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그녀가 표정을 찌푸렸다. 그만큼 내가 짚은 곳이 꽤나 예상외였을 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이곳을 원합니다. 신시 아 총독 각하."
"이해가 안 가는데 . 루벤 지방을 원한다고? 저 볼 것도 없는 곳을 왜 굳이…."
그녀의 반응은 당연했다.
루벤 지방. 공국 외곽에 자리해 있는 오지. 카렌 왕국과 국경을 접 한 탓에 교통망은 제대로 정비되어 있고, 지도상으로 표기된 영토는 남작령 치고는 몹시나 거대하지만. 실 속이 없는 영지다.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마물들. 1만에 훨씬 못 미치는 빈약한 인구 수. 별다른 성장 동력은 전무하며, 식량 산출량 또한 그저 그런 수준.
말 그대로 계륵 같은 영지다.
"한지훈 천인장, 다시 생각해보는 게 좋을 텐데. 저곳은 영지가 남작령치고 넓은 것 빼고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
그녀는 재차 나를 만류했다. 전쟁영웅인 내가 굳이 쓰레기 같은 영지를 원하는 것이 영 걸리는 모양.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요청한다.
"총독 각하. 저는 루벤 지방이 좋습니다. 저곳을 제 영지로 주십시오."
"… 이상한 녀석."
신시아가 나를 잠시 바라본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하필 루벤 지방을 저토록 원하는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기서 대박이 터지지.'
루벤. 지금은 보잘것없는 동네이 지만 사실 저곳은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는 영지다.
그저 지금은 아무도 그 잠재력을 모르기에 저평가 당할 뿐.
신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대가 원한다면 주지. 앞으로 루벤 지방은 그대 한지훈의 가문이 통치하게 될 거다."
나는 영지를 얻었다.
* * *
전쟁이 끝났기에, 제국 국방성은 공국을 점령한 각 군단에게 재배치 명령을 내렸다. 곧 각각 천인대 규모로 나뉘어져 국경지대로 이동. 새로운 부임지를 받게 되리라.
나 또한 새로운 부임지를 임명받 았다.
"운이 좋군요."
나는 서류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내가 부임할 장소는 내 영지인 루벤 지방에 배치된 천인대였다.
군단장 오스카가 씩 웃었다.
"운이 좋은 건 아니다. 이 몸의 배려지. 내 직접 손을 써 자네 영지와 가까운 천인대에 자네를 꽂아 넣었다. 고마워해라, 한지훈."
"감사합니다. 군단장님."
군단장과 친분을 쌓아놓은 덕분 에, 영지와 가까운 부대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한지훈. 자네는 부하들을 많이 아끼지."
"뭐,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전장을 전전했으니 말입니다."
"그레드 천인장이 내게 와 요청 하더군. 1번 백인대를 자네 천인대 로 재배치 해달라고."
"그레드 천인장이 말입니까?"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휘하던 1번 백인대는, 파 트라헴 천인대의 최정예 전력이었다. 그런 그들을 내 천인대로 빼달 라 하기엔 염치가 없는 노릇. 때문에 나는 천인장으로 진급하며 그들 과 떨어질 생각을 했었다.
정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기에.
하지만 그레드는 자신의 1번 백인대를 내게 양보했다.
군단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레드의 요청에 따라 1번 레인저 백인대도 자네 천인대에 합류한다."
그저 그레드 천인장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낄 뿐이다.
군단장이 고개 돌려 지도를 바라 본다. 그가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뭐, 하여튼 그렇게 되었다. 이제 자네가 부임할 천인대의 위치를 알 려주지."
그가 지휘봉으로 지도의 루벤 지방을 짚었다.
내 영지가 된 곳.
"루벤 지방은 카렌 왕국과 접경 지대다. 따라서 제국군이 배치되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루벤 지방은 카렌 왕국과 접해있는 오J지. 제국이 카렌 왕국과 사이 가 그리 좋지 않은 걸 생각해보면, 당연히 군대가 배치되어야 할 곳이다.
"이 루벤 지방에 아펠도른이라는 요새가 있다. 물론 방치되어 있는 요새이지만. 우리는 그 요새를 수리 해 천인대를 배치하고자 한다."
"그게 제가 맡게 될 천인대군요."
"그렇다."
오스카 군단장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아펠도른 천인대. 그게 자네가 지휘할 부대의 이름이다."
- 띠링!
알림음이 울리고,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아펠도른 천인대장]
나는 정식 천인장이 되었다.
군단이 본격적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공국 수도를 점령하고 있던 제국 군이 흩어져 공국령 곳곳으로 이동했다. 어떤 이들은 수도 방위 병력 으로, 어떤 이들은 외곽 국경지대 로.
그리고 나는 내 천인대가 배치된 루벤 지방을 향해 진군해갔다.
"백인장님! 함께해서 다행입니다."
"이제는 천인장이야 인마."
"아, 이런. 실수했습니다. 천인장 님."
카일이 실실 웃으며 내 뒤를 따 라온다.
지금 나는 말을 타고 있는 상태였다. 천인장이 되었기에 개인용 군 마 몇 필이 지급되었다. 덕분에 나는 걷지 않고 행군할 수 있었다.
내 옆을 따라오던 엘락이 말했다.
"제가 벌써 백인장이라니. 꿈만 같군요."
내부관이었던 엘락 또한 진급해 1번 백인대 백인장이 되었다. 착임 한지 고작 두 달 만에 진급이라,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빠른 승급 이었다.
나는 길을 따라 행군하는 와중 뒤를 바라봤다.
무려 천여 명의 병사들이 보인다. 절로 흐뭇한 미소가 올라왔다.
"천인장이라."
나는 천인장이 되었다. 이제는 천 명의 병력을 통솔할 수 있다.
십인장으로 시작해 백인장을 넘어 이제는 천인장이라니.
잠시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뭐. 아직 멀었지만."
천인장이 되었지만 여기서 안주 할 생각은 없다.
나는 더더욱 높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이모든 시나리오를 완수하고, 메인 퀘스트를 클리 어 할 것이다.
우리는 루벤 지방을 향해 행군해 간다.
* * *
"… 드디어 도착했다."
나는 앞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구 공국 수도였던 헤이드니아에서 출발해 내리 오 일간 행군했다. 루벤 지방은 구 공국령의 외곽, 국 경을 접한 지역이었기에 도착하기 까지 시간이 소요되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마을 이 보인다.
나름대로 커다란 규모의 마을이었다. 인구가 대충 수천은 되지 않 을까.
하지만 저 마을이 내 영지에서 가장 크고, 인구수가 천이 넘는 유 일한 마을이란 걸 생각해보면. 새삼 시골영지라는 걸 체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입구 를 향해 접근해갔다. 옆에서 따라오 던 엘락과 카일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천인장님의 영지이군요."
"그래. 내 영지지."
작긴 하지만 내 영지다.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현실의 내 영역이라고는 좁은 자취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 이상 한 세상에 들어와서는 변경이라 하나 영지의 주인이 되었으니 .
마을 입구로 다가가자 창과 칼을 꼬나쥔 병사들이 달려 나온다.
"멈, 멈추시오!"
그들의 모습을 살펴봤다.
투구나 경갑 없이 그저 군복 차림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군복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오래된 것인지 다 헤어져 있고, 군데군데 꿰매져 있다.
게다가 상태가 안 좋은 것은 들 고 있는 창 또한 마찬가지. 새로운 창으로 교체받지 못한 것인지 날의 이가 다 나가 있고, 날면에는 검붉 은 녹까지 진하게 쓸어있다.
복색도, 병기도 개판이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용건을 밝 히시오!"
병사들의 물음.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경악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려 천여 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사들이 마을로 접근해왔다. 병사들인 저들이 이곳까지 와 용건을 묻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했다.
"너희들의 영주다."
"영주라니?! 우리의 영주님은 로 베 님…."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나 본데?"
하긴, 영지가 정해진 후 바로 행 군길에 올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재차 말했다.
"너희 전임영주 로베는 전장에서 죽었다. 로베는 공국 2군단 백인장 으로 참전했다가 굴라덴 공방전 당시 실종되었지."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전장에서 실종되었단 소리는 탈영 아니면 전사했다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그럼."
"공국은 멸망해 제국 식민지가 되었고, 제국은 공국 영토 각지에 행정관과 신임 영주들을 파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을 맡게 된 새로운 영주고. 자, 이걸 봐라."
나는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 병사 에게 보여줬다. 내 신분을 증명하는 귀족작위서 류였다.
물론 병사는 글을 읽지 못하기에 그저 얼빵한 표정으로 서류를 바라 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들이민 양피지가 범상치 않다는 것만은 알아 봤기에. 그는 마침내 수긍할 수 있었다.
"정, 정말 신임 영주십니까? 공국이 패배했고요?"
"그래 인마. 방금 전 내가 보여 줬던 것이 요한바르첸 총독의 인장 이 박힌 영지증명서류다."
"맙소사. 공작이 죽다니…."
"그 공작을 죽인 게 나다."
병사는 내가 공작을 죽였다는 말을 허풍으로 알아들은 것인지, 별달 리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국이 패배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아들은 것 같다.
그가 시선을 돌려 내 뒤를 바라 봤다.
천 명에 달하는 병사들, 그리고 높게 솟아 펄럭이는 제국기.
병사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정말 공국이… 제국에게 정복당 했군요."
"그래. 정복당했지. 우리 위대한 제국에게 말이야. 자, 이제 나를 영주성까지 안내해라."
병사가 터덜터덜 걸어 앞서간다. 나는 말을 타고 그의 뒤를 ?았다.
제국의 병사들이 뒤따른다.
"영주성 입니다."
"… 이게 영주성이라고?"
나는 그리 말하며 내 눈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봤다.
분명 나는 병사에게 영주성으로 가라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병사는 영주성으로 가지 않고 웬 저택으로 날 데려갔다.
작은 저택이었다. 1층짜리에, 작은 앞마당이 딸린.
내 물음에 병사가 대답한다.
"저곳이 영주성입니다."
"아. 개소리하지 마."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영주성은 아니고… 관저입니다."
"영주성이 아니라 왜 관저로 온 거지? 나는 분명 영주성으로 안내 하라 말했다만."
"저희 영지에 영주성은 없습니다."
나는 병사를 노려봤다. 병사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저, 정말입니다! 저희 영지에 영주성은 없습니다! 영지 관리들도 저곳으로 출근해 일을 본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꿈틀. 내 눈가가 찌푸려지는 소리다.
솔직히 영주성이 아예 없을 줄은 예상도 못했다. 그만큼 이 시기의 루벤이 영세했다는 소리겠지.
'너무 발전했을 때의 모습으로만 생각했나.'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의 중후반 부, 루벤 영지는 극도로 발전했었다. 그렇기에 크고 웅장한 영주성은 물론, 커다란 도시와 드높은 성벽까지 갖추고 있었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는 깡촌이나 다름없다.
영주성이 없는 영지라니?
쯧 혀를 찼다.
"더럽게 가난한 곳인가 본데."
"하하…."
내 중얼거림에 옆에서 있던 카일이 맥 빠진 웃음을 보였다.
카일은 저래 봬도 제국 수도 출신이라고 들었다. 그거대한 대도시에서 살다온 녀석에게 루벤은 그야말로 빈곤한 시골마을로밖에 보이 지 않을 것이다.
녀석이 내게 물었다.
"천인장님. 정말 여기를 스스로 원해서 오셨습니까? 아닌 것 같습니다만…."
"조용히 해. 나도 조금 후회되려 고 하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 정도로 낙후되었다는 걸 미리 알았어 도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그만큼 루벤은 성장능력이 풍부한 곳이었 으니까.
물론 지금은 깡촌에 불과하지만.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에서 내렸다.
"뭐. 일단은 살펴봐야겠지."
만나서 영입할 사람도 있고.
나는 영주성으로 사용되고 있는 관저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