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나는 곧장 1번 백인대를 이끌고 요새 서부 산맥으로 향했다.
울창한 숲. 나무는 우거져있고, 드문드문 마물들이 목격된다.
바스락, 바스락.
수풀을 헤쳐 가며 병사들을 이끌 고 움직인다.
"여기군."
그리 중얼거리며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적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 아있다.
군홧발에 짓눌려 꺾인 잡초. 흙 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 검에 의해 잘린 것이 분명한 수풀들까지.
적 척후조의 흔적이 시야에 잡힌다.
흔적들은 대충 십인대 규모. 어쩌면 이십인대 정도일수도 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카렌 왕국의 척후조라."
척후조는 모두 정예다.
온갖 험지를 타고 다니며, 적의 영역까지 침투한 뒤 정보를 들고 귀환하는 이들.
그들은 주로 십인대 단위로 나뉘 어 은밀하게 이동한다.
놈들을 잡기 위해서는 이쪽도 정예병들을 운용해야 할 터.
나는 놈들을 잡기 위해 1번 백인대를 운용하려 한다.
1번 백인대는 레인저들로 이루어 져 있다.
모든 병사들이 척후조 출신으로 이루어진 그들이라면, 같은 척후병 들을 사냥하는데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엘락. 지도."
"여기 있습니다, 천인장님."
엘락이 전술지도를 꺼내들어 내 앞에 대령했다.
나는 펜을 들어올렸다. 붉은색 잉크가 묻어있는 깃펜이었다.
지이익.
지도의 서쪽에서 우리 요새까지 로 향하는 붉은색 선 다수가 그려 진다.
"놈들의 예상 침투로는 이곳, 이곳, 이곳이다."
이미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수많 은 지휘경험을 쌓은 나다.
적들의 예상 침투로 따위, 지도 를 본다면 바로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유력한 침투로의 수는 세 개. 모두 침투에 유리하며, 은신과 후퇴에 유리한 지형.
놈들이라면 저곳들을 통해 들어 올 것이다.
"각 침투로를 감시해야 한다. 십 인대 단위로 흩어져 매복한다."
침투로 중간중간마다 십인대를 배치한다면, 분명 놈들을 포착할 수 있으리라.
"다만, 십인대끼리의 간격에 신경써라. 여차할 때 호응해야 하니 말이다."
물론 각 십인대끼리의 간격 또한 중요하다.
너무 가깝다면 병사들의 수가 많 아져 매복이 쉽게 들킬 것이고, 너무 멀다면 아군의 교전에 신속하게 호응할 수 없다.
적당한 간격이 중요하다.
문득 엘락이 입을 열었다.
"천인장님. 조금 의외입니다."
"무슨 소리지? 엘락."
"천인장까지 진급하셨는데도 현장을 뛰시니 말입니다. 보통 천인장부터는 현장에 잘 안 나가지 않습 니까?"
하긴 그렇긴 하다.
보통 전투현장을 지휘하는 것은 백인장 계급이었다. 천인장은 대규모 군단 단위의 야전이 아니라면 현장에 나서지 않는다. 천인대 지휘 소에 처박혀서 지도를 들여다 볼 뿐.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가 좀 현장 체질이어서 말이 야."
천인장이 되었다 한들, 안전한 지휘소에 처박혀 있을 생각은 없다.
내 능력치는 이미 어지간한 기사 를 상회한다. 그런 내 무력을 굳이 구석에 처박아 묵히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그리고 지휘관이 직접 현장에서 병력을 지휘한다면 휘하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지고 말이다.
엘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인장님은 참군인이십니다."
이렇듯, 직접 전투에 참여한다면 휘하의 신뢰와 존경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부대의 지휘권을 더욱 공 고히 할 수 있으니 .
나쁘지 않은 일이다.
"잡담은 됐고, 이제 슬슬 병력을 배치하지. 내가 1번부터 5번 십인 대를 배치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6번부터 10번 십인대를 배치하고 오겠습니다."
바스락, 사각, 부스럭.
엘락이 약 오십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이제 녀석은 내가 지시했던 매복지점에 병사들을 배치할 것이다.
나 또한 병사들을 이끌고 매복지 점으로 향했다.
"5번 십인대. 너희는 이곳이다."
"알겠습니다."
"4번, 3번 십인대. 너희는 저기 음영 진 부분과, 저 바위 뒤다."
"명령을 받듭니다."
"2번, 1번 십인대. 너희들은 좀 더 서쪽이다. 따라와."
요새 서쪽 산맥은 지형이 험한 편에 속했다. 하긴, 어느 산이 안 그러겠냐마는 이 산은 유독 경사가 가파른 곳이 많다.
그래서 매복하기에 더욱 좋았다.
굴곡진 덕분에, 침입해올 루트가 한정되어있으니까.
"2번 십인대는 여기다. 1번 십인 대 따라와."
나는 침투로 곳곳에 병력들을 배치해갔다.
그들에게 위장을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장이라고 해봤자 별 다른 건 없었다. 그저 창날과 검날 이 빛에 반사되지 않게 천으로 감 싸고, 수풀쪼가리들을 모아 몸을 가 리게 했을 뿐.
사실 이 정도만으로도 은신 효과는 대단했다.
"1번 십인대. 너희는 나와 함께 매복한다."
"요새에서 제일 먼 곳이군요."
"그래. 그리고 적에게 제일 가까운 곳이지."
척후조 병사들이 수풀을 자르고, 풀 더미를 모았다. 이후 병사들이 숨어있는 곳 주위를 위장하기 시작 한다.
잠시 후. 우리는 완벽히 위장을 끝냈다.
"… 좋아. 이제부터 목소리 낮추 고."
위장이 끝났으니 . 이제 기다려야 한다.
나는 품속에서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짭조름한 타이어를 씹는 것 같다.
"이제부터 움직임에 주의하고. 병사들 교대로 돌아가며 경계해."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보니 지금 꼴이 꽤나 웃겼다.
나는 천인장이다. 헌데 스스로 나서서 병사들과 매복을 하고 있다.
한국군이었다면 꽤나 웃긴 모습 아니었을까. 연대장 내지 대대장인 영관급 장교가, 일개 알보병들과 매 복하고 있다니 말이다.
헌데 웃긴 건 내 주위의 병사들 이 나와 함께하는 것에 있어 아무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눈빛을 보면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했다.
하긴, 카일을 비롯한 1번 십인대 대원들은 내가 십인장이었을 적 부터 함께해왔던 전우들이었다.
이 염병한 세상에서 눈을 뜨자마 자 본 것이 바로 카일 녀석의 면상 이었으니 . 부담감은커녕 친근감까지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경계 아닌 녀석들은 잠시 자둬 라. 경계병은 적들이 오면 조용히 깨우고."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아마도 오늘 밤, 카렌 왕국의 척 후병들이 올 것이다. 오늘의 달빛은 그리 강하지 않으니까. 야간침투를 하기에 최적이리라.
나는 눈을 감았다. 기온과 날씨는 온화했기에, 수면을 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야가 가라앉는다.
"… 인장님. 천인장님."
얼마나 수면을 취했을까. 누군가 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눈을 떠 확인해보니 카일이었다.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 말한다.
"적을 발견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음이 일지 않도록 주의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야심한 숲속의 모습.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수풀을 흔들었고, 시야는 어둠에 의해 극단적으로 제약되어있다.
나는 청각에 집중했다.
- 바스락, 바스락.
들려온다.
군홧발이 잡풀을 밟아가며 전진 하는 소음. 그것은 규칙적이었으며 한껏 억제되어있다.
확신할 수 있다. 놈들은 잘 훈련 된 척후병들이다. 그 몸놀림이 결코 허접하지 않다.
공국 정찰병 놈들 따위를 상대하 다 저런 놈들을 보니, 내심 기대되었다.
얼마나 잘 싸울까.
툭툭.
카일이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건 드렸다. 무언가 알리고 싶은 게 있는 모양.
녀석이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 자신의 눈을 가리킨 다음, 다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뭔가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놈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스락.
갈색 군복을 입은 척후조 병사들. 놈들의 수는 정확히 열한 명이었다. 척후병 열 명과 놈들의 지휘자인 십인장 한 명.
확실히, 은밀하게 움직인다.
카일과 병사들이 나를 주시한다. 눈빛으로 알 수 있다. 저들은 내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지시했다.
'대기.'
손바닥으로 지면을 누르는 듯한 제스처. 제자리에서 대기하라는 수 신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병 들은 어느새 우리가 있는 곳을 넘어, 계속해 침투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놈들의 모습을 재차 확인했다.
'주변 경계가 만만치 않은데.'
카렌 왕국 척후병들은 민감하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병사 둘이 계속해 후방을 확인하고, 나머지 병사들이 전방과 좌우를 확인한다. 가운데에 있는 십인장은 전체적인 동선을 점검하는 듯.
저 모습을 보고는 확신했다. 놈 들은 일반적인 척후병이 아니다. 아마 척후병 중에서도 꽤나 베테랑인 놈들일 터다.
후욱.
숨을 한껏 억누르며 발걸음을 옮 겼다.
- 띠링!
['스킬 : 은신술(하급)' 이 활성화 됩니다.]
은신술 스킬이 활성화 되었다.
나는 발걸음을 극한으로 억제해 가며 놈들에게 접근했다. 은신술 스킬 덕분에 내 존재를 숨기며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오른손을 검의 손잡이에 가져다 대며 고뇌한다.
'놈들의 십인장은 반드시 생포해 야 한다.'
잊으면 안된다. 목표는 정보 습 득이지, 척후병 사살이 아니다. 나 혼자라도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생포해야 한다. 놈들을 잡아 정보를 뽑아내야 한다.
바스락. 바스락.
놈들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에 집중했다. 녀석들의 경계가 언제 흐트러지는지, 시각이 아닌 귀로 판단했다.
기회는 곧 찾아왔다.
바스락! 사각, 바스락.
한순간 엇갈린 소음. 놈들의 긴장이 살짝이나마 흐트러질 때다.
나는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파악!
수풀이 튄다. 내 몸이 앞으로 달 려 나간다. 카렌 척후병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
경악한 놈들의 표정.
과연 잘 훈련된 녀석들이다. 놈 들은 적인 내가 코앞에 왔음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침투 임무 중인 것을 상기해 최대한 소음을 억누른 것이겠지.
물론 헛수고다.
서걱.
병사 하나를 베었다. 놈의 창날을 스쳐 지나가며, 검날로 옆구리를 깊게 그었다. 옆구리 끝부터 배꼽까지 오는 기다란 자상이 일어났다.
후드드득.
핏물이 떨어지는 소리.
"망할! 발각당했다!"
"막아! 놈을 처치하고 바로 퇴각 한다!"
놈들의 상황파악 능력은 꽤나 탁 월했다.
정체를 들키자마자, 이쪽을 처치 하고 퇴각한다는 결정을 바로 내리다니. 공국 척후병들은 급습당하면 대부분 허둥지둥거릴 뿐이었는데 .
재차 확신했다. 놈들은 카렌에서 도 더더욱 정예인 놈들이다. 아마 네임드 부대겠지.
그래봤자 나한테는 안 되지만.
"후욱."
숨을 내쉬며 검을 휘둘렀다. 검 날이 낭창거리는 곡선을 그리며 적 들의 모가지를 베고 지나간다.
서걱, 후드득.
쏟아지는 핏물이 미약한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인다.
"제기랄! 강하다!"
"상대하지 마! 포기하고 퇴각해! 달려!"
내가 막 세 명을 처치했을 때, 놈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과연. 도주하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나 재빠르다. 하지만 놈들은 몰 랐을 것이다.
뒤쪽에도 병사들이 있다는 걸.
"카일! 놈들이 도주한다! 막아!"
"명령을 받듭니다!"
카일을 비롯한 1번 십인대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달 려들어 놈들의 퇴로를 틀어막았다.
"망할…!"
적 십인장의 목소리.
나는 놈을 향해 달려 나갔다. 녀석이 이를 악문다.
"네놈! 어딜…."
나는 녀석의 무릎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파앙!
파공성이 일며, 내 검날이 녀석 의무릎관절을 베고 지나갔다. 놈이 신음하며 휘청인다.
퍼억.
휘청이는 녀석을 발로 걷어찼다. 적 십인장이 바닥을 구른다.
"카일! 십인장을 잡았다! 나머지 병사들은 필요 없으니 처치해!"
놈들의 지휘자인 십인장을 잡았 으니 , 나머지 병사들은 굳이 생포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천인장…?"
웃기게도,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 진 적 십인장이 천인장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그리고 녀석은 내복장을 바라본다.
가슴팍에 달려있는 천인장 계급 장.
고통에 힘겨워하는 녀석이 으득이를 간다.
"미친, 천인장이 어째서 여기 에…."
"그건 알 거 없고."
나는 녀석의 손을 걷어 차 검을 멀리 날려버리고는, 그나마 멀쩡한 무릎까지 베어버렸다.
서걱. 재차 울리는 절삭음.
"크아아아!"
놈이 고통에 허우적거린다.
콰직, 서걱. 후드득.
병사들이 나머지 적 척후병들을 도륙해간다. 나는 씩 웃으며 놈을 제압했다.
"이제 정보를 뽑아내야겠지."
적 척후병을 사로잡았으니 , 이제는 정보를 얻어낼 때다.
나는 놈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