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99화 (99/390)

99화.

"그래서. 무슨 짓이지?"

나는 니디아와 마일루를 데리고 관사의 빈방으로 향했다.

이 가난한 영지는 영주성도, 심 지어 번듯한 응접실도 없었다. 때문에 적당히 빈방에 의자 두세 개를 끌어다 놓고 대화할 뿐이다.

내 말에 니디아가 싱긋 웃었다.

"어머. 영지를 도와드린 건데, 기 쁘지 않나요?"

"기쁘긴. 염병…."

오히려 기분 나쁘다.

내게 요정-이라 쓰고 벌레라 읽 는다-을 붙여놓은 것만 해도 불쾌 한데. 갑작스레 내 영지에 수작질까지 해놓다니.

내 말에 니디아는 과장스럽게 우는 시늉을 한다.

"흑혹 너무 슬퍼요. 한지훈 씨는 저희의 도움이 싫으신가요?"

"응. 싫어."

"그럼 이것도 싫으시겠네요?"

그녀가 방실 웃으며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유리병 안에는 초록색 액체가 넘실거린다.

세계수의 수액이다.

"이것도 싫다면, 뭐 아쉽지만…."

"고맙게 받지."

나는 재빨리 그녀의 손에서 세계수의 수액을 낚아챘다.

포션보다 훨씬 좋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구할 수 없는 귀물이다. 조금 모양이 안 살지만, 그럼에도 챙겨야 한다.

그에 그녀는 방끗 웃었다.

"어머, 싫다면서요?"

"……."

나는 침묵한다.

"뭐, 너무 그렇게 민감하게 여기 지 마세요. 이건 어디까지나 호의니 까요."

"호의라."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 적어도 내가 겪었던 블랙 오케스트라에서는 그러했었다.

그런 내 거북한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니디아가 말한다.

"저희 여왕님께서는, 한지훈 씨를 이쪽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세 요."

"나를?"

"네."

니디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턱을 괴고 고민한다.

사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엘프 여왕 엘리스는 전생, 그러니까 게임 속 시나리오를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시나리오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전생의 동맹이었던 흑마법사 크 라함과 대립하고 있다.

아마 회유가 가능하리라 생각했 겠지.

"그러니까 한지훈 씨. 이건 저희 엘프의 호의예요. 이쪽에서 영지를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할 테니…."

그녀가 잠시 뜸들이고는, 말했다.

"나중에. 이쪽의 편이 되어주세 요."

엘프의 편이 되어달라는 말. 아마도 멸망을 막는데 협조하라는 것이겠지.

문득 나는 궁금한 것이 생겨 물었다.

"니디아. 어째서 너희 엘프는 나 를 죽이지 않지?"

"…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이어 묻는다.

"너희 엘프들은 날 경계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엘 븐 가디언인 니디아를 보냈다. 요정 들까지 붙여 감시하도록했다. 관찰을 지속했다.

이유야 당연히 내가 이 세상을 이미 한번 멸망시켰었기 때문에.

엘프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험요 소나 다름없을 것이다.

"나를 죽이는 것이 가장 편할 텐 데."

그리고 아직 나는 약하다. 물론 기사를 능가하는 무력을 지녔지만 저 엘븐 가디언에 비하면 허접쓰레 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만큼 엘븐 가디언들은 강력한 존재들이니.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는 거지?"

지금 나를 죽여버린다면 편할 텐 데.

그렇다면 엘프는 미래의 커다란 위험요소를, 새파란 새싹일 적부터 밟아버릴 수 있다.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시스템이란, 시나리오 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한지훈 씨."

"그건 무슨 소리지?"

"운명이라는 건 이미 정해진 거예요. '시스템'에 의해서 말이에요."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한 기색.

나는 그녀의 말에 집중한다.

"한지훈 씨. 한스를 죽이셨죠?"

"… 그래."

거점 방어전 당시 놈을 죽였었다.

다시 되살아났었지만.

"한스가 죽은 건 한지훈 씨의 업 적이에요. 하지만 시스템은 그걸 용 납하지 않았죠. 그에게는 '이름 없는 별'을 대적하는 운명을 타고났 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시스템은 한스를 되살려 운명을 계속 이어나가 게 했죠."

"그게 무슨…."

나는 무어라 물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스가 되살아난 것처럼. 만약 한지훈 씨가 죽는다면, 또 다른 '이름 없는 별'이 나타날 거예 요. 그건 되살아난 한지훈 씨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인물이 그 운명을 계승한 것일 수도 있지요."

머릿속이 복잡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 시스템이라는 놈에게 모두 휘둘리는 운명인 거군. 나를 죽이든, 살리든."

"맞아요! 이 세상은 이미 멸망하 기로 각본이 짜여있는 거예요."

세상이 멸망한다는 이야기를 저 토록 해맑게 말하다니. 저년은 머리 가 돈 게 확실하다.

나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더욱이상한데. 나를 지원할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뭘 하던 시나리오에 따라서 이 세상은 멸망하는데 말이야."

운명론이라. 생각해보면 허무한 이야기다.

어차피 이 세상은 멸망하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확정되어있다. 무얼 해도 이 세상은 멸망한다. 그러니 지성체들은 발악할 필요 없이 자리에 앉아서 종말을 기다리면 된다. 끝하지만 굳이 엘프는 나를 지원하 려고 한다.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 다며 말이다.

그 모순이 신경 쓰인다.

그녀는 시원스레 긍정했다.

"네! 맞아요. 그 어떤 지성체가 발악하든 이 세상은 각본에 따라 멸망하기로 예정되어있어요. 저도, 여왕님도 , 제국 황제도, 그 누구도 그 흐름을 바꿀 수는 없죠."

"그러면 왜…."

"단. 딱한 명을 빼고요."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이름 없는 별. 한지훈. 당신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

엘프들은 내가 이곳 출신이 아니 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은 상위차원의 존재였지요. 덕분에 유일하게 시스템을 '볼' 수 있고, '조작'할 수 있으며, '이용'할 수 있어요. 나아가 시스템이 정한 시나리오마저 파훼할 수 있고오7짚이는 것이 아주 없진 않다.

내가 자주 사용하던 여러 홀로그램들. 내 정보를 확인하고, 능력치 와 스킬을 올리며, 퀘스트를 완수하는 것.

그것이 지금 니디아가 말하는 시스템의 정체이리라.

시스템을 본다는 것은 홀로그램을 말하는 것. 조작한다는 것은 스킬운용을 말하는 것. 이용한다는 것은 능력치를 상향시키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한지훈 씨. 당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에요. 네, 맞아요. 주연의 운명. 그것이 이름 없는 별의 정체 이지요."

나는 니디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기에.

그녀의 눈동자는 본래 숲처럼 푸 르른 녹색이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 가.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황금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직감했다. 지금 내 앞에서 떠들 고 있는 이는 온전한 니디아가 아니다. 누군가가 그녀의 신체를 빌려 말하고 있다.

"오직 당신만이 이 세상의 각본을 바꿀 수 있어요. 한지훈 씨."

니디아는 그리 말하고는 눈을 감 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니디아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그녀의 눈동자 색은 본연의 색인 녹색으로 돌아와 있다.

"어머, 어디까지 말했죠? 아. 맞 아. 어째서 영지를 돕냐고 했죠? 이건 호의예요. 저희 여왕님께서 는…."

"됐어. 그만해."

"네?"

"이미 다 들었어. 너희 여왕에게 직접 말이야."

아무래도 엘프 여왕이 잠시 그녀의몸에 빙의했던 것 같다.

피식 웃었다.

"주인공이라."

이름 없는 별의 정체. 이 세상 주인공의 운명.

하긴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나. 나는 게임의 플레이어였으니까.

"그래서, 마일루."

나는 시선을 돌려 마일루를 바라 봤다. 녀석은 언제부터였는지,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도 엘리스가 어떤 수를 써 마일루를 잠재우지 않았을까. 이런 대화는 아무에게나 노출할 수 없을 터이니.

나는 마일루까지 깨웠다.

"헛…! 제가 언제부터 자고 있었 죠?!"

녀석이 화들짝 놀라서 깬다. 좀 얼빵한 모습이다.

이렇게 얼빵한 녀석이니 나한테 엘프라는 것을 단번에 들쳤었지.

나는 니디아와 마일루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결론만 말하자면, 너희 엘프들이 나를 돕는다는 거지?"

"뭐, 그렇죠."

대답한 것은 마일루였다.

녀석은 소매로 입가를 슥 닦더니 말을 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엘프 여왕님 께서 한지훈 님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온 것이고요."

"그 '적극적'이란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이지?"

"저희들이 엘프란 것이 알려지지 않을 정도요."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마일루가 아닌 니디아였다.

"한지훈 씨. 영지를 운영하려면 이것저것 도움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전혀."

"에이, 아닌 거 다 알아요. 뭐… 한지훈 씨라면 영지를 잘 발전시킬 수 있겠죠. 다만 엄청 느리게 말이 에요. 북쪽 산맥의 자원들을 개발한 다 한들,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요'?"

맞는 말이긴 하다. 북쪽 산맥을 개발하고, 영지를 제대로 키우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저희 엘프의 지원이 있다면 훨씬,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어요."

사실 그녀의 제안은 꽤나 달콤하 긴했다.

엘프들은 수백 년을 산다. 그리고 그 수백 년이라는 시간은, 한 분야에 있어 최고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때문에 인간 세상에 숨어들어 활동하는 소수의 엘프들은 모두 드높 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상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마법사는 고위의 격을 달성했으며, 학자는 드높은 소양을 쌓았다.

물론 엘프들은 인간들의 역사를 관찰할 뿐 개입하진 않기에, 군관이나 영주 등 지도자격의 인물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협조가 있다 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

그녀가 다시금 제안한다.

"그러니까, 지원은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예요. 영지, 빠르게 키우고 싶잖아요?"

나는 잠시 고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가 영지를 지원한다.

"정신이 없네."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관사 복도를 걸었다.

방금 전, 간접적으로나마 엘프 여왕 엘리스와 만났다. 여러 이야기 를 들었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며, 유 일하게 시나리오를 비틀 수 있다는 것.

엘프 여왕은 멸망을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나를 지원해 자신의 편 으로 회유하고자 한다.

나는 오랜만에 어떤 명령어를 호 출해 보았다.

"퀘스트 창."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퀘스트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서브 퀘스트]

[적 부대-크라그 연대를 수색 섬 멸하라.]

나는 홀로그램의 중앙, 어떤 문구를 주시했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시나리오를 완성하라는 것. 그저 게임처럼, 이 대륙을 정복하라는 것 으로만 여겼었다. 하지만 그런 문구는 없다.

어쩌면 이 시나리오를 완성하라는 것은, 그저 이 세상의 마지막을 지켜보라는 것 아니었을까.

"…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홀로그램을 꺼버렸다.

지금 당장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나중에 계속해 서브 퀘스트들을 완료하고 점차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좀 더 윤곽이 잡히겠지.

그보다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이 있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관사의 어떤 방으로 향했다. 마이사가 기거하는 방이었다.

"마이. 있냐?"

문을 열며 말했다. 방안에는 마 이사가 책상 위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내 양녀로 받아졌다는 것이 주위에 알려졌기에, 마이사는 더 이상 남장 따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모처럼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있다.

물론 머리는 아직도 짧은 상태였 지만.

"한지훈이구나. 무슨 일이나 ?"

녀석이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 본다.

마이사 슈베츠. 슈베츠 왕국의 왕녀이자, 시나리오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줬던 그녀.

나는 그녀에게 말한다.

"너. 이제 일 좀 해야겠다."

"……?"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이어 말했다.

"슬슬 너를 써먹어야지."

마이사를 방치하는 건 이제 끝이다. 나는 그녀를 참모로 키울 것이다.

마이사의 재능이 개화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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