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니디아. 너희 엘프 여왕이 나를 주시하는 이유가 뭐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엘프. 본래 그들은 중앙대륙 엘프의 숲 외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영역, 그리고 세계수만을 보호할 뿐.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에서도 그 들이 활동했던 것은 플레이 중후반기, 내가 대륙의 절반을 정복했을 때였다.
헌데 아직 시나리오의 초창기에 불과한 지금. 엘프가 나를 주시한다 며 엘븐 가디언까지 보냈다.
명백한 간섭.
내 질문에 니디아가 대답했다.
"그건 그쪽이 이름 없는 별의 운명을 타고났다 예상되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이름 없는 별이라. 아까도 물었 지만, 그건 또 뭐고?"
"말 그대로 하늘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거지요. 이름 없는 별이라는 별자리의 운명을. 뭐, 저도 정확한 의미는 몰라요. 저희 여왕님만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계시죠."
그녀가 싱글싱글 웃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저딴 표정이라니. 확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물론 그러지 못한다. 내가 순식간에 처 발릴 테니까.
하지만 직후. 그녀의 이어진 말에 나는 사고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희 여왕께선 전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전세계의 기억이라. 분명 내가 진행했던 게임을 말하는 것이겠지.
엘프 여왕은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 크라함처럼 말이다.
니디아를 노려봤다.
"너는?"
"네? 제가 뭘요?"
"너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냐 묻는 거다."
"에이. 설마요."
그녀가 손사래 쳤다.
"전세계의 기억은 정말 극소수, 전생에 고위의 격을 지녔던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게 정말인가?"
"당연하죠! 저 같은 조연이 어떻게 세계의 기억을 가지고 있겠어 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시나리오에서도 그녀는 조금 강한 네임드 유닛 그이상의 비중은 없었으니 . 기억을 가지고 있진 않을 거다.
그녀가 실실 웃었다.
"하여튼. 그쪽이 싸우는 걸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한지훈 씨는 이름 없는 별의 운명을 타고난 게 확실해요."
니디아가 내게 접근한 것은 나를 관찰하고, 판단하기 위함인 듯했다.
내가 그이름 없는 별이란 운명을 가진 인물인지 아닌지를.
"자. 받으세요."
그녀가 품속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었다.
[세계수의 수액(극도로 희석됨)]
이 귀한 걸 또 주다니. 정말 손 이 헤픈 녀석이다.
"고작 반나절 동안이었지만, 제 정체를 속였으니 . 이건 그 사과예 요."
"이런 보상이라면 얼마든지 속아 주는데 ."
"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얼굴 표정 보면 엄청 화난 거 다 티 나는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의 정령을 이용한 은신술인 듯했다.
"한지훈 씨. 떠나기 전에 마지막 으로 부탁 하나 할게요."
그녀의 몸이 점차 공간에 동화되 어간다. 나는 몸의 윤곽만을 남기고 사라져가는 녀석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번 세상은. 멸망시키지 말아주 세요."
그녀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 생각해보지."
내 목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울린다.
- 띠링!
[서브 퀘스트 - '굴라덴 혹마법 진 파괴'를 '완벽하게' 완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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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를 클리어했다.
* * *
공국군 군단장, 페라다 루고 후 작. 그는 흔들거리는 군단장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도시 굴라덴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도시의 위 밤하늘에는 커다란 혹마법진이 떠올라 흉흉한 기운을 일렁이고 있다.
후작이 입을 열었다.
"사령술사의 마법진. 아직 발현은 안 되었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워낙 대규모 마법인지라 발현에 시간이 많이 걸 리는 것 같습니다."
"… 불안하군."
페라다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법진을 주시한다. 어서 마법이 발현되기를 바라면서.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허공에 떠올라 있던 검은색 마법 진. 그것이 격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바라던 방향으로의 변화는 아니었다.
"마법진이 붕괴합니다!"
"뭐?!"
동승했던 참모가 보고하고, 후작 은 경악했다.
마법진이 붕괴해갔다. 그것이 잘 게 잘게 부서져, 점차 흐릿해간다.
전형적인 마법진의 파훼 모습. 그는 안타까워 한탄했다.
"결국 마법진이 파괴된 것인가!"
밤중에 도시로 숨어들었던 정체 불명의 쥐새끼. 놈이 결국 마법진이 숨겨져 있는 저택 깊숙이 침입해 파괴한 것이리라.
으득. 그가 이를 갈았다.
"빌어 처먹을 제국 놈들…!"
페라다 후작의 얼굴에 분노가 일렁였다.
그는 제국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손실을 입히기 위해 흑마법사와 동맹을 맺었다. 마법진을 축성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3만의 공국군을 방패막이로 희생가기까지했다.
헌데 보란 듯이 그 수작질을 쳐 부수다니.
찰나의 분노, 그리고 허탈함.
페라다 루고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음 기회는 있다."
비록 이번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제국 놈들은 계속해 공국령 깊숙이 진격해올 것이고, 그렇다면 언젠가 공국과 흑마법사의 연합은 놈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리 생각하며 마차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을 때였다.
"글쎄. 다음 기회가 있을까요?"
"뭐?!"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렸다. 가녀 린 여성의 음성이었다.
페라다가, 그리고 동승했던 참모 들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직후, 콰르르르르릉!
폭음이 터져 나왔다. 공기가 찢 어발겨짐과 동시 무수한 수의 얼음 송곳이 날아와 마차를 헤집었다.
"끄아아아아!"
"아악! 아아악!"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참모들이 순식간에 넝마쪼가리처럼 찢겨나갔다. 페라다 후작 또한 팔뚝과 옆구리가 관통당했다.
쿠웅! 마차를 끌던 말이 죽어 쓰 러졌다. 마차 또한 전복되었다. 페 라다는 마차 내부에서 구르고 튕겨 졌다.
"커헉…!"
강렬한 고통이 그의 전신을 유린했다. 잠시 후, 그는 간신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갈기갈기 찢겨진 참 모들의 시체. 그들이 흘린 피로 마차 안은 온통 피 칠갑이 되어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뒷말을 삼켰다. 전복되어 열린 문짝 너머,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훤히 보였기 때문에.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콰르르르릉!
얼음송곳의 세례가 연속해 퍼부 어졌다. 그럴 때마다 참모들이 탄 마차가, 그들을 호위하는 병력이 단숨에 쓸려나가고 부서져갔다.
"아악! 아아악!"
"정령사다! 엘프 정령사야!"
"엘프가 왜 이곳에!"
"살려줘!"
얼음송곳이 섬뜩한 흰색 궤적무 리를 일으켰다. 피 안개가 터져 나 왔다.
그리고 그 너머, 보였다.
"… 엘프."
초록 머리, 초록색 눈동자를 가 진 여인.
그녀의 풍성한 머리숱 사이 삐져 나온 귀는 기다랬다. 분명한 엘프의 모습.
"크윽…!"
페라다는 신음하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엘프가 이쪽을 습격하는 지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움직여야했다.
저 엘프는 보아하니 자신이 살아 남은 걸 모르는 상황. 녀석이 다른 병사들을 처치하는 와중 몰래 빠져나간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으리라.
허나 그의 희망은 금세 박살났다.
"어딜 가세요?"
페라다의 등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주위에는 소름끼치는 적 막이 자리해 있다. 방금 사방을 울리던 굉음과 고함, 비명은 헛것에 불과했다는 듯이.
하지만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지금 후작이 밟고 있는 땅은 핏물로 젖어 질척해져 있다.
"… 그 잠깐 동안, 우리 군단 참 모단과 호위 병력까지 모조리 처치 했다는 건가. 엄청나게 강하군."
후작은 눈동자를 굴려 엘프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의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는 정확히 후작을 향하고 있다.
그녀, 니디아가 싱긋 웃었다.
"도망치면 안 되죠. 양심도 없으 셔라."
"엘프. 어째서 우릴 노린 것이 냐."
후작이 잠시 비틀거리더니, 쓰러진 마차에 기대어 섰다. 그가 절망 어린 눈으로 엘프 여인을 노려본다.
"우리 공국은! 엘프의 영역을 침 범하지 않았다. 엘프의 숲에 접근하지 않았단 말이다. 헌데, 어째서 우리를…."
"어머. 별꼴이네요. 우리 엘프가 무슨 숲에만 처박혀 있는 줄 알아 요? 뭐. 거의 사실이지만."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 다시금 무수히 많은 수의 얼음송곳이 떠오른다.
페라다 루고 후작이 이를 악물었다.
"엘프는 숲 밖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들었다."
"음…."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건가."
후작의 말에 엘프는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싱 긋 웃으며 말했다.
"쓰레기의 친구는 똑같은 쓰레기 잖아요."
"?.?뭐?"
"그쪽이 손잡은 흑마법사 세력 불라바아. 걔들은 나중에 세계수를 공격하거든요. 그런 나쁜 녀석들과 손을 잡다니, 괘씸하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개소리…."
"아. 설명하기 귀찮아요. 그냥 죽 으세요."
니디아가 손가락을 내리그었다.
콰드드드드드득!
얼음송곳세례가 쏟아져 페라다 후작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는 순식간에 육편무더기로 화해 바닥 으로 무너져 내린다.
철퍽.
붉은 핏물이 지면을 적셨다.
"뒷처리 부탁해, 노움."
짝짝. 그녀가 손바닥을 두드렸다. 그러자 마차와 시체들이 흙바닥 아래로 파묻히듯 끌려 내려갔다. 대지 의 정령 노움의 힘이었다.
"아, 맞다! 관측자를 붙여야겠지?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요정들이 날아와 그녀의 손가락 위에 머물렀다.
니디아는 요정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제국의 병사들은 똑똑히 보았다.
공국의 중부 도시 굴라덴. 그 십 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도시 상공에 떠올라있는 커다란 마법진.
그것이 파훼되어 붕괴해가고 있다. 마법진이 바스러져 흩어지고, 일렁였던 불길한 기운이 사라져갔다.
"흑마법사의 마법진이 붕괴했다!"
"마법진의 파훼를 확인. 각 천인대! 출격 준비해!"
"신호기 올려. 기수의 지휘에 맞 춰서 전진한다."
"3군단! 진격 준비!"
미리 전파된 사항에 맞춰, 각 군단의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제 무장을 챙겨들었다. 기사들은 갑옷을 갖춰 입고 말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마법사들은 체 내 마나량을 점검했다.
그리고 그분주한 군단의 본영 속. 군단장 오스카는 감격한 눈으로 도시 방향을 바라봤다.
"한지훈…!"
그의 눈이 천공 위에 떠오른 마법진으로 향한다. 마법진은 완전히 부서져, 흩어져 내리고 있다.
"해냈구나. 믿고 있었다."
오스카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 은 격렬했다.
감탄, 대견함, 기쁨.
그가 지휘봉을 쥐어들고, 도시 방향을 겨누며 외친다.
"군단장 오스카다! 북부 제 3군단 전군에 전파한다!"
그의 목소리는 웅혼했다.
군단장 오스카. 북부 제 3군단의 최고 지휘관이자. 현장의 기사와 마법사들까지 지휘하는 이.
그가 명령했다.
"흑마법사의 마법이 완전히 파훼 된 것을 확인, 굴라덴을 향해 진격 한다! 전진깃발을 올려라!"
"명령을 받듭니다!"
부우우우우-- -!
뿔피리소리가 길게 울렸다. 전진을 뜻하는 붉은색 깃발이 우수수 올라온다.
오스카가 지휘하는 북부 제 3군단. 그리고 볼로냐 전투기사단과, 라브리에 전투마법단까지.
아니. 어디 그들뿐인가.
도시의 동쪽과 서쪽에서 각각 대기 중이었던 4군단과 5군단 또한 3군단의 진군에 호응해 붉은색 신호 기를 들어올렸다.
무려 6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
그들이 도시 굴라덴을 향해 진격 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