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대문을 열고 관저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작은 정원. 사실 그 규모를 보면 정원이라기보다는 앞마당이라 불러야 할 정도였지만.
저벅, 저벅. 천천히 걸어 저택 안 으로 들어간다. 그런 내 뒤를 카일 과 엘락이 뒤따른다.
"다, 당신들은 누구야?!"
"꺄아아악!"
칼을 찬 제국군 사내놈들이 다가오자 놀란 것인지, 하녀들이 화들짝 놀란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 영주대리는 어디 있지?"
"여, 영주대리님은…."
"안내해."
하녀가 겁먹은 얼굴로 앞서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간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이 저택에서 그나마 커다란 방이었다. 하녀가 덜 덜 떨며 말한다.
"영주대리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을 열었다.
끼이익하고 열리는 문. 그리고 한 소년이 보였다.
나이는 대충 십 대중반쯤 되었 을까.
슬슬 사춘기에 접어들 것 같아 보이는 소년이 집무실 책상을 차지 하고 있다.
소년이 고개를 들어 올려 날 바라본다.
"… 당신은."
- 띠링!
[랑스 오스텐트]
[루벤 영주대리]
소년의 모습을 살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 눈동자에는 총기가 감돌고, 얼굴의 인상은 온 화했다.
잘 자란 귀족가 꼬맹이 같은 모습.
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꼬맹아. 네가 루벤 지방 영주대 리냐?"
"… 그렇다만. 당신들, 제국군이 군."
소년이 홀깃 내복장과 허리춤을 살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은 제국군 장교용 정복. 더해 내 허리 춤에는 장검집이 잘 차여있다.
"전쟁 중일 제국군이 이런 변경 까지 무슨 볼일이지? 설마 약탈인 가?"
녀석이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아마 단검이라도 꺼내 저항하고 자 하는 것이겠지.
피식. 나는 웃으며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일단 이걸 좀 보지그래. 단검은 내려놓고."
소년은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맙소사."
소년이 경악과 허탈함이 뒤섞인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녀석에게 말한다.
"서류를 보면 알겠지만. 너희 공국은 패망해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나는 이곳의 신임 영주로 부임 한 제국 귀족이고."
소년이 서류를 내려놓고는 나를 바라본다.
거 참, 잘생긴 놈이다. 나중에 여자 좀 울리겠다.
"하지만 이 영지는 우리 가문 의…."
"전임 영주였던 로베는 죽었다. 서류에 있을 텐데."
"… 아."
"그리고, 만약 살았다 한들 어차 피 이 영지는 내 것이 될 거였고."
공국이 패망한 이상 기존 공국 귀족들은 모든 영지를 빼앗기게 되 어있다. 당연히 전임 영주였던 로베 남작이 살아있다 한들 내가 이 영지의 영주가 되는 건 바뀌지 않는다.
"아… 아아…."
녀석이 충격에 빠진 것인지 멍하 니 서류를 내려다본다. 살펴보니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제 아비가 죽었다는 소식과 영지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충격에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잠시 침묵하던 소년이 시선을 들어 올려 묻는다.
"그렇다면… 저는 이 영지에서 쫓겨나는 겁니까? 아니면 절 죽이 실 겁니까?"
소년의 눈동자에는 충격과 허탈 함, 그리고 깊은 슬픔이 자리해있다.
공국은 전쟁에서 졌다. 소년은 전쟁으로 제 아비를 잃었다. 가족을 잃고 몰락귀족이 되었다.
영지에서 맨몸으로 쫓겨난다면 양반이고, 심하면 죽임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너. 내 양자해라."
"… 네?"
소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린다.
"백인장님. 좀 뜬금없었습니다."
"천인장이라니까."
"아, 자꾸 실수하는군요. 하여튼 천인장님. 정말 저 소년을 양자로 들이실 겁니까?"
저택 밖으로 나와 병력을 이끌고 요새로 향하는 길. 카일이 내게 물었다. 저 소년을 양자로 삼을 것이 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그래."
"허, 참. 기괴하다는 말밖에 안 떠오르는군요."
"기괴하다니?"
의외라는 말이면 몰라도, 기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에 카일이 이어 말한다.
"천인장님이랑 저 소년이랑 나이 차이가 몇이나 된다고 양자입니까?"
그렇다. 나랑 소년의 나이차는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내 나이가 스물넷이다. 그리고 저 소년의 나이는 열다섯이라 하던 가.
정확히 아홉 살 차이다.
"양자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다른 사람들이 천인장님을 어떻게 보겠 습니까?"
"아홉 살에 결혼해서 애 낳은 발 랑 까진 놈으로 보려나."
"그렇지요!"
카일이 말하고는 낄낄 웃었다. 상상해보니 웃긴 듯하다.
이 세상에도 조혼풍습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열다섯, 열여섯 살 때 의 이야기다. 아홉에 결혼해 애까지 낳은 예는 거의 없다.
나는 피식 웃었고, 카일은 이어 말했다.
"하여튼. 왜 갑자기 저 몰락귀족 가문의 도련님을 양자로 들이시려는 겁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결혼도 안 하신 분이…."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 만."
나는 걸어가며 잠시 생각을 정리 하고는, 대답했다.
"저 녀석에게는 능력이 있으니까."
"능력이요? 저 꼬맹이는 아무리봐도 그냥 흔한 어린애로 보입니다 만."
"지금 당장은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내가 랑스를 양자로 들인 이유.
그것은 내가 미래, 저 녀석의 활 약을 지켜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 수 있어. 저 소년은 나중에 이 영지를 크게 발전시킬 거다."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랑스는 이 영지에서 쫓겨나 구 공국령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나중에 우연한 기회로 제국의 행정관이 되고, 루벤 지방으로 돌아와 내정을 맡게 된다.
결국 랑스는 루벤 지방을 훌륭히 성장시켜 추후 남부 대륙에서 손꼽 히는 대도시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 라, 그 능력을 십분 활용해 제국의 재상까지 오르게 된다.
덕분에 나는 랑스를 잘 알고 있다. 당시 황제였던 내 측근 중 하나였으니까.
'굳이 쫓아낼 필요는 없지.'
이미 시나리오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던 랑스다. 굳이 쳐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리라.
'나는 행정 체질이 아니야.'
사람은 저마다 적성에 맞고 잘하는 것이 있다.
나는 전쟁을 잘했다. 그래서 오직 전쟁에만 신경을 썼었다.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에서 내정 에는 관심을 그리 많이 가지지 않았다. 대신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활용했다.
영지를 얻었을 때는 수석 행정관을 두어 통치를 지시했고, 황제가 되었을 때는 재상과 각 장관들에게 대부분의 내정을 맡겼다.
내정을 만지작거리는 건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모니터 너머 복잡과괴한 숫자들을 보며 마우스를 휘적거릴 바에, 웅장한 전투를 바라보며 지휘를 하는 것이 더 재밌지 않겠는가.
'물론 감시는 충분히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정을 온전히 유닛들에게만 맡기지도 않았다. 그들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주변에 수하들을 배치해 감시하고 견제하도록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정은 다른 유닛들에게 맡기고 오롯이 전쟁에만 집중 할 수 있었다.
직접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영지의 내정은 계속 랑스가 맡도록 하고, 간간히 감시만 제대로 해 준다면 별 문제는 없겠지.
녀석은 이미 시나리오에서 검증 된 인재이니까.
"아, 그리고 양녀도 한 명 들일 거다."
"양녀 말입니까? 참, 양자양녀 들이지 말고 차라리 그냥 결혼이나 하시지요."
"됐고. 내가 양녀로 들일 애는 너도 아는 녀석이다."
"제가 아는 여자꼬맹이라. 전혀 감이 안 잡힙니다만."
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려, 내 뒤 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마이사를 가리켰다.
"마이. 쟤를 내 양녀로 들일 거다."
"저 꼬맹이 남자이지 않습니까. 양녀가 아니라 양자라고 해야…."
"쟤 사실 여자야. 남자 아니야."
"거짓말 하지 마십쇼. 제 눈이 옹이구멍으로 보이십니까?"
이응. 옹이구멍으로 보여."
역시 카일은 마이사가 여자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니디아가 알아본 것은 그만큼 그녀가 눈썰미가 좋아서였을 거다.
"하여튼 양자랑 양녀를 둘 거야."
마이사를 양녀로, 랑스를 양자로 삼을 것이다.
마이사는 잘 키워서 참모로 삼고, 랑스는 영지내정을 맡기면 되겠지.
"나를 양녀로 삼는다고?"
내 말에, 마이사가 눈을 크게 뜨 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씩 웃었다.
"그래. 너도 남자 행세하며 소동 노릇하는 거 계속 하고 싶진 않잖아."
"그렇긴 해."
마이사가 내게 반말로 말하자 카일이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 사이가 어떤 건지 도무지 감 이 안 잡히는 모양.
나는 걸어가며 마이사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마이. 이제부터는 나 를 아버지라고 불러라."
"… 그건 싫은데. 진심으로."
마이사가 기겁했다.
아펠도른 요새는 루벤 마을에서 꽤나 멀어진 곳이었다. 걸어서 반나 절은 걸리는 거리. 요새가 국경을 접하는 곳에 설치되어있는 탓이었다.
가는 길에는 마물이 많았다.
"마물 한번 더럽게 많네."
콰직.
내 검날이 곰형 마물의 복부를 갈랐다. 커다란 덩치를 지닌 곰이 쿵 소리를 내며 대지에 쓰러진다.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검 붉은 핏물이 풀숲에 후드득 떨어진다.
함께 마물과 전투했던 에시가 입을 열었다.
"공국 마물 경계망이 완전히 붕 괴했기 때문이겠지요. 이 근방을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요새를 재건한 뒤 마물 토벌부터 해야겠어."
이 세상에는 마물이 많다. 마물은 오지 곳곳에서 자생하며 이곳저곳에 출몰한다.
그래서 군대가 중요했다. 군대가 주기적으로 기동해 마물 집단을 청소하지 않는다면 마물의 무리가 성장할 것이고. 그렇다면 추후 여러 마을에 쳐들어와 인명피해를 끼치 게 된다.
"영지군도 손봐야 하고."
물론 영지 자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영지군도 있었지만. 처음 마을에 들를 때 보았다시피 그 상태가 심 히 좋지 않았다.
나중에 제대로 정비해야겠지.
"좋아. 도착했다."
우리는 마물을 계속해 처치하며 진군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아펠도른 요새.
요새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았다.
벽면에는 이끼가 잔뜩 끼었고, 건물들은 언제 쓰러질질 모를 정도 로 위태위태해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다.
"십여 년이나 방치되었다고 했 나."
아펠도른 요새는 카렌 왕국과 요 한바르첸 공국이 정복 전쟁 당시, 제국에게 보급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설치했던 요새였다.
그리고 정복 전쟁이 끝나자마자 요새는 버려졌고. 아직까지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나는 병사들을 움직여 요새를 정 찰하게했다. 잠시 후 병사들이 돌아와 보고한다.
"보고드립니다! 천인장님. 요새 안에는 별다른 위험요소는 없습니다."
"요새의 상태는?"
"보수할 곳이 많아 보입니다. 내부 건물들은 모조리 쓰러져 있고, 요새의 망루 또한 노후화가 심각합니다."
"역시."
겉보기에도 위태로웠으니 , 멀쩡하 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손보는 것은 그리 어렵 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병대를 부 를 필요 없이 직접 수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다 한들 손볼 것은 요새 내부 건물들과 부대시설들뿐이었다. 도로는 주기적으로 오가는 상인들 덕분에 아직까지 남아있고, 요새의 외벽은 튼튼한 돌로 지어진 덕분에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에도 건재했다.
나는 요새를 둘러본 뒤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일단 요새에 비콘부터 설치해. 수리는… 일주일 안에 끝내도록 하고."
"명령을 받듭니다!"
"1번부터 5번 백인대는 요새를 정비해. 6번부터 10번 백인대는 요새 주변을 정찰해서 내게 보고하 고."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지금 제국군이 해야 할 것은 요새의 재건, 그리고 주변의 정찰이다. 마물을 소탕하는 것은 부대가 제자리를 잡을 때 해야 할 것이니.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엘락에 게 지시했다.
"그리고 엘락, 네가 잠시 천인대 를 맡아라."
"제가 말입니까?"
엘락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어 말했다.
"그래. 우리 부대는 부관이 없으니 말이야. 1번 백인대장인 네가 천인대 차석이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길래 제게 천인대를 맡기시는 겁니까? 혹시 멀리 가십니까?"
잠시 천인대를 지휘하게 된 엘락 이 물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마을 방향을 바라보며 말한다.
"영주가 되었으니 . 초반에는 조금 기틀을 잡아놔야 하지 않겠냐."
영지에 그리 큰 신경을 쓸 생각 은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이 영지가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묵힐 생각은 없다.
"잠시 영지 좀 정비하려고."
랑스를 잘 키운다면 제 스스로 이 영지를 발전시킬 것이다.
나는 말을 몰아 루벤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