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 한지훈 천인장. 오스카 군단장 이다. 아직 거기 있는가?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곧장 대답했다.
"아펠도른 천인대장 한지훈입니다. 군단장 각하."
- 그래. 방금 전 보고를 들었다. 그 크라그 연대 놈들과 전투했다고 하던데.
오스카의 목소리는 조금이나마 격양되어 있었다.
문득 엘락의 말이 떠올랐다.
'크라그 연대라 하면 이를 가는 북부군 장성 분들이 꽤 많을 겁니다.'
그이를 가는 장성들 중 하나가 오스카인 듯했다.
오스카 군단장의 말에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군단장 각하. 저희 천인대는 전날 밤 매복을 통해 적 척후병들을 급습. 오십의 적중 삼십의 적을 사살하고, 일곱의 포로를 사로잡는데 성공했습니다."
- 그전투했던 놈들이 크라그 연 대였다 이건가?
"맞습니다. 방금 전, 심문 작업을 통해 얻은 정보입니다."
수정구너머 오스카가 침묵했다. 아마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문득 그가 말했다.
- 놈들의 단검을 확인했나?
"단검… 말씀이십니까?"
- 그래. 크라그 놈들은 전부 검은색 단검을 가지고 다닌다. 날은 한 뼘 정도고, 손잡이 밑바닥에는 마름모꼴의 음각이 박혀져있지.
"확인해보겠습니다."
나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잠시 후 병사들이 단검 몇 자루를 들고 온다.
방금 전 오스카가 묘사했던 단검 과 동일했다.
"맞습니다. 검은색 단검들이군요. 손잡이 아래에는 마름모꼴이 있고, 그곳에 숫자가 있습니다."
- 그 숫자는 백인대 번호다. 무슨 숫자가 있지?
"붉은색 '3'입니다."
- 3번 백인대라. 크라그 중에서도 정예인 놈들이군.
오스카가 말하길, 크라그 연대는 백인대 단위로 그 수준이 다르다 한다. 10으로 갈수록 실력이 낮은 편이고, 1에 근접할수록 높은 실력 이라고.
내가 상대한 놈들은 크라그 3번 백인대였다.
- 한지훈 천인장. 조심하게, 놈들은 강해. 어찌 보면 기사단만큼이나 위협적인 녀석들이다.
오스카는 크라그 연대를 직접 상대한 군관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무 서움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 놈들이 그쪽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주력군의 침공로가 루벤 방면 이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놈들은 분명 자네의 영지를 교란시키고 진군로를 확보하려 할 거다.
고개를 끄덕였다.
루벤 지방이 카렌 왕국군의 진군로가 되는 것. 과거 시나리오에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나리오에서 루벤 지방은 단숨에 카렌 왕국군에게 밀려버리고 만다. 이후 제국군이 다시 전진해 수 복하긴 하지만, 이미 영지는 파괴되 어있는 상태.
그렇게 놔두진 않는다.
이곳은 내 영지니까.
- 한지훈. 자네는 오러를 다루지.
문득 오스카가 내게 묻는다. 나는 수긍했다.
"그렇습니다. 군단장 각하."
- 여태까지는 기사가 아니라면 자네를 제압할 수 없었겠지. 자네는 오러를 다루니까. 하지만 그건 크라 그 연대 또한 마찬가지이네.
"… 군단장님? 그 말씀은."
- 크라그 연대의 백인장들은 모두 오러 유저들이다.
순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러 유저. 기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다. 그리고 오러를 다룬다면 분명 기사가 되는 것이 일반적일 터.
헌데 크라그 연대는 분명 경보병 부대임에도, 지휘관들은 오러를 다 룬다고 한다.
오스카의 말이 이어진다.
- 그건 놈들의 태생이 본래 기사단이었기 때문이지. 놈들의 전신은 크라그 기사단이었다. 전쟁 와중 기사단의 기사들이 다 죽어나가고, 남 아있던 십여 명의 기사들이 일반병사들을 지휘해가며 싸운 게 그 부대의 시초다.
놈들의 비화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러를 다룬다니…."
놈들의 지휘관들이 모두 오러 유 저들이라는 사실이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오러 유저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천인대에 오러를 다루는 이는 나 혼자밖에 없는 상황.
불리하다.
제기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네 천인대 만으로 놈들을 상대하 기엔 힘들 것 같군. 아무래도 지원 이 필요하겠지.
"지원입니까?"
- 그래. 지원을 해주마. 제국 국 방성에 요청해 소규모 기사단 하나 를 파견해주지. 그들과 함께 크라그 놈들을 상대해라.
후우-. 하는 소리가 수정구에서 들려온다. 저건 연초 연기를 내뱉는 소리일까, 아니면 한숨일까.
- 그래. 기사들이 있다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한지훈 천인 장, 자네에게 명령을 하달하마.
나는 오스카의 말에 집중했다. 그가 내게 지시한다.
- 크라그 연대 새끼들을 처 부숴 버려라. 놈들이 자네 영역에서 활동 하고 있다는 건, 분명 산맥 어딘가에 캠프를 차려놨단 것이겠지. 그곳에 놈들과 놈들의 지휘관새끼들이 있을 거다. 찾아내서, 쓸어버려.
"… 명령을 받듭니다. 군단장 각하."
- 통신 종료. 무운을 빌지.
비콘 수정구에 어렸던 푸른빛이 점차 사그라든다. 직후,
- 띠링!
[서브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적 부대-크라그 연대를 수색 섬 멸하라.]
임무가 부여되었다.
보고를 마친 뒤. 나는 병사들에게 척후병 사살과 정찰 임무를 내 리고는 영지로 귀환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쪽 산맥 개발을 서둘러야겠 어."
말을 몰고 가며 그리 중얼거렸다.
내 영지, 루벤은 본래 시나리오에서는 개전과 거의 동시에 쓸려나 갔다. 카렌 왕국의 공세가 생각보다 거셌다는 것도 있었지만, 그이상으로도 제국에서 루벤 방위에 소극적인 탓도 있었다.
하긴. 이해할 만했다.
'루벤은 인구수 1만도 안 되는 영지에, 별다른 전략적 가치도 없었으니까.'
루벤은 그야말로 계륵 같은 영지였다.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인구도, 자원도, 지형도, 그 무엇 하나 특출 난 것이 없었다. 때문에 개전 초기 제국군은 굳이 루벤 마을을 방어하는 것보다는, 더 방어가 유리한 후방지형에서 카렌 왕국군을 상대하는 걸 택했다.
뭐,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굳이 루벤 마을을 방어하려 할 바 에야 전선을 좀 더 뒤로 미루는 한 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놈들을 궤멸시키고 싶었겠지.
그 덕분에 루벤은 완전히 잿더미 가 되었다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루벤은 내 영지다. 보호해야 한다. 카렌 놈들에게 짓밟히게 놔둘 수 없다.
때문에 나는 북쪽 산맥의 개발을 서두르려고 한다. 상부를 설득하기 위함이다.
피식 웃었다.
"북쪽 산맥의 자원을 알게 된다면, 제국에서도 절대 이곳을 포기하 진 못하지."
루벤 북쪽 산맥에는 막대한 양의 자원이 묻혀있다.
철광석과 마나석을 시작으로, 여러 값비싼 희귀 지하자원들까지.
그 자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제국은 절대 루벤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금방 되찾는다 한들, 이 지역을 점령했던 카렌 놈 들이 약탈해갈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결심했다.
"가능한 빠른 속도로 북쪽 탐사 를 끝낸다."
기사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약 일주일이 걸린다 한다. 그때까지 북쪽 산맥을 탐색해,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리라.
자원을 찾는다면 제국군이 루벤 지방을 사수할 것이고, 찾지 못한다 면 카렌 왕국 놈들이 내 영지를 짓밟아 버리겠지.
나는 말을 몰고 내 영지로 향한다.
관저에 도착한 직후 랑스를 찾았다. 랑스는 여러 행정관들과 함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한 랑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한지훈…님."
랑스는 나를 무어라 부를지 갈피 를 못 잡고 있었다. 아마 명목상이 나마 양자가 된 이상,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까.
뭐, 호칭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안 으로 들어섰다.
"그래. 영지의 상태를 보러왔는데 ."
"오오, 이분이 한지훈 님이십니까? 이거 반갑습니다."
내가 입을 열자, 행정관인 듯한 노인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두 네 명에 달하는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내 모습을 잠시 살펴보 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오스텐트 가의 가신 들… 아니. 이제는 라이젠 가문의 가신이 되었군요. 저는 헨리 돌턴이 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수석 행정 관 자리를 맡고 있죠."
"헨리 돌턴. 반갑다, 한지훈 라이 젠이다. 성씨가 있는 걸 보면 귀족 인가 보지?"
"부족하지만 준남작 작위를 가지 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오스텐트 가문을 섬겼었지요."
말로만 듣던 가신가문이다.
고작 남작가문에 가신가문이 있던 예는 드문데. 그것도 널리고 널 린 명예귀족도 아닌 준남작이라니.
혹시, 오스텐트 가문은 예전에 꽤나 성세하지 않았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앞으로도 랑스를 잘 보좌했으면 좋겠어. 나는 영지에 잘 안 붙어있을 것 같거든."
"맡겨만 주신다면, 온 힘을 다해 도련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영주님."
노인과 악수했다.
보아하니 저들의 충성도도 괜찮은 것 같다. 그게 나를 향하는 것 이 아닌 랑스를 향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주위 행 정관들을 바라봤다.
'전부 다 노인들이네.'
저 노인들이 어린 영주대리를 보 좌해 영지를 운영하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좋아. 그럼 랑스, 내가 말했던 병사들의 훈련과 무장은 어떻게 되 었지?"
요새로 가기 전, 나는 랑스에게 몇 가지 일을 지시했었다.
영지군의 무장, 훈련, 그리고 북쪽 산맥 탐사의 준비까지.
지금 내가 묻고 있는 건 그 일들에 대한 보고였다.
그에 랑스가 뿌듯하다는 얼굴로 대답한다.
"준비는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병사들의 군복과 장비류를 모두 새것 으로 교체했고, 탐사에 필요한 도구 들도 완비했습니다. 그리고 훈련도 꾸준히 진행 중이고요."
"좋아. 돈은 충분했고? 백 명의 병사들을 무장시키고 탐사도 준비해야 했을 테니, 꽤나 많은 돈이 필요했을 텐데."
"그게…."
내 질문에, 랑스가 머뭇거리며 대답을 주저했다.
혹시 돈을 과하게 쓰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직후 흘러나온 랑스의 대답은, 너무나 예상외의 것이었다.
"사실, 돈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한지훈 님이 주신 돈은 거의가 보관되어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병사들의 병장기는 결코 값싸지 않다. 병기인 검과 창, 그리고 방어 구인 경갑과 투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자원과 품이 들어간다.
아무리 허접쓰레기인 품질로 보 급한다 한들. 영지군의 수가 무려 백이다. 절대 한두 푼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헌데 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니?
나는 표정을 찌푸리며 물었다.
"돈을 거의 쓰지 않았다니. 얼마나 남았는데 ?"
"그게… 금화 열 개…."
"금화 열 개밖에 안 남았다는 소리는, 490금화를 썼다는 건데. 오히려 너무 과하게 쓴 편 아닌가?"
"아, 아니요! 반대입니다. 병사들을 무장시키는데 10골드밖에 안 썼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작 10골드로 병사 백을 무장시켰다?
무기와 방어구가 땅 파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좋은 분이 나타나서 저희 영지 를 지원하신다고…."
녀석이 무어라 이어 말하려 할 때였다.
끼이이익. 갑작스레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랑스는 눈을 크게 뜨고 말한다.
"네! 저기! 저분들이 저희를 도와 주셨어요."
나는 시선을 돌려 새로이 등장한 두 명의 인물들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한지훈 씨! 반가워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굴라덴 이후로 처음이지 요?"
"…너희들이 왜 여기서 나와?"
등장한 것은 엘븐 가디언인 니디 아, 그리고 엘프 상인 마일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