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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82화 (82/390)

82화.

천인장 그레드의 지휘막사 밖으로 나온 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야영중인 군영의 모습. 이곳저곳에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허리춤을 더듬었다.

찰그랑.

경쾌한 동전 소리가 울린다.

나는 350개가 넘는 수의 금화를 가지고 있다. 일반 병사들이라면 평생 동안 군직에 종사한다 한들 모 으기 힘든 거금이다.

그리고 나는 이거금의 일부를 사용하고자 한다.

"공작을 잡기 위해서는, 나름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나는 군단의 행렬 뒤쪽으로 걸어 갔다.

보급대와 상단 행렬이 있는 곳이다.

* * *

군대는 오직 병력만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식량, 무기, 피복. 그리고 간간히 술과 담배를 비롯한 사치품 등 많은 물자를 소모한다.

그것들을 나르고 옮기는 것은 대부분이 보급대가 부담했지만. 몇몇 사치품과 '특별한' 물건은 상단이 담당해 유통하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평소 찾아가지 않았던 상단행렬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오, 장교님이시군요. 뭔가 찾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접근하자 상인 한 명이 웃음을 띠며 맞이한다.

슬쩍 시선을 돌려 마차 주변을 바라봤다. 팔기 위해 꺼내놓은 물건 들이 보인다.

잘 말아놓은 연초, 군용품인 그것과는 다른 질 좋은 빵과 고기들, 술, 사제 장검들까지.

상인이 물건을 팔기 위해 입을 열었다.

"술? 고기? 아니면 담배? 수량이 많이 없습니다만은, 어지간한 건 다 있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찾는 게 없는 것 같다만."

"흐음. 뭘 찾으시죠?"

"메모리 크리스탈. 그리고 마나포 션."

"…혹시, 마법사이십니까?"

상인이 내 옷차림을 훑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의아함의 기색이 떠 올라있다.

그야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메모리 크리스탈, 마나포션. 내가 사고자 하는 것들이다.

메모리 크리스탈은 말 그대로 '기억'하는 수정구다. 음성이나 영상, 혹은 지식이나 정보 등 여러 가지를 기억케 할 수 있는 물건.

마나포션은 흔히 떠올리는 그것 맞다. 마나를 보충하는 포션.

둘 다 마법사들이나 사용할 법한 물건이다. 헌데 그것을 보병대 백인 장인 내가 찾고 있으니 그이유가 퍽 궁금할 터.

나는 씩 웃었다.

"쓸 데가 좀 있어서."

"흐음… 아쉽게도 제게는 없습니다만,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상인은 알고 있습니다."

"그거 참 좋은 소식인데. 어디있지?"

내 말에, 상인이 행렬 뒤쪽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쭉 가다보면 푸른색 마차가 있을 겁니다. 마일루라는 상인 이 끌고 온 마차인데, 마일루는 주로 마법사들에게 마나포션을 공급 하는 녀석입니다. 평소 다루는 품목 이마법 아이템이나 아티팩트 종류 이니 메모리 크리스탈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요."

"정보 고맙다."

"그럼 물건이나 사주시죠. 저도 얼른 재고 털고 제국령으로 가고 싶습니다."

상인이 넉살 좋게 말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금화 몇 개를 꺼내 들었다.

"그래. 사주지. 품질 상관없이 제일 싸구려 단검, 한 열 개 정도만 줘."

"오! 진짜 사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단검은 왜 사시는 겁니까? 백인장이면 따로 장교용 단검 이 나올 텐데. 게다가 파는 제가 말하기도 조금 그렇습니다만, 값싼 싸구려 단검은 내구성이 형편없습니다. 금세 이가 다 나가고 검신이 쪼개질 겁니다."

"싸구려도 쓰기 나름이잖아."

아니. 오히려 싸구려가 아니면 안된다.

품질 좋은 검은 원하는 효과가 안 나오니까.

"뭐, 저야 사주면 좋지요. 악성재 고인데."

"그럼 좀 싸게 주지?"

"그건 곤란하죠."

악성재고를 떠넘긴 상인이 싱글 벙글 웃었다. 나는 녀석을 뒤로하고, 소개해준 상인을 만나러 갔다.

파란색 마차. 잿빛이나 하얀색 천막을 친 대다수 마차들과 달리, 파란색 짐마차는 딱 하나밖에 없어 서 찾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파란색 로브차림의 청년이 보인다. 저 녀석이 마일루라는 상인이겠지.

내가 녀석에게 다가가자.

"… 흠? 어?"

녀석이 흘깃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내 얼굴과, 정 수리 위를 바라보고는 잠깐 흠칫하는 모습.

아. 촉이 딱 왔다.

나는 씩 웃었다.

"당신. 인간이 아니군."

"네?"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입고 있는 로브의 후드 안쪽으로 보이는 것은 선이 가는 미남자의 얼굴.

그 계집애 같은 얼굴을 보고는 재차 확신했다.

"당신 엘프잖아. 지금 날 보고 놀란 건 내 머리 위에 떠다니는 요정들을 봐서 그런 거고."

"아닙니다. 저는…."

"눈동자 지진 났다. 거짓말 더럽 게 못하네."

"뭐. 네가 엘프인지 아닌지는 상관없고."

엘프들이 은근히 인간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들었는데 . 설마 상단으로 군단 행렬에 따라왔을줄 은.

뭐 내가 알 바 아니니 신경 끄 고.

나는 지체 없이 요구했다.

"메모리 크리스탈, 마나포션 각각 다섯 개. 살 수 있나?"

"무슨 일로 그 물건들을 찾는 겁 니까? 마법사들의 심부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

"그냥 개인적으로 쓸 일이 있어서."

마일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한 물건들을 찾는 모양.

그 와중 흘깃흘깃 이쪽을 흘겨보는 것이, 자신이 엘프란 것을 간파 당한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걱정마라. 그쪽이 엘프란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까."

"어허! 목소리 낮추시고. 허, 참. 신기하네. 요정을 다섯이나 달고 다 니는 사람이 있다니."

내 주변에는 아직까지 요정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물론 다시 은신의 가호가 발현되어있기에 내 눈이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 지만. 평소 자연력을 다루며 요정과 교류하는 엘프라면 알아볼 것이다.

그가 마차에서 내가 원하는 물건 들을 꺼내왔다.

"메모리 크리스탈은 개당 20골 드, 마나포션은 5골드. 다 합쳐서 125골드인데… 돈은 있으십니까?"

"더럽게 비싸네."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들을 꺼냈다.

마법아이템 아니랄까봐 무진장비싸다. 125골드라니. 백인장 봉급 으로도 2년은 넘게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지만 돈을 쓰는데 아끼진 않는다. 필요한 지출이니까.

"여기 있습니다."

마일루가 내게 물건은 건넸다. 받아서 살펴보았다.

- 띠링!

[메모리 크리스탈]

[마나포션]

메모리 크리스탈은 주먹만 한 푸른색 수정구였고, 마나포션은 파란색 액체가 넘실거리는 작은 유리병 이었다.

마일루가 재차 강조했다.

"저기, 백인장님? 제가 엘프란 사실은 어디서도 말하지 마십시오. 재수 없으면 노예로 팔려가거나 숲에 되돌아가게 되니까."

"너도 내게 붙은 요정들 봤으면 알 거 아냐. 안 말해. 그러니 걱정 은 말고."

"정말 부탁입니다. 인생 종치거나 그 재미없는 숲으로 돌아가기는 싫습니다."

"그럼 물건 값 좀 깎아주던가."

나는 씩 웃으며 그리 말했다.

본의 아니게 녀석의 약점을 잡았 으니 챙길 건 챙길 생각이다.

그에 마일루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30골드 깎아 서 거의 원가에 드리겠습니다. 저도 운송비용 빼면 남는 게 얼마 없습니다. 그러니 진짜, 제발, 엘프인 거 어디 가서 말하지 마십쇼."

"당연하지. 물건은 고맙게 받지."

나는 환하게 웃으며 95골드를 내밀었다.

물건을 저렴하게 사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음. 한지훈 백인장. 여긴 무슨 일이지?"

물건들을 모두 사고 난 뒤. 나는 발걸음을 옮겨 제피르가 묵고 있는 천막을 찾았다.

제피르의 모습을 바라봤다. 평소 와 똑같은 외양이 자리해있다.

두터운 잿빛 로브, 심드렁한 중년인의 얼굴. 하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는 나를 향한 약간의 호감이 보인다.

속으로 생각한다.

'제피르는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여러모로 제피르와 엮였다.

거점 방위전 때 그의 눈에 들어 훈장을 수훈받았고, 갈레이 내성 탈 환때는 내 백인대의 돌진을 돕기 도 했으며. 최근에는 내게 요정이 붙은 것 또한 알려줬다.

이렇듯 나는 제피르와 여러 번 얼굴을 마주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래서 내심 기대하고 있다.

꽤나 불쾌한 부탁을 한들, 그동안 쌓은 친분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을까 하고.

나는 경례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 섰다.

"실례합니다, 제피르 마법단장 각하. 조금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 니까?"

"뭐. 나야 남는 게 시간이지. 요즘에는 별다른 전투가 없으니 말이다. 일단 앉지."

"감사합니다."

제피르가 읽고 있던 마법서를 턱 덮고는 건너편 의자를 권했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가 묻는다.

"그래서. 무슨 볼일인가? 한지훈 백인장."

"염치 불구하고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단장 각하."

"흐음. 일개 백인장이 전투마법단 단장에게 할 만한 부탁이라. 뭘 원 하지?"

제피르가 눈동자를 굴려 나를 바라봤다. 내 얼굴 표정을 읽는 듯한 모습.

나는 이어 말했다.

"마법을 얻고 싶습니다."

"…그건 무슨 생뚱맞은 소리지? 설마 자네가 내게 마법을 배운다는 개소리는 아닐 테고."

"메모리 크리스탈을 가져왔습니다. 이곳에 마법을 부여해줬으면 합니다."

제피르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올라온다.

사실, 방금 전 내가 한 부탁은 몹시 무례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을 메모리 크리스탈에 기록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마법사란 이 세계에서 가장 엘리 트인 이들. 그들은 과학자이며, 공 학자였고, 수학자이기도 하며, 때때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했다.

그야말로 모든 지식을 망라해 다 루어 마법이라는 이능을 일으키는 초인들. 당연히 엘리트 의식을 가지 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메모리 크리스탈을 혐오했다. 마법은 오직 마법사가 현장에서 발현해야 하는 신성한 것 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대뜸 찾아와, 메모 리 크리스탈에 마법을 부여해 달라 하니 불쾌할 수밖에.

'쫓겨나도 할 말이 없지.'

지금 당장 천막 밖으로 내팽개쳐 진 다음, 상관모독죄로 처벌받는다 해도 무어라 항변할 수 없다. 그 정도로 지금 내가 한 짓은 마법사 란 인종에게 꽤나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친분을 쌓은 게 헛것은 아니었는지, 제피르가 연초 를 입에 꼬나물며 말했다.

"일단 말은 들어보지. 하지만, 별 것 아닌 이유로 내게 이딴 부탁을 한 것이라면… 처벌을 각오해야 할 거다. 한지훈 백인장."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피르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저는 수도 공방전에서, 공국의 군주인 공작을 생포하려고 합니다."

"공작을?"

역시 의외인 것인가. 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후욱. 제피르가 회색 연기를 내 뿜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내 마법만 있다면 공작 새끼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습니다. 마법단장 각하."

"꿈도 야무지군."

피식. 제피르가 웃었다. 다행히 방금 전 불쾌함이 사라진 듯하다.

"굴라덴에서 꽤 큰 전공을 세웠 다고 하지만 간땡이가 부었어. 아무리 약소국인 공국이라 한들 그래도 일국의 군주다. 쉽게 잡히진 않을 터인데."

"자신 있습니다. 각하의 마법만 있다면 말입니다."

"이놈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군. 뭐, 그때마다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긴 했지만."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재밌어 보이는군. 내놔 라."

"무엇을 말입니까?"

"메모리 크리스탈 말이다. 무슨 마법을 필요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만. 내 할 수 있는 마법이라면 부여해주지."

안도했다.

그의 마법이 있다면 보다 수월하 게 공작새끼를 포획할 수 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법단장 각하. 반드시 공작을 잡아 보이겠습니다."

"그래. 이번에도 제대로 활약해봐 라, 한지훈."

그가 씩 웃으며 메모리 크리스탈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나는 폭렬폭풍 마법이 부여된 수정구 다섯 개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차근차근 공작을 생포하기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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