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머리 좋네."
나는 단상 위를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오스카는 훈장 수여식을 빌미로 도시 주민들을 모았다. 그리고 공국 장교들을 처형하고, 흑마법사의 시체를 정화하며 계속 강조했다.
공국은 너희들을 버렸다고. 흑마 법의 제물로 바치려 했었다고 말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론전이라니.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좋은 방법이었다.
사실 도시를 점령하는 것보다는, 점령한 도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다.
저 민간인들 중 제 형제와 가족을 죽인 제국군에 분노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다. 그런 이들이 모여 민병을 조직할 것이고, 새로운 점령 군을 향해 저항 의식을 불태울 터 인데.
군단장 오스카는 지금 그들의 가 진 분노를 돌려버렸다. 공국이 흑마법사를 끌어들여 주민들을 희생했 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혀서 말이다.
준비 또한 완벽했다.
내 훈장의 전공을 읊으며 공국 수뇌부의 만행을 알렸고, 공국 참모 들을 불러내 그것이 사실이라 말하 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흑마법사들 의 시신이라는 증거품까지 제출했다.
더해 그 시체들을 불태워 진짜 흑마법사란 걸 재차 증명하기까지.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덕분에 치안은 안정되겠네."
적어도 반란이나 민병대의 창궐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이 소문이 퍼져 공국 백성들 의 민심까지 흔들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단상 위를 바라볼 때였다.
"훈장 수여 축하하네, 한지훈. 이제 벌써 훈장이 네 개군."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내 직속상관 그레드 천인 장이었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아직 그레드 천인장님에 비하면 많이 멉니다."
"많이 멀다니? 겸손이 과하군 그래 한지훈. 금성훈장까지 내정된 녀석이."
"이런. 벌써 소문이 퍼졌습니까?"
오늘 아침 소식을 들었었다.
제국 황실에서 내 금성훈장 신청을 수리했다는 소식이었다. 더해 남작 작위까지 내려준다고 했던가.
"이제 자네는 작위를 가지게 되 겠군. '경' 이라는 존칭을 붙여줘야 하나?"
"오그라듭니다. 절대 그러지 마십쇼."
"한지훈 경?"
"으으윽."
그레드가 이죽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문득 물었다.
"그러면 금성훈장과 작위수여는 언제 한다고 하던가?"
"군단장 각하께서 말씀하시기를, 공국 수도를 점령하고 종전이 찾아 온 뒤에 한다고 들었습니다."
내 금성훈장과 작위수여는 이미 통과되었지만, 아직 서훈식을 거치 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직까지 나는 평민 신분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황가의 인물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만 작위가 인정될 것이다.
그레드가 단상 위를 바라봤다.
"한지훈. 축하한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분명 방금 전 훈장 서훈을 축하 했음에도, 그는 또다시 축하를 표했다. 그것도 좀 전보다도 더욱 진중 해진 얼굴로 말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금성훈장을 받은 것 말이다. 자네는 앞으로 드높게 올라갈 것이다."
"금성훈장이 그리 대단한 훈장입 니까?"
"그래."
그레드가 단번에 수긍했다.
"제국 금성훈장은 최고명예훈장 과 더불어 단 두 개밖에 없는 최상 격의 훈장이다. 받은 인물들 대부분 이 군단장, 기사단장, 야전군사령관 등 모두 굵직굵직한 인물이 되었 지."
제국은 훈장을 결코 남발하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과정을 거쳐 정말 대단한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만 훈장을 수여했다.
그렇기에 제국 군인들 중 훈장을 받은 이들은 모두 빠르게 진급했다. 금성훈장이나 최고명예훈장 같은, 최상위 훈장을 받으면 어김없이 군 고위직이 되었고 말이다.
"자네도 언젠가 고위 군관이 되 겠지."
그레드는 그리 말했다. 그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이 대륙 자체를 정복했던 나다. 계속해 전쟁에 참여하고, 전공을 세워나간다면. 언젠가 군 고위 직이 될 터.
그레드가 씩 웃었다.
"한지훈. 혹시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인 장님."
연인이라니?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인데.
"내 딸이 좀 많이 예쁘다네. 혹시 관심 있다면 전쟁이 끝나고 소개를 해줄까 하는데 ."
"… 관심 없습니다."
"아쉽군 그래. 자네처럼 훌륭한 사윗감 구하긴 힘든데 말이다."
진지하게 한 제안은 아닌 듯, 그 가 어깨를 으쓱여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직감할 수 있다. 그의 말 은 빈말인 듯 진심이었다.
하긴. 지금의 나는 평민이지만 곧 작위를 수여받으면 귀족 계급이 될 것이고, 금성훈장까지 받게 되었 으니 언젠가 군 고위직이 될 터이 니.
나 정도 스펙이면 훌륭한 사윗감 이라 할 수 있지.
이딴 게임 속 세상에서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나는 화제를 돌려 그레드에게 물었다.
"천인장님. 제피르 단장님이 어디 계시는지, 혹시 알고계십니까?"
"제피르 단장님은 왜 찾는 건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니디아. 하이엘프이자 엘븐 가디언이며, 최근 정체를 숨기고 내 옆을 따라왔던 이.
그녀는 분명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의 견습 마법사로 위장하고 있었다.
"찜찜한 건 못 견디는 성격인지 라."
제피르에게 가 물어본다면, 어떻게 그녀가 신분을 숨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오게, 한지훈 백인장. 무슨 일로 날 찾았지?"
제피르의 집무실은 무너진 내성 옆 작은 저택이었다.
저택 안에는 크고 작은 마법수정 구와 마도구들, 그리고 두터운 책들 이 널려있었다.
나는 경례하며 들어가 제피르 앞에 섰다.
"단장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하며 제피르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평소처럼 두터운 회색 로브 를 입은 채, 연초를 뻐끔거리며 뱉 고 있었다.
볼 때마다 연초를 입에 꼬나물고 있다니. 지독한 골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씩 웃었다.
"견습 마법사에 대해 물어보러 왔겠지."
"그렇습니다."
그 또한 날 찾아올 줄 알았다는 듯 반응했다.
제피르가 앞에 의자를 가리키고, 나는 걸어가 앉았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먼저 말해두겠지만. 본래 자네를 보좌할 견습 마법사는 다른 인물이었다. 그 니디아라는 마법사는 우리 마법단에 없었어."
"허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엘프가 본래 자네를 보좌할 견 습 마법사를 기절시켜 제압했던 거다. 그리고 그 로브와 마도구를 빼 앗아 자네 옆으로 가 우리 마법단을 사칭했고 말이다."
제피르의 말을 듣고는 감탄했다.
니디아는 나를 감시하기 위해 본래 내 옆에 올 견습 마법사를 기절 시키고, 가진 도구들을 빼앗아 마법사 행세를했다.
하긴. 며칠이면 몰라도 고작 하룻밤 마법사 행세를 하는 것이면 그런 막무가내 식 일 처리로도 괜 찮았겠지.
문득 제피르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보다 자네에게 벌레가 붙어있는 것 같군."
"벌레 말씀이십니까?"
나는 제피르의 말에 내 옷차림을 살폈다. 벌레가 붙어있다는 말에 털 어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피르가 말한 벌레는, 내가 생각하는 그 벌레가 아니었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탐색."
웅웅웅!
그의 손끝에서 푸른색 빛이 번쩍 이더니, 곧 이 방 전체를 메우듯 청색 파장이 일렁였다.
직후 드러나는 것은 이형의 생물 체들.
- 으악! 들켰다!
- 꺄아아악!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멍한 눈으로 내 주위에 떠 다니는 그것들을 바라봤다.
"요정 ?"
드러난 것은 요정들이었다.
작은 몸집을 가졌고, 날개를 움직여 허공을 유영하는 종족. 엘프의 친구이자 그네들의 동맹.
요정족.
그들이 어째서인지, 내 주위에 떠올라있었다.
- 어떡해! 들켜버렸어!
- 우리의 은신을 어떻게 알아차 린 거야?!
- 하이엘프님이 직접 걸어주신 가호인데!
그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주위를 정신없이 비행했다.
제피르는 손을 뻗어 요정들 중 하나를 쥐었다.
- 꺄아아악! 잡혀버렸어!
"네놈. 어째서 한지훈에게 붙어있는 거지?"
제피르가 요정을 쥐고 윽박질렀다. 하지만 요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 인간에게 말해줄 것 같냐! 놔 라! 놔아아!
"빌어먹을 벌레 년들. 정신을 차 리게 해주지."
제피르가 연초 연기를 한껏 흡입 한 다음 손아귀에 쥔 요정에게 내 뿜었다.
- 구와아아악! 갸아아악!
요정이 그 매캐한 연기에 괴성을 내질렀다.
저 작은 덩치에 연초 연기 세례는 화생방 고문이나 다름없을 거다.
결국 그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 콜록, 콜록! 말할게! 말할 테니까 놔줘!
- 연초 연기로 고문하고 있어…
- 너무해!
- 역시 인간은 잔인해.
제피르가 요정을 테이블 위에 풀 어줬다. 그녀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도, 날개를 펼치지도 못했다.
좀 많이 불쌍해 보인다.
- 정말! 죽을 뻔했잖아!
잠시 후회복한 요정이 날개를 파닥여 연기를 떨쳐냈다.
그제야 나는 요정의 생김새를 관찰할 수 있었다.
신비로운 외양이었다.
머리는 기다란 파란색. 날개는 녹색 기운을 반짝였고, 크기는 내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겹친 것만했다.
그녀가 시선을 들어 올려 제피르 를 바라봤다.
- 우리가 있다는 걸 어떻게 눈치 챈 거야? 하이엘프님께서 직접 걸 어주신 은신이었는데 .
"그 엘븐 가디언이 직접 와 관찰 까지 한 것이 한지훈이었다. 떠나가며 요정을 붙여놓을 거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다섯이나 붙여 놓을 줄은 몰랐지만."
- 고작 추측으로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거야?
"엘프 년들이 하는 꼬라지가 항상 그렇지. 온갖 고귀한 척은 다 하면서 다른 이의 운명이나 엿보는 관음증 환자 년들."
- 우리 엘프님 욕하지 마!
제피르의 언동을 보건데, 나름대 로 엘프와 엮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제피르가 말했다.
"내 첫 스승이 엘프 마법사였다."
"엘프 마법사… 혹시 엘프의 숲에 찾아가신 적이 있으셨던 겁니까?"
엘프를 보기 위해서는 중앙대륙 엘프의 숲으로 가야한다. 다른 곳에서는 엘프를 보기가 극히 힘들다.
내 물음에 제피르가 부정했다.
"아니. 의외로 엘프 중 적지 않은 수가 인간의 영역에 숨어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그래. 지들 딴에는 개입이 아닌, 정보수집과 대륙정세 파악이라 여기는 것 같다만."
엘프. 중앙대륙 엘프의 숲에만 처박혀 있는 숲 구석 여포인 줄 알 았는데 . 알고 보니 알게 모르게 인간의 영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개체 가 많은 듯했다.
호기심이 인 나는 그에게 물어봤다.
"어떻게 해서 엘프와 만나게 되 었던 겁니까?"
"지들이 먼저 찾아오더군. 내가 대마법사가 될 운명이라니 개소리 를 지껄이며 말이다. 뭐, 덕분에 마법을 배울 수 있었지만. 그리 좋은 스승은 아니었지."
"첫 스승이라면 굉장히 오래전 일이군요."
"내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 으니 . 대충 백오십 년 전 일이군."
나는 놀란 눈으로 제피르를 바라 봤다.
겉보기에는 기껏해야 중년에 불과했는데 . 그의 나이는 내 예상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저 얼굴로 백오십, 아니. 백오십 년 전에 스무 살이었으니 백칠십에 달하는 나이를 가졌다 한다.
엄청난 동안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노화를 억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덕분일 터다.
"그나저나, 엘프 년들이 한지훈 자네를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은데. 붙인 요정의 수가 무려 다섯이라니. 나조차 한때 두 명의 요정밖에 안 붙었었는데 말이다."
내 옆을 맴돌던 요정들의 수는 정확히 다섯이었다.
제피르가 테이블 위 요정을 쏘아 보며 물었다.
"너희 엘프와 요정들이 한지훈백인장을 관찰하는 이유가 뭐지?"
요정은 잠시 그 작은 입을 달싹 이며 주저했다. 순순히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모습.
그에 제피르는 손을 연초에 가져 다 댔다.
- 말할게! 말할 테니까 그 담배는 치워!
연초 연기가 정말 무서운 듯하다.
그녀가 입을 열어 설명했다.
- 하이엘프이신 니디아 님이 부탁했어. 한지훈, 네가 어떤 인물인지 바로 옆에서 관찰해달라고.
"내가 어떤 인물이냐니. 성격이라 도 알아내려는 건가?"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요정이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 색은 머리색과 똑같은 푸른색이었다.
- 지훈. 네가 세상을 멸망시킬 인물인지, 아니면 구원할 인물인지. 우리가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