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삼백여 명. 많은 수다. 고작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백인대 전력 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수.
헌데 이상하다.
"… 잠깐. 저게 '적'이라고?"
분명 내 휘하 병사가 외쳤었다. '적 발견'이라고.
하지만 나는 눈앞의 광경에 저것이 진정 적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들고 있는 것은 병장기가 아닌 농기구들. 얼굴은 겁에 질렸고, 입고 있는 옷 또한 군복이 아닌 평상 복이다.
아무리 봐도 농부나 혹은 소시민 같이 보이는 모습.
깨달았다.
"설마. 동원된 민간인들인가."
공국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당연히 일반 민간인들을 군인으로 부리 려 하는 것일 터.
그 수가 십만에 달할 것이라 추정된다. 그리고 공국 같은 약소국이 그런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보급할 물자를 비축해뒀을 리 만무.
옆에서 있던 엘락이 고했다.
"뻔한 일입니다. 일반 백성을 끌 고 나와 고기방패로 쓰려는 수작 아니겠습니까?"
"고기방패라."
고기방패. 비인도적인 호칭이지만, 그이상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다.
"가라! 제국 놈을 죽여버려라!"
"앞으로 가! 꾸물대지 마!"
저 삼백에 달하는 인파 뒤,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바라봤다.
"도주하는 자는 즉결처형이다! 앞으로 가!"
"간악한 제국 놈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무기 들어올려! 전투를 준비하 라! 제국 놈들을 죽여버린다!"
인파 중 몇몇 이들이 공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저 동원군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인 듯했다.
나는 주위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방패 들어올리고, 창 내밀어. 곧 저놈들이 이쪽으로 들이닥칠 것 같다."
"알겠습니다, 백인장님."
병사들이 진형을 꾸린다. 방진을 세우고, 놈들의 돌진에 대비했다.
하지만 놈들이 돌진해올 것이라는 내 예상은 간단히 빗나가버렸다.
"저, 저걸 어떻게 이긴단 말입니까! 저희에게는 무기도 없습니다!"
"도망… 도망쳐야 해!"
"살려줘!"
동원군들이 하나둘 농기구를 내 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자식들! 도망치지 마! 탈영은 즉결처형이다!"
"가지 말라고 했다!"
"죽여!"
파앙! 퍼억.
공국군 군관들이 도주하는 동원 군들을 하나씩 베었다. 그에 민간인 들이 하나둘 핏물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그 모습에 겁먹은 다른 동원군들이 더 빠르게 뛰어 도주한다.
허허. 나는 얼빠진 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쟤들 뭐하냐?"
"보면 모르십니까? 저게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민간인들의 한계입니다. 머릿수는 많아도 통제할 수 없지요."
"우리가 싸워왔던 공국군이 그나마 용맹한 것이었구나."
적어도 나와 전투하던 공국군 병사들은 정말 불리한 상황이 아니라 면 도주하진 않았다. 하지만 저들은 민간인.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지 않았다.
더해 저들이 들고 있는 무장조차 농기구 혹은 나무 몽둥이 같은. 허 접한 물건들에 불과했으니 . 눈앞에 도열해있는 제국군에 질릴 수밖에 없을 터다.
"일단, 밀어버려야겠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 부대, 진형 유지한 채. 약 진!"
철그럭! 철컥!
내 명령에, 휘하 백인대원이 발 맞춰 걷기 시작됐다. 발소리가 좁은 골목을 쿵쿵 울리고, 동원군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의 감정이 더욱 진 해진다.
제국군이 방패와 창을 들이밀고, 보폭조차 맞춰 천천히 걸어오다니.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 아닐 것이 리라.
"나… 난 못해! 도망쳐! 도망쳐!"
"으아아아악!"
가까스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머지 동원군들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은 것은 제자리에서 허망한 얼굴로 서 있는 공국 군 군관들뿐.
주변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아무나 활 잘 쏘는 놈 없냐?"
"제가 좀 쏩니다."
"저 새끼 맞춰봐."
한 병사가 장검을 집어넣고, 등에 걸어놨던 활을 꺼내 들어 조준했다. 화살이 걸리고 시위가 당겨졌다.
"마, 망할! 뛰어라!"
"으으윽!"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군관들이 고개 돌려 뒤로 달아난다. 그때 높아지는 시위.
피잉!
화살이 파공성을 울리며 곧게 날 아간다. 번뜩이는 화살 궤적이 놈들에게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끄아악!"
공국 군관이 등짝에 화살을 맞고 바닥을 굴렀다. 나는 크게 외쳤다.
"5점!"
"점수가 너무 짭니다. 한 7점이나 8점은 돼야지 않겠습니까?"
"아니. 8점은 머리다. 등이나 복부는 5점."
"그럼 10점은 어디입니까?"
"가랑이 사이."
"잔인하십니다, 백인장님."
내 농담에 병사들이 클클 웃었다.
사실, 적진인 도시 내부에 진입 한 상황에서 너무 한가한 모습이었 으나. 그 정도로 적의 상태가 개판 이었다.
방금 전 동원군의 수는 언뜻 보아도 우리 백인대를 완전히 압도했었다. 헌데 마주치자마자 겁에 질려 도주하다니. 기껏 끌어올린 긴장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풀어쩔 수는 없는 노릇.
"자, 이제 정신 차리고. 앞으로 전진하자."
나와 병사들이 건물 사이를 가로 지르며, 점차 도시의 중앙으로 다가간다.
- 21번 동원 천인대! 와해되었습니다!
- 3군단 2번 천인대! 지원이 필요합니다!
- 53번 동원 천인대. 응답하지 않습니다.
공궁 지하 마나 통신실.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자리해있다.
공국의 주인인 공작 헤임스 요한 바르첸. 그리고 그를 따르는 몇 안 남은 대신들과 소수의 고위 군관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수정구 통신을 지켜보고 있다.
- 3번 동원 천인대. 전멸했습니다.
- 49번 동원 천인대. 응답하지 않습니다.
- 85번 동원 천인대! 와해되었습니다!
들어오는 보고들 중 좋은 소식은 없었다.
헤임스 요한바르첸이 표정을 와 락 찌푸렸다.
"오합지졸이군."
그의 중얼거림에 무어라 반박하는 군관은 아무도 없었다.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민간인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군대의 머릿수를 채웠다. 무려 10만의 병력. 이 정도 병력이라면, 밀어닥치는 제국군을 어느 정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민간인들은 훈련되지 않았다. 그 들은 겁에 질렸고, 무장은 빈약했다.
때문에 대다수 동원군은 제국군 과 마주치기만 한다면 도주를 택했다. 현장 지휘관의 지시를 완전히 거역하며, 전투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국군은 빠른 속도로 공궁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다. 마치 아무런 장애물이 없다는 듯 아주 편안하게 말이다.
"이래서야 승산이 없지 않나? 군사대신."
"… 면목이 없습니다. 공작 각하."
군사대신은 고개를 숙였다.
그로서도 몰랐을 것이다. 설마 막상 모은 동원군이 저토록 겁쟁이 였을 줄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누가 농기구를 들고, 제대로 무장한 군인들에게 맞서려 하는가. 어지간 한 정신력으로는 무리인 일이다.
헤임스가 중얼거린다.
"역시. 얼마 못가 이곳이 점령당 하겠군."
그들이 준비한 동원군 10만은 사실상 허수였다. 그만큼 훈련받지 않은 병력이란, 상상 이상으로 쓸모없는 것이었으니 .
진정 쓸 수 있는 병력은 1만의 공국 병사와 백여 명에 불과한 기사가 고작.
그가 결심한다.
"수도를 탈출한다."
"… 각하."
"이미 승산은 없다. 수도를 탈줄해, 북부로 간다."
"알겠습니다."
군사대신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가 군관들을 향해 지시해 공작 이 수도를 탈출할 준비를 하게했다. 공궁의 비밀통로를 점검하고, 지도를 펼쳐 탈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공작이 탈출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쯤 공작은 슬슬 도주를 계획하고 있겠지."
나는 걸어가며 그리 중얼거렸다.
주위를 바라보았다.
철그럭, 철컥, 저벅, 저벅.
내 휘하 백인대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아주 여유롭게 대로를 가로지른다. 저 앞에 있는 동원된 공국 백성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도 주한다. 공국 군관들이 도주하는 이들을 하나둘 베며 발악한다.
아주 개판이다.
"백인장님. 힘듭니다."
"뭐가."
"방패 들고 있느라 팔이 아픕니다. 다리도 좀 뻐근하고 말입니다."
병사들이 엄살을 부렸다. 여유의 반증이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없었다. 민간인 들을 모아 만든 동원군은 마주치자 마자 도망쳤고, 그들을 통제하는 군 관들은 소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점차 체력이 소 진되어갔다. 몇 시간 내내 방패와 창칼을 들고 움직였으니 아예 피로 가 없진 않을 터.
"점심 먹고 움직이면 안 됩니까'?"
"미친놈. 이래 봬도 지금 전투 중이다, 카일."
"이게 뭐가 전투입니까? 그냥 행 군이지."
"뭐 그렇긴 하다만."
실상 전투라기보단 행군, 혹은 나들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하리라.
나는 손에 들린 지도를 바라봤다. 공국 수도를 대략적으로 그려 넣은 지도였다.
"이 근처에 공궁과 이어진 비밀 통로가 있을 텐데."
지금 나는 공궁과 이어진 비밀통 로를 찾고 있다.
공궁은 유사시를 대비해 몇 개의 비밀통로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중 게임 속에서 헤임스가 튀어나왔던 통로를 찾고 있다.
"아르덴. 건물들 중 3층짜리이고, 하얀색 외벽에, 마차가 서 있는 저택을 찾아봐라."
"알겠습니다."
공궁과 연결된 비밀통로가 있는 저택. 분명 공국 정규병들이 지키고 있을 터다.
그곳만 찾는다면 우리는 비교적 수월하게 공궁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 제국 놈들이다!"
"놈들이 더 이상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전투 준비!"
우리는 공국 정규군과 마주쳤다.
더 이상 오합지졸인 동원군으로는 제국군을 상대할 수 없다 느낀 것일까. 공국 수뇌부에서 남아있던 1만 병력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선을 들어 올려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잘 입고 있는 군복. 들고 있는 병장기는 분명 군용이었고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있다.
"도시 중앙부에 꽤 가까이 왔나 보네."
저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곳이 목적지인 공궁 근처라는 것일 터.
"백인장님! 놈들이 방진을 세우 고 있습니다. 계속 진격하기 위해서는 저놈들을 격파해야 합니다만."
"어떻게 합니까?"
카일과 엘락이 묻는다. 그에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좋아. 드디어 이걸 써볼 때가 됐네."
나는 단검에 마나를 밀어 넣어, 오러를 발현했다.
화르르륵.
단검의 짧은 검신을 타고 오르며 푸른색 불길이 치솟는다.
"내가 제일 앞에서 선행한다. 나머지는 다섯 보 뒤에서 날 따라라. 좌측은 카일, 에시. 우측은 아드레 이, 파웰. 기억하지?"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돌진을 위해 자세를 잡 는다. 나는 씩 웃으며 단검을 꽉 쥐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다섯 보뒤에서 따라와라.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내 말에 십인장들이 고개를 끄덕 인다.
사실 부하들도 왜 앞서 돌진하는 나와 거리를 벌려야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명령이니 곧장 수긍하는 모습.
역시, 나는 부하 병사들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다. 덕분에 쓸데없는 설명하느라 시간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후욱. 숨을 들이쉬고, 나는 자리 를 박찼다.
파앙!
내 몸이 앞으로 향한다. 그에 기 세를 끌어올리는 상대편 공국군들.
"창 앞으로 겨눠!"
"제국 놈들이 온다! 중격에 대비 해!"
"으아아아아!"
놈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창을 들어올린다.
내가 앞서 달려가고, 다른 병사들이 그런 내 뒤를 따라온다.
나는 돌진하는 와중 오른팔을 쭉 내밀어, 단검의 첨단을 앞으로 향했다.
"이런 싸구려 단검이라도, 나름대 로 쓸 데가 있단 말이지."
씩 절로 미소가 나왔다.
놈들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임에 도, 단검에 오러를 계속해 밀어 넣었다. 단검의 검신이 점차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고, 이내 완전한 백색으로 변화한다.
그때 내 위치는 놈들 방진의 바로 코앞.
더더욱 많은 오러를 밀어 넣었다. 그러자.
- 콰아앙!
단검의 날이 터져나가 비산했다.
파편 세례가 공국군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