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울창한 숲속.
어둑한 밤의 적막함 사이, 한 여성이 자리에서 있다.
그녀의 외모는 신비로웠다.
달빛을 반사해 은빛으로 반짝이는 투명한 피부.
허리까지 오는 기다란 호수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 머리카락을 뚫고 튀어 나온, 엘프의 상징인 뾰족한 귀.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린다.
"별자리가 격동하고 있어요."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그녀는 분명 또렷하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시야를 가리는 눈꺼풀은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가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여왕님."
부스럭.
수풀을 뚫고 누군가가 다가왔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지닌 여성 엘프였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여왕이 불린 이의 앞으로 다가오고는, 무릎을 꿇 어 부복했다.
"밤공기가 찹니다. 그리고 오늘은 만월. 이만 들어가서 숙면을 취하시 지요."
"타냐."
여왕이라 불린 여성이 고개를 내려 타냐를 바라봤다.
타냐. 여왕 엘리스의 곁을 보좌 하는 하이엘프.
그녀는 엘리스가 이만 잠자리에 들기를 청해왔다.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늘은 만월. 광기에 침 식당하지 않으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해요."
"그러니 이만 들어가시지요. 제가 모시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려 밤하늘을 바라봤다.
엘프 여왕 엘리스의 말이 이어진다.
"별자리가 변화하고 있어요."
"별자리라 하시면."
"시나리오 말이에요."
엘리스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별의 배치가, 그리고 운명이 격 동하고 있어요. 분명 어젯밤만 해도 이전과 다를 바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엘리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가장 먼저 가리킨 것은 커다랗게 떠올라있는 만월.
"광기의 힘이 강해졌고,"
그녀의 손가락이 재차 움직여, 밤하늘에 흩뿌려져 있는 별들 중 유독 반짝이는 별을 가리켰다.
"이름 없는 별의 위치가 변했어 요."
타냐는 그저 침묵했다.
엘리스가 보는 것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별자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밤의 암흑색 장막 너머 자리해있는 운명, 그리고 세계의 각 본을 살피고 있었으니 .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린다.
"무언가가 이 세상의 흐름에 개 입하고 있어요."
엘리스가 고개를 내려 타냐를 바라봤다.
타냐는 묻는다.
"시나리오가 변화했다면. 그건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나쁜 일입니까?"
"그건 몰라요. 다만 변화를 감지 했을 뿐이지요."
엘리스는 싱긋 미소 지었다.
자애롭고도 온화한 미소.
그녀의 웃는 얼굴이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하지만 운명이… 시나리오가 변화하고 있는 건 확실해요. 제가 가 진 전생의 기억과 다르게 시나리오 가 이어진다는 거죠."
모든 엘프들의 여왕 엘리스.
그녀는 밤하늘을 읽어 운명을 읽 는다. 그런 그녀가 세계의 각본, 시나리오가 변화하고 있음을 예지했다.
"타냐. 우리가 개입한다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요?"
"개입이라 하시면…."
"변화는 대륙 남부, 인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요."
"여왕님. 저희 엘프는 숲 밖, 인간의 영역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개입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잖아요?"
"아니요. 엘프의 사명은 어디까지 나 세계수의 수호. 인간의 영역에 개입하는 것은 사명에 위배됩니다. 여왕님."
"사명이 아니라 방치예요. 타냐, 미래를 바꿔야 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이 엘프의 숲에서 웅크 리고만 있는다면 세계가 멸망할 거예요. 전의 세계가 그러했듯이."
그녀가 재차 웃어보였다.
"엘프와 요정들을 남부에 보내세 요. 운명을 비틀 수 있는 인물. '이름 없는 별'의 주인을 찾아야 해 요."
꿈을 꿨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익숙한 작은 방의 모습.
주위를 둘러봤다.
꾸깃꾸깃 구겨진 성적표, 방치되어 먼지가 쌓여가는 전공서적, 어두운 방 한가운데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모니터.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 현실 속 내 방의 모습이다.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내 바로 앞 책상 위에는 모니터 와 키보드 마우스가 놓여있다.
모니터 안에는 익숙한 화면이 출력되고 있었다.
[블랙 오케스트라]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게임.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들어올려 마우스를 쥐어본다.
세이브파일을 로드.
게임이 시작되었다.
[크라함]
[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전쟁 요청]
["위대하신 제국의 황제, 한지훈 폐하. 엘프들이 대전에 개입했습니다. 모조리 죽여 없애버려야 합니다. 엘프의 숲을 불태워 제국의 강력함을 보여주십시오!"]
[수락/거절]
수락.
침공군을 편재한다.
군단 열 개와 다수의 기사단, 그리고 수백의 전투마법사와, 흑마법사전력까지.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 이중앙대륙 엘프의 숲으로 향한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크라함]
[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숲을 소멸시켜라! 엘프를 산채 로 불태워 죽여라!"]
흑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한다.
허공에 검은색 마법진이 떠오르고, 중첩되어 , 대마법을 구성했다.
번쩍이는 이팩트.
검은색 불길이 일어나 숲을 태워 갔다.
나무가 불타고, 대지가 불길에 휩싸여 소멸해갔다.
공기가 썩어 문드러진다.
내 군단과 마법사들이 엘프의 영역을 침공했다.
[타냐]
[엘븐 가디언]
["엘프의 숲을, 세계수를 사수하 라! 세계수를 빼앗기면 이 세계는 끝이다!"]
그러자 하나둘 등장하는 엘프의 전력들.
엘프들이 숲을 사수하기 위해 내 병력과 전투한다.
궁수들이 활을 쏘아대고, 요정들 이 이곳저곳을 누비며 척후활동을 해댔다.
엘프 마법사와 정령사들이 등장 해 아군 병력을 해치워간다.
엘프는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는 적었고, 내 병력은 막대했다.
엘프의 병력을 소멸시키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다수의 회전 끝에, 그들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하이엘프들을 다수 사로잡을 수 있었다.
[타냐]
[엘븐 가디언]
["세계수를… 지켜야."]
[처형]
하이엘프들을 죽였다.
놈들의 구심점이 점차 사라지고 지휘권이 붕괴되어간다.
이후 전투가 수월해졌다.
제국군과 흑마법사의 혼성 부대 가 계속해 엘프의 숲을 불태우며 전진해갔고, 내 군대는 마침내 엘프 의 숲 중앙까지 진출해 어떤 영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세계수.
숲 한가운데에 오연히 자리해있 는, 그야말로 하늘을 떠받치듯 거대한 나무.
크라함이 요청했다.
[크라함]
[혹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황제 폐하. 세계수를 오염시킨 다면 아군 흑마법사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세계수를 타락시키는 것을 허락해 주시 겠습니까?"]
[수락/거절]
거절할 이유가 없다.
[수락]
천여 명에 달하는 흑마법사들이 세계수를 빙 둘러쌌다.
그들이 스태프를 치켜들고 합동 마법을 발현한다.
어두운 기운이 일렁이고 사악한 기운이 세계수를 향해 흘러들어갔다.
[크라함]
[혹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크하하하하! 마침내! 마침내! 세계수가 우리 손에!"]
크라함이 광소했다.
점차 암흑색으로 물들어가는 세계수.
엘프의 숲이 빛을 잃어간다.
푸르른 대지가 점차 회색빛으로 물들고, 오염되어 생기를 잃어갔다.
그러자 나타나는 엘프의 네임드 유닛.
[엘리스]
[엘프 여왕]
[휴전 요청]
["한지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 어요. 병력을 물려주세요. 세계수를 오염시킨다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 이 일어날 거예요."]
[수락/거절]
거절했다.
엘프가 전쟁에 개입한 이상 나는 병력을 물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한들 언젠가 쓸어버리려 했었다. 엘프는 대륙을 정복하는데 장애물이었으니까.
나는 엘프의 병력을 쓸어버리고 세계수를 타락시켰다.
세계수가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든다.
[엘리스]
[엘프 여왕]
["아아… 그대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요. 모를 수밖에요."]
드르르륵.
마우스의 휠을 굴려 화면을 확대했다.
군단 단위의 군세가 보이는 시점 이 점차 축소되어 지면으로 다가간다.
그러자 보였다.
[엘리스]
[엘프 여왕]
["당신이 이 세상을 멸망시킨 거예요. 한지훈."]
검은색으로 물든 세계수를 배경 으로 오연히 서 있는 엘프 여성.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눈을 떴다.
"오. 일어났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허술한 목제 천장, 그리고 짧은 금 발 머리였다.
나는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바라 봤다.
치유소인 것일까. 무수히 많은 침상이 있고, 그들은 모두 부상당한 것인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끄응."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욱씬 한 통각이 오른팔에서 느껴 졌다.
오른팔을 살폈다.
전투 중 과한 움직임을 보여 완전히 망가졌던 내 팔은, 지금 두터 운 붕대에 돌돌 말려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통증이 있었지만 움직이긴 한다.
"잘 잤느냐 한지훈. 하루 종일 자고 있더구나."
짧은 금발 머리를 지닌 남장 소녀, 마이사 슈베츠가 내 침상 옆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더 니 나를 부축했다.
"내가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고?"
"그렇다. 다행히 포션을 처방받아 서 이 정도였지. 만약 포션을 받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오른팔을 잘라 내야 했을 거라 하더구나."
"뭐. 그렇겠지."
확실히 심각한 부상이긴했다.
오른팔의 온 혈관이 터져나갔고, 인대와 근육, 신경마저 손상되었으니 .
정말 포션이 없었다면 불구가 되 었을 부상.
그만큼 내 한계를 뛰어넘는 검격 의 반동은 치명적이었다.
"마이.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되었 지?"
나는 몸을 덮은 이불을 걷어내며 물었다.
야습을 당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았다만.
그녀가 내 질문에 대답한다.
"요새 안으로 쳐들어왔던 공국군 은 모조리 소탕되었다 한다. 지금은 뒤처리 작업이 한창이야."
"그래…그런데 이 냄새는 뭐지? 뭔가 타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마치 화재라도 일어난 것 같은 텁텁한 감각이 후각을 자극했다.
"시체를 태우고 있어."
"시체?"
"저길 봐."
그녀가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 킨다.
요새의 성벽 너머 어딘가에서 흑 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체를 태운다니. 전사자는 적 아군 가리지 않고 매장이 기본 아닌가?"
"물론 모조리 태우는 건 아니다. 다만, 적 중에 흑마법사와 암흑기사 가 있었지 않나."
"아.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혹마나에 오염된 존재-흑마법사 나 암흑기사들의 시체는 절대 그대로 매장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정의 기운인 흑마나 를 품고 있는 것들.
시신을 불태워 정화작업을 해야 만 비로소 뒤탈 없이 처리할 수 있다.
나는 멍하니 연기를 바라봤다.
"흑마법사라."
문득 방금 전 꾼 꿈이 떠올랐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쥐고 게임 블 랙 오케스트라를 하는 꿈.
꿈속에서는 여러 존재가 나왔었다.
내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흑마법사 크라함.
엘프의 네임드 유닛인 여왕 엘리 스.
타락한 세계수의 앞에서 울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엘리스."
"엘리스? 그건 누구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부스럭.
나는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와 섰다. 아직 후유증이 좀 있는 것일까.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문득 그녀가 물었다.
"그나저나 한지훈. 이번 전투 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무슨 짓이라니?"
"그대가 쓰러져 있었을 때 군단 장이 찾아왔었다."
군단장이라. 하긴.
내 덕분에 목숨을 구한 작자다. 내 상태를 확인하려 이곳으로 왔을 만도 하다.
"깨어나면 바로 자기를 찾아오라던데. 뭔가 줄게 있다고 말이야."
"군단장님의 호출이라."
피식 웃었다.
"보상을 줄 생각인가 본데."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후작. 후 작위에 이른 고위귀족이자, 이 군단 의 수장인 이다.
내가 목숨을 구했으니 , 나름대로 보상을 챙겨주려 하는 것일 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