 방호능력도 제대로 챙겼고, 검도… 나름대로 좋은 철을 쓴 건지, 강도 가 좋아 보이는데 ."
아무래도 마일루가 썩 괜찮은 품질의 장비들을 가져온 것 같다.
그야말로 제국 정규군 수준의 무장. 이 정도 수준으로 백여 명을 무장시키려면 최소한 금화 200개, 많다면 300개는 필요하다.
이걸 고작 금화 10개만 받았다 니. 완전 거저다.
내 말에 영지군 병사가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습니다, 영주님. 새로 지급 받은 장비들의 품질이 꽤나 좋습니다. 저희 병사들도 더 이상 장비에 대해 불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불만이 많았나보지?"
"그거야… 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지구와 달리 마물들이 활보하는 세계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닌 영지 군에 불과하다 하나 직접 마물과 검을 맞대는 이들이었고, 그렇기에 장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으니까.
그런 이들에게 이전 허접쓰레기 같은 품질의 병장기를 사용하게 했으니 .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지금은 모두 신품장비로 교체되었다. 이제 저들의 전투력은 더 높아졌을 터.
나는 뒤이어 물었다.
"훈련도는 어떠지? 정규군 수준 은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오지 탐사 정도는 제대로 해낼 수 있어 야 해."
"걱정 마십시오. 이전에도 간간히 마물들과 교전하던 녀석들입니다. 오지탐사 정도야 큰 문제 없을 겁 니다."
"좋아."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를 교체했고, 병사들을 훈련 시켰으며, 탐사 준비를 끝마쳤다. 이제 북쪽 산맥을 탐색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병사들에게 고했다.
"이제 북쪽 산맥을 탐색하겠다. 여기 있는 게 모든 병사들인가?"
"그렇습니다, 영주님!"
녀석들이 우렁차게 대답한다. 장비가 바뀌었으니 사기마저 높아진 모양.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너희들에게 하나 알 릴 것이 있다."
나는 슬쩍 옆에서 있던 마이사 에게 눈짓했다. 마이사는 고개를 끄 덕이고는 몇 발자국 걸어 내 앞으로 나선다.
나는 이어 말했다.
"이 녀석, 마이가 너희들을 지휘 할 거다."
"영주님? 이 계집애가 저희를 지휘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 지…."
다소 뜬금없는 소리. 그에 병사들이 얼빵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씩 웃으며 이어 말했다.
"계집애라니? 말을 높여라, 병사. 이 녀석은 내 딸이다. 마이 라이젠. 이 꼬맹이가 앞으로 너희들을 지휘 할 거다."
"… 딸이라고?"
병사가 나와 마이사를 번갈아 본다. 잠시 후 녀석이 경악했다.
"맙소사…! 그럼 영주님께선 결혼을 언제 하셨다는…."
나는 마이사가 양녀라는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병사들이 장비를 챙겼다. 방어구 를 갖춰 입고, 검을 허리춤에 찼다. 창날을 높이 들어올렸다. 탐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했다.
도합 백여 명에 달하는 영지군. 그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북쪽 산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최선두에는, 나와 마이사가 있었다.
"한지훈. 너는 능숙하게 말을 모 는구나."
"그렇지, 뭐."
나와 마이사는 말을 타고 가는 중이었다.
말고삐를 잡고 있는 것은 나였다. 마이사는 아직 말을 몰 줄 몰 랐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고삐를 건넸다.
"마이. 고삐를 잡아라."
"… 내가 말을 몰라는 거냐?"
"그래. 지휘관이 되어서 승마조차 할 줄 모르면 모양이 안 살지."
마이는 조심스레 내가 건넨 고삐 를 쥐었다. 그녀가 고삐를 당긴다. 직후, 히히히힝!
덜썩, 들썩.
말이 요동친다. 나는 얼른 그녀 의 손에서 고뻬를 빼내고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잠 잠해지는 말.
"마이. 고삐를 처음부터 너무 거세게 잡아당기지 마. 천천히, 힘을 빼고 부드럽게 쥐어라."
"알았다."
"그리고 말을 도구로서 여기지 마. 녀석과 교감해야 해. 말은 탈것 이전에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자, 다시 쥐어봐라."
마이사에게 다시금 고삐를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금 조심스레 고삐를 쥐어든다.
이전보다 좀 더 부드러워진 동작. 그녀가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을 몬다.
"좋아. 천천히, 여유가 느껴지게 잡아."
"대충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것 같다. 한지훈."
"그래. 말을 모는 것 자체는 쉬 워. 습보와 전투기동이 힘들 뿐."
지금 타고 있는 군마는 내가 길 들여놨기에 유순한 편이다. 덕분에 마이사에게 훌륭한 교보제가 될 수 있다.
나는 계속해 마이사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그리고, 말이 부담가지 않도록 자세를 바꿔. 지금은 평보 상태이니 허리를 세우고, 상체에는 힘을 빼라. 하체는 무릎을 안쪽으로 힘을 줘 말의 몸통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이렇게?"
"그래. 전투기동을 할 때는 자세 를 낮춰서 공기저항을 줄이고 말과 의 일체감을 늘려야 하지만. 지금은 평보 상태이니까 허리는 적당히 펴는 게 좋아. 무게 균형을 잡아야 하니까."
"한지훈. 발이 불편하다."
"네 키가 작아서 등자가 안 맞나 보네. 나중에 조절해야겠다."
말을 모는 것이 꽤나 재밌는 것일까. 그녀는 의욕적으로 기마술을 배우려한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긴. 이 녀석 기마 실력도 끝내 줬었지.'
게임 속 마이사 슈베츠의 기마술 은 퍽 대단했었다.
언젠가, 그녀가 혼자서 내 기사단 앞에 모습을 드러내 미끼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기사단에게 마이사 의 추적을 명했고. 내 기사단 단원 수백이 기사용 전투마를 타고 그녀를 추적했었다.
본래라면 금방 잡혔을 것이었다. 기사용 전투마는 마물과 교배해서 만든 전투생명체. 반면 아무리 사령관이 직접 모는 명마라 한들 일반 말에 탑승한 그녀는 5리도 못 가 잡히는 것이 정상일 터.
하지만 그녀는 용케도 도망쳤다. 울창한 숲의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여러 장애물을 헤치며 능숙하게 도망쳤던 것이다.
당시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된 게 기사의 추격을 뿌리칠 정도니 말이다.
'분명 기마술도 금방 배우겠지.'
그 정도로 뛰어난 기동을 보여줬 던 마이사였다. 그녀라면 금세 기사 부럽지 않은 기마술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 북쪽으로 향했다. 나와 마이사가 말을 몰고, 백 명의 영지군이 뒤따라온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영주님! 저곳입니다!"
병사들이 보고한다. 그에 나는 시선을 앞에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벤의 북쪽 산맥이 보인다.
저곳에는 무수히 많은 마물들이. 그리고 철광석을 비롯한 여러 지하자원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저 산을 개발한다면 막대한 양의 지하자원과, 그 가치를 이루 말할 수 없는 희귀광물들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라이젠 영지군이 산맥을 향 해 접근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