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웃기는군. 아직 백인장에 불과한 한지훈이 세상을 구하거나 멸망시킨다니. 엘프들 눈깔이 삐어도 단단 히 삐었어."
제피르가 그리 말하며 다시 손을 연초로 가져다 댔다. 그에 요정들이 흠칫했지만 다행히 그의 연기 세례는 요정들에게 향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제피르가 클클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세상을 구원할지, 멸망시킬지라 니.'
나는 이 세상을 정복했었다.
흑마법사와 연합해 황제를 죽이고, 제국을 차지했다. 가로막는 인간의 국가들을 모조리 부숴버렸다. 자유마탑을 파괴하고, 이인종들을 쓸어버리고, 세계수를 타락시켰다. 온 대륙에 내 제국기를 꽂았었다.
그리고 게임이 끝났었다.
단순한 정복활동이라 여겼었는데, 그것이 멸망을 부른 것인가?
"… 표정이 심각한데. 한지훈."
제피르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 봤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제정신을 차렸다.
그가 연초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 벌레들은 어떻게 할 거냐."
"요정들 말입니까?"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 지."
제피르의 시선이 요정들로 향한다.
"적당히 패서 다시는 못 오도록 혼내줄 수 있고, 아니면 아예 죽여 없애버릴 수도 있다."
꽤나 살벌한 소리. 그에 요정들 의 움직임이 멎었다.
요정들 또한 알고 있다. 눈앞의 제피르는 고위 마법사.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요정 다섯 마리쯤은 순식간에 제거해버릴 수 있다.
- 노, 농담이지?
- 우리는 아직 아무런 장난도 안 쳤단 말이야. 그런데 죽이겠다고?
- 너무 살벌한 소리는 하지 마…
녀석들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쪽에서 멀어지려 한다. 하지만 그네들은 멀리 갈 수 없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이 주변이 격리되 었기 때문에.
제피르는 어느 순간 주변공간을 장악, 폐쇄마법을 발현해놨던 것이다.
"자, 어떻게 할 거냐? 한지훈. 내가 추천하는 건 죽여 없애는 거다."
"각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피르 각하께서도 요정이 붙었다 고 들었었는데 ."
"나는 적당히 혼내서 ?아냈었다. 하지만 요정들은 ?아내고 ?아내 도 계속 새로운 놈들이 붙더군. 그래서 죽여 없애는 걸 추천한 거다. 뭐, 나중에는 포기했는지 알아서 떨 어져 나갔지만."
잠시 고민해봤다.
요정들. 엘프가 나를 관찰하기 위해 붙여둔 이들이다. 가만히 놔둔 다면, 녀석들은 계속해 내 움직임을 엘프들에게 알리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내는 것이 좋을 것이리라. 죽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는 것은".
요정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나를 판단하기 위해서 왔다 했지."
- 응. 하이엘프님이 직접 지시하 신 일이야.
"내가 너희들을 ?아낸다면, 다른 요정들이 붙나?"
-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하이엘프님이 말하기를, 엘프 여왕님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던데.
영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다.
하긴. 엘프 여왕이 전시나리오 를 알고 있다면, 절대 나를 관찰하는 걸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개입하겠지.
결정했다.
"요정들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것 같군요."
"… 정말인가? 한지훈."
제피르가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 봤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정을 다섯이나 붙였는데,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습니다. 계속 ?아내느니 그냥 감수하고 살렵니다."
"뭐. 네 결정이 그렇다면야."
제피르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러자 답답한 공기가 갑작스레 다시 순환하기 시작했다. 발현시켜놨던 폐쇄마법이 해제된 것이다.
그에 요정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요정들이라.'
엘프는 지금 요정들을 통해 내 정보를 습득, 판단하고 있다.
내가 이 세상을 다시 멸망시킬 것인지, 혹은 구원할 것인지.
엘프가 원하는 것은 내가 이 세상을 구원했으면 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만약 내가 녀석들이 원하는 방향에 합당하게 움직인다면.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엘프는 그 개체 수가 인간에 비해 턱없이 적으나 개개인의 강함과 잠재력은 인간을 훨씬 상회한다.
그런 엘프를 잘한다면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터.
나는 차분한 눈으로 요정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도시 굴라덴은 쉽게 정리되었다. 도시의 시민들은 제국군의 통제에 순응했고, 덕분에 치안은 안정화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 진군했다.
"다음 목표는 델라웨다."
걸어가며 병사들에게 브리핑했다.
델라웨는 공국의 중북부 거점도 시였다. 굴라덴과 비슷한 인구수를 가지고 있으며, 역시나 성벽은 없다.
내 옆에 따라가던 엘락이 물었다.
"백인장님. 그럼 델라웨에서도 흑마법사들이 있을까요?"
"흑마법사라."
나는 엘락의 말에 잠시 생각해봤다.
델라웨 또한 인구수 10만이 넘는 거점도시 중 하나. 본래라면 흑마법사들이 있어야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델라웨에는 흑마법사들이 없을 거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델라웨 또한 십만이 넘는 인구 를 가지고 있습니다. 흑마법사들이 노리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아직도 많은 인구가 남 아있으려나. 지금쯤 도시는 텅텅 비 어있지 않을까 싶은데."
내 말에 엘락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도시에 사람이 별로 없다 하니 믿기지 않는 모양.
나는 이어 말했다.
"이미 굴라덴에서 흑마법사들이 도시의 주민들을 희생하려 한 것이 밝혀졌어. 게다가 오스카 군단장 각하께서 그 사실을 공국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려버렸지."
내 훈장 수여식 겸 공국 포로 처 형식에서 오스카는 누차 강조했었다.
공국은 도시의 주민들을 버렸다 고.
"소문이 퍼질 거야. 굴라덴은 더 이상 통행을 제한하지 않고 있으니까."
통행을 제한하지 않은 건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저 먼 초원 평야지대. 그곳에는 물건을 이고 지고 피난을 떠나는 피난민 행렬이 보였다.
굴라덴을 떠나다른 마을로 향하는 민간인들이었다.
"당연히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도시 델라웨에 그 소식이 퍼져있겠지. 주민들은 공국에게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도시를 떠날 거다."
"공국 측에서 도시를 통제하지 않겠습니까?"
"걔들이 그럴 병력이 남아있을 것 같아? 지금쯤 수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병력이 없을걸?"
이미 공국은 붕괴해가고 있다.
10만 도시의 주민들을 통제하려 면 아무리 적게 잡는다 한들 몇천 의 병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공국은 그 몇천의 병력조차도 움직이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
녀석들은 아마도 델라웨를 포기 한 뒤, 수도에서 방어하리라.
"뭐. 도착한다면 알 수 있겠지."
나는 계속해 발걸음을 옮겨 움직였다.
6만에 달하는 제국군이 계속해 북상한다.
"굴라덴이 점령당했습니다."
공궁의 알현실. 그곳의 옥좌 위에 앉아있는 공왕 해임스 요한바르 첸.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 봤다.
그의 시야에 드러나는 것은 몇 없는 대신과 군관들의 모습.
"제국군이 계속해 북상해오고 있습니다."
"페라다 루고 후작이 참모단과 함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탈영자 수가 폭증하고 있습니다!"
"변경지대에서 마물이 계속해 집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때 제압하지 않는다면 위협이 될 것입니다."
군관들의 입에서 계속해 안 좋은 소식이 튀어나왔다.
제국군의 북상, 요동치는 민심, 방어군 사령관이었던 페라다 루고 후작의 실종, 그리고 폭증하는 탈영 자 수와 마물의 창궐까지.
좋은 소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
헤임스 요한바르첸이 눈을 감으 며 물었다.
"지금 우리 공국에 남은 총 병력 의 수는?"
"약 1만 정도입니다."
"… 턱없이 부족하군."
공국은 막다른 길에 몰렸다.
제국군은 강했다. 그들은 흑마법사와 연합한 공국군을 격파했을 뿐 만 아니라, 계속해 밀고 올라오고 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약 1만의 병력이 끝.
공국의 마지막 전력이다.
기사는 거의 궤멸해 그 수가 수십밖에 남지 않았다. 전투마법사는 전무.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신들의 수가 심히 적어 보이 는군."
헤임스 요한바르첸이 눈을 뜨고, 알현실에 들어찬 이들의 모습을 살 폈다.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공국의 수뇌부들.
그들의 수는 평소보다도 훨씬 적 어보였다.
한 절반 정도 될까.
"다들 도주했군."
대신들은 무어라 답할 수 없었다.
공국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되자, 공국의 고위 대신과 귀족들은 가진 재산을 정리하고 타국으로 망명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으로 처형 당할 바에, 자라난 조국을 버리는 것을 택한 것이다.
해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공국은 정녕 끝인가."
이미 제국은 공국령 한가운데를 넘어, 계속해 북진해오고 있는 상황.
희망은 없다.
"아직입니다. 공작 각하!"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공국의 군사대신 중 한명이었다.
그가 고한다.
"전시 총동원령을 내리십시오."
"총동원령이라."
대신의 말에 헤임스는 표정을 찌푸렸다.
총동원령. 말 그대로 국가의 모든 것을 동원해 외적에 맞서 싸우 라는 명령이다.
국민들 중 창칼을 들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징집하고, 식량을 공출하 며, 강제노역을 시키는.
"총동원령을 내린다면 보다 많은 병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군사대신의 말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총동원령을 내린다면 많은 수의 군사가 모인다. 아직까지 공국이 통제하고 있는 수도와, 인근에 자리한 여러 중소도시들에서까지 징집한다 면 최소한 십만에 달하는 병력은 순식간에 보충할 수 있을 터.
하지만 헤임스는 알고 있다.
"그만한 병장기가 없지 않나. 아무리 동원령을 내려 병력을 수급한 다 한들, 그들에게 쥐어줄 무장이 없다면 제대로 된 군대로 운용할 수 없을 터인데."
공국의 생산력이 문제였다.
공국의 공업 능력은 그리 출중하지 않았다. 야금기술이 뒤떨어졌기에 검이나 창 등의 병기를 만든다 한들 그 품질은 조약했고, 생산 속도 또한 더뎠다.
총동원령을 시행해 병사를 모집 한다 한들 그들을 무장시킬 만큼의 무기는 없다.
그에 군사대신이 고한다.
"무기는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이지. 대신."
"농기구라도 들려주면 되지 않겠 습니까? 어차피 갓 징집한 이들입 니다. 훈련도는 모자라고, 전투경험 또한 없지요. 저희 공국은 질로써 싸운다면 필패입니다."
제국군은 강하다. 그들은 오랜 정복 전쟁으로 그 덩치와 질을 계속해 키워왔으며, 정복 전쟁 당시의 경험 또한 장교와 장성을 따라 쭉 계승되어왔다.
노련한 제국군을 상대로 보다 적은 병력으로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남은 것은 물량 공세뿐이다.
"훈련도가 떨어지고, 무장 또한 빈약하다 한들. 그래도 고기방패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희에게는 흑마법사의 전력 또한 남아있습니다. 그들과 협 조한다면, 수도를 방어하는 것도 가능할 터!"
"…피해가 커다랄 터인데."
해임스는 군사대신의 말에 고민 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 총동원령. 국가의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전투에 나설 수 있는 모든 이들을 끌어모 아 사지로 내모는 것이다.
모든 것이 박살날 것이다.
치안이 무너지고, 농지는 황폐화 되며, 경제는 얼어붙을 것이요, 민 심은 요동치리라. 만약 제국을 몰아 내는데 성공한다 한들 공국은 국력이 크게 쇠퇴하리라.
허나 헤임스는 군사대신의 말을 듣고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제국군을 몰아내는 것이 당장 급합니다. 그이후의 일은, 나중에 고민해도 늦지 않습니다."
공작은 전시다.
총동원령을 승인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