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다음날 아침. 군단은 전투를 준비했다.
내가 포함되어 있는 북부 제 3군단이 정면을 맡았다. 그리고 4군단 이 도시의 좌측, 5군단이 우측.
세 개의 군단. 6만의 군세가 도시를 삼면으로 포위했다.
"곧 전투다."
그레드 천인장이 그리 읊조렸다.
지금 우리는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국 병사들이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좌측이 두텁고, 우측이 얇다.
사선대형을 만들기 위한 대형. 곧 전진하며 좌익은 빠르게 앞설 것이고, 중앙과 우익은 천천히 전진 하며 자연스럽게 사선대형이 만들어 질 것이다.
회전문 효과를 노린 사선대형의 준비.
그레드의 말이 이어진다.
"군단의 진형은 보다시피 사선대 형이다. 주공은 우리 파트라헴 천인대가 소속되어있는 좌익."
파트라헴 천인대는 좌익의 최선 두에 자리해있다. 빠르게 기동하며 적들을 감싸는 주공 역할.
나는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 도시가 보인다. 성벽 따 위 없이 마구잡이로 팽창한 도시 굴라덴. 우리가 점령해야 할 도시다.
부우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린다. 시선을 돌려 군단 신호기를 바라봤다.
신호기의 색은 파란색. 경계 및 대기상태. 나는 전투를 준비해 숨을 고른다.
후욱. 조금씩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한지훈. 우리 제국군은 도합 6만에 달하는 대병력이다. 반면 공국 은 모조리 모아봐야 3만에 불과하 지. 게다가 우리에게는 마법사와 기사 전력까지 풍부하다."
그레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너무나 압도적인 전력 차다. 이전투에서 제국군이 패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긴장 풀고. 신호가 떨어지면 앞 으로 가지."
그레드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다른 백인대 들을 확인하러 가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휘하 병사들을 확인했다.
가진 병장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내부하들의 모습. 녀석들은 하나같 이 베테랑들이다. 이번 전투에서 그리고전하지 않겠지.
시선을 돌려, 아군 대열의 최후 방을 바라봤다. 그곳에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제피르. 베르겐.'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단장 제피르, 그리고 볼로냐 기사단장 베르 겐. 그 둘은 일단 적의 모습이 확인된다면 가진 힘을 보여 적진을 유린할 것이다.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압도적인 상황.
지지는 않을 것이다.
부우우우우--.
뿔피리가 길게 울렸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군단 신호기를 바라봤다.
깃발의 색은 붉은색. 전진을 알 리는 신호다.
나는 크게 외쳤다.
"부대! 약진!"
1번 백인대가 앞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부대 들 또한, 군단 신호기의 지시에 따 라 진형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제국군 6만이 도시를 점차 조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 오는군. 제국 놈들."
공국 방어군 총사령관 페라다 루 고 후작.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앞을 바라봤다.
그는 도시 중앙에 있는 내성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크고 작은 지도들이 널려있고,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수정구가 놓여있다.
그가 주위 군관들에게 물었다.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제국 놈 들의 수는?"
"세 개 군단. 약 6만 정도로 추 정됩니다."
"6만… 6만이라."
페라다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징그럽게 많은 수군. 이런 성벽 도 없는 도시를 끼고는 절대 막을 수 없겠지."
그들이 있는 도시 굴라덴은 그리 방어력이 높은 도시가 아니었다. 워낙 무분별하게 형성된 도시이니만 큼 성벽은 없었으며, 주위 지형 또한 침공에 유리한 평야지대.
방어에 이점이 그리 많지 않으 며, 더해 병력까지 압도적 열세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부관. 제국 놈들의 배치가 어떻게 되지?"
"도시의 남쪽에 약 1만 7천, 동쪽에 2만 3천, 서쪽에 2만 1천입니다. 사령관 각하."
"삼면 포위라. 역시 답이 없군."
페라다 후작이 지도를 살피며 읊 조린다.
"흑마법사. 대법을 위한 시간을 벌어달라고 했지."
그의 시선이 방 한켠에서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들에게로 향한다.
페라다가 물었다.
"자네들의 요구대로 하지.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크흐흐! 감사합니다, 사령관 각하. 반드시 사명을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흑마법사들이 질척한 웃음을 지 으며 대답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조금씩 붉은색 기운이 일렁이고 있다.
"저희들은 대법을 준비하기 위해 슬슬 움직이겠습니다."
"… 그래. 가보게."
암흑색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들 이하나둘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이 막 방 밖으로 빠져나갔을 때였다.
"군단장 각하. 정말 흑마법사를 전쟁에 동원하실 생각입니까?!"
누군가가 페라다에게 말을 걸었다. 페라다 후작은 시선을 돌려 목소리를 낸 이를 바라봤다.
"레커."
그는 참모중 하나인 레커였다.
레커 다이니. 군단의 상급 참모 관이자, 오랫동안 페라다의 곁을 지켜오던 이.
그가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를 전쟁에 끼어들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시의 주민들을 희생시키다니. 너무 잔혹한 일입 니다. 군단장 각하! 지금이라도 늦 지 않았습니다. 흑마법사들을 물려 주십시오."
그의 눈빛에는 결연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흑마법사. 악독한 놈들이다. 헌데 그들의 악독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려 십 수만에 달하는 공국의 백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전쟁을 하려하다니.
하지만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흑마법사는 물리지 않는다."
"… 군단장 각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레커."
페라다 후작은 눈빛을 진중하게 가라앉혔다.
그는 군인이자 공국의 고위 장성 이었으나, 그이전에 한 명의 인간 이었다. 십만이 넘는 인명을 오직 전쟁의 승리에 갈아 넣는 것을 달 가워할 이는 아니다.
허나 말 그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흑마법사를 개입시킨 것은 상부 의의향이다."
"상부라 하시면."
"공작각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 이란 말이다."
페라다 루고 후작에 말에, 참모 관 레커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공작은 이 나라 요한바르첸 공국 의 주인. 그에게 작위를 하사받은 페라다도, 레커도 공작의 명령에는 거스를 수 없었다.
"레커. 우리는 이전쟁을 이겨야 하네. 아니, 이기는 건 힘들지 몰라도적어도 제국을 몰아내야 한단 말이네."
이미 공국은 패전의 기색이 다가오고 있다.
침공군이었던 공국 1군단은 거의 완벽하게 전멸당했으며, 공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축성했던 요새 포트 갈레이는 고작 하루 만에 점령당했다. 더해 공국의 중부 도시인 굴라 덴조차 6만이라는, 압도적인 수의 제국군에게 삼면 포위된 상황.
공국은 패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흑마법사의 조력이 필요 불 가결. 놈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우리는 제국을 몰아내야 한다."
레커는 침묵했다. 페라다 후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커. 불경한 생각은 하지 말고 임무에 집중하게. 지금은 당장 눈앞 의 제국군을 물리치는 게 급하지 않나. 양심을 챙기는 건 나중의 일 일세."
"… 알겠습니다. 군단장 각하."
레커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고 는, 거친 발걸음을 옮겨 지휘실 밖 으로 나섰다.
그는 기다란 복도를 걸으며 이를 갈았다.
"공국은 미쳤어."
흑마법사를 끌어들이고, 민간인들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전쟁을 벌이다니.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다.
레커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 봤다. 높은 내성의 창밖 시야 속, 점차 도시로 진군해오는 제국군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인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흑마법사를 막아야 한다. 설사 내가 조국의 배신자가 된다 한들."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그리 뇌까렸다.
"진형을 유지해라!"
"발 맞춰 걸어!"
"방패! 방패 낮추지 마! 언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
3군단이 앞으로 향한다. 그 수가 약 1만 7천. 그리고 그 왼쪽 최선 두에는 내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한 얼굴로 보폭을 맞춰 걷는 병사들. 그들은 비장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병사들이 풀을 즈려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씩 도시의 모습이 커다랗게 보인다.
"3번 백인대! 앞으로 돌출되었 다! 속도 줄여!"
"기병대 서행! 서행해! 앞으로 가지마!"
"좌익은 속도를 좀 더 빠르게! 중앙과 우익은 속도를 늦춰라! 사 선대형을 만들어!"
천인장 계급을 가진 고위 장교들 이 진형을 유지하기 위해 말을 타고 분주히 돌아다녔다. 그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진형을 다듬는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옆을 바라 봤다.
"허억, 헉! 헉!"
긴장한 것일까. 부관 엘락이 크 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거친 숨 소리를 내고 있었다.
피식.
나는 녀석의 등을 거칠게 때렸다.
"윽!"
갑작스레 등짝을 얻어맞은 엘락 이 화들짝 놀랐다. 녀석이 놀란 눈 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나는 엘락에게 나직이 말했다.
"긴장 풀어. 인마."
"… 그렇게 하고는 싶습니다만."
그가 주위를 넓게 둘러봤다.
무수히 많은 수의 병사들이 발맞 춰 방패를 들고, 창을 앞으로 향한 채 조금씩 도시에 접근하고 있는 모습.
녀석은 주위 경관에 압도된 듯하다.
"이렇게 큰 전투는 처음 겪어봐 서."
"뭐. 그러겠지."
엘락은 실전을 한번밖에 겪어보 지 않았다.
갈레이 요새 야습. 물론 그때도 격렬한 전투를 하긴 했었지만. 녀석 에게 있어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전투는 처음이다.
반면 나는 이미 공성전 당시 군단규모의 전투를 겪어봤다. 그때와 비슷했기에 그리 큰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바짝 긴장했잖아. 긴장하는 건 전투에 들어가고 나서 도 충분해. 벌써부터 힘 빼지 마 라."
과한 긴장은 체력을 소모한다. 벌써부터 긴장한다면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진이 빠져, 정작 전투 가 일어나면 제대로 된 실력을 발 휘할 수 없게 될 터.
지금은 적당히 몸을 달구기만 해 야 한다.
나는 녀석의 긴장을 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 군이 훨씬 우세해.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 그렇습니까?"
"그래. 6만대 3만이야. 놈들이 아무리 도시를 끼고 농성한다 한들.
그깟 성벽조차 없는 도시. 금세 함락될 거다."
6만대 3만이다. 게다가 공국의 도시는 제대로 된 성벽조차 없는 상황. 놈들이 도시에서 항전한다 한 들 그리 큰 방어효과는 없을 터.
우리는 그저 우르르 밀고 들어가 기만 하면 된다.
시선을 앞에 두었다.
"좋아. 이제 공국 놈들이 어떻게 나오려나."
지금 공국 놈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다.
병력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우리 군을 영격하거나, 혹은 도시 안에 꼭꼭 숨어서 항전하거나.
둘 다 공국에게 그리 좋지 않은 그림이다.
"영격하려 한들 회전에서 압도적 으로 패배할 것이고, 도시에 숨어있 다 한들 마법사에게 갈려나갈 텐 데."
공국에게는 마법전력이 없다. 만약 우리 라브리에 마법단이 폭렬폭 풍 마법을 난사한다면, 쉴 새 없이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만약 놈들에게 흑마법사가 있다 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흑마법사놈들은 화력보다는 저주나 사령 등 음침한 방법에 특화된 녀석들이다. 이런 대규모 회전에서 백마법사같 은 위력을 발하기는 힘들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적이다!"
어느 병사가 소리쳤다. 그에 정면을 주시했다.
피식. 내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우리를 영격하려 하는 것 같은 데."
도시에서 공국군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놈들은 건물 사이사이를 통과해 도시 밖으로 나오더니, 진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쪽을 영격하려는 것이겠지.
"파트라헴 1번 백인대! 전투 준비!"
나는 외치며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르릉.
시퍼런 검날이 뽑히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공국 놈들이 진형을 다지고 있다! 방패 올려! 창 앞으로 겨눠!"
휘하 병사들이 내지시에 맞추기 시작했다.
방패를 든 검병이 앞으로 나서고, 창병이 그 뒤를 받쳤다. 자연스 레 방진이 형성되었다.
병사들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공국 병사들이 대형을 이루고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진형 유지한 채, 약진!"
계속해 걸어 앞으로 갔다. 놈들 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진다.
마침내 공국 병력과의 거리가 약 3백 보 정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와아아아아아!"
공국 놈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전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