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놈과 눈동자를 마주쳤다.
소름끼치는 붉은색 안광. 그곳에는 광기와 혼돈이 도사리고 있다.
녀석의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크라함은 이 세상이 게임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녀석의 대사를 보면 명확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놈은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더해 놈이 입에 담았던 '전생'이 라는 것.
'전 회차 시나리오를 알고 있는 건가.'
그것밖에는 추측할 수 없다.
놈은 모종의 방법으로 전생의,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진행했던 시나리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 언젠가 죽여주지 한지훈. 하지만 안심해라.
녀석이 붙잡았던 내 턱을 놓았다.
- 지금은 때가 아니니 말이야. 일시적으로 격을 뛰어넘은 건 대단 하지만. 아직 수확하기엔 이르군.
크라함이 고개 돌려 떠나가려 한다. 롬, 베이먼이라 불렸던 두 명의 암흑기사들과 함께, 내가 죽였던 한스를 짊어지고 말이다.
직감했다.
놈은 무언가 불길한 일을 꾸미고 있다. 그리고 그 음모에는 내 존재 까지 관여되어 있으리라.
엿 같은 기분이다.
어째서 놈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어떻게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아는 건지, 그리고 놈이 꾸미고 있는 음모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크라함.'
놈은 도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를 갈며 녀석을 노려보 고.
- 나중에 보지. 나의 예전 주인. 계속 성장해 다오. 여태까지 그러했 던 것처럼.
놈이 고개 돌려 떠나간다.
직후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었다. 몸을 짓 누르는 중력에 점차 시야가 희미해 져간다.
"크라…함."
나는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시야가 암전한다.
* * *
"한지훈 백인장!"
오스카가 비틀거리며 한지훈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한지훈의 모습을 살폈다.
한지훈의 꼴은 엉망이었다. 오른 팔은 꺼멓게 죽어있었고, 전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무수히 아로 새 겨져 있다.
더해 피를 많이 흘린 것일까. 그 의 혈색은 극도로 창백했다.
오스카는 고개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흑마법사.'
그가 바라보는 것은 여유 넘치는 발걸음으로 떠나가는 흑마법사와, 그를 호위하는 두 명의 암흑기사들의 뒷모습.
오스카가 다시금 한지훈을 바라 봤다.
"자네에겐 뭔가 비밀이 있군 그래. 한지훈 백인장."
방금 전 오스카는 보았었다.
한지훈과 저 흑마법사가 무어라 서로 대화하는 모습. 게다가 흑마법사는 어찌된 영문인지 한지훈을 죽 이지 않고 그대로 이탈하고 있다.
물론 저 흑마법사와 동료는 아닐 것이었다. 한지훈은 시종일관 흑마법사에게 적의를 보였었으니 .
하지만 어떻게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인가.
"… 생각은 나중에. 일단 치료가 급하다."
오스카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곧장 한지훈의 몸을 지혈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두 차례나 아니, 방금 전까지 포함하면 세 차례나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다. 아무리 신분이 변변찮은 평민이라 한들 이렇게 죽게 할 수는 없다.
찌이익.
군단장이 자신의 제복을 찢어 한지훈의 상처를 동여맸다. 부족한 피 가 머리로 갈 수 있도록 다리를 올리고, 뺨을 때려 제정신을 차리게했다.
그가 필사적으로 한지훈을 살리 려 할 때였다.
두두두두두.
다수의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오스카는 소음이 들려 온 곳을 바라보고, 곧 안도한 눈을했다.
"드디어 왔군. 베르겐."
베르겐이 이끄는 볼로냐 기사단 기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여분의 포션을 소지한 이가 반드시 있을 터.
피식. 오스카가 웃었다.
"어떻게 목숨은 건진 것 같군 그래. 한지훈."
제국 황궁의 알현실. 그곳에는 수많은 인영들이 자리해 있었다. 모두 제국의 고위직에 있는 귀족 대신들. 그들의 수는 무려 수십에 달했다.
수십에 달하는 고위 귀족들이 알현실에 모인 건 그리 드문 광경은 아니었다. 허나 지금이 막 여명이 터오는 이른 시간임을 생각하면, 꽤 흔치않은 광경이다.
그들의 모습은 꽤나 번잡했다.
"맙소사. 그게 정말이면…."
"이번 전쟁이 어떻게 될지…."
고위 대신들이 웅성거리며 무어 라 의견을 나눈다.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염려하는 모습. 그만큼 지금 그들이 모인 이유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
덜컹!
커다란 문이 열렸다. 그리고 붉은색 카펫을 밟으며 당당하게 등장 한 한 명의 청년.
"대신들은 모두 모였는가."
찬란한 황금색 머리칼, 그리고 번들거리는 금빛 눈동자. 등장한 이는 바로 제국의 황제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였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알현실의 가장 상석 황금옥좌에 앉았다. 그에 대신들이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가 라앉히고 침묵한다.
옥좌 위에 앉은 황제가 나직이, 하지만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국방성 장관."
"예. 폐하."
"내가 받았던 보고가 사실인가."
황제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 묵직한 위엄을 두르던 모습 과 다르게 극도로 냉정한 표정을 보이고 있는 황제. 그런 그의 눈빛에 국방성 장관이 고개를 움츠리며 고한다.
"그렇습니다. 폐하. 포트 갈레이에 주둔 중이던 북부 3군단에게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국방성 장관이 잠시 숨을 고르고, 강조하듯 이어 말했다.
"흑마법사가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으득. 아르테니아 황제가 이를 갈았다.
"염병할 공국새끼들. 미쳐버린 것 인가. 흑마법사라니!"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제국의 고위 대신들과 황제가 모인 이유가 이것이었다.
흑마법사의 개입.
몇 시간 전 북부 3군단에서 급보 가 들어왔다. 흑마법사와 암흑기사 가 포함된 공국군 병력이 요새를 야습했으며, 그에 막대한 피해를 입 었다는.
황제가 이어 묻는다.
"야습해온 놈들의 병력구성은?"
"흑마법사 삼십여 명, 암흑기사 약 오백, 그리고 공국 일반 병사 사천입니다."
"흑마법사 삼십에 암흑기사 오백 이라. 명백한 동맹이로군. 그 흑마법사가 전쟁에 개입하다니."
흑마법사는 대륙에서 배척받는 존재였다.
그들은 마나를 버리고 혹마나를 다루며, 광기와 죽음에 취한 이들. 흑마법사가 전쟁에 개입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 흑마법사의 공국과 제국의 전쟁에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전쟁 방침을 변경하겠다. 재무성 장관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신께 하명하시옵 소서. 폐하."
재무성 장관이라 불린 노인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황제가 각 장관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
"전쟁예산을 증액한다. 세배까진 허용한다."
"하오나 폐하, 여유 예산이…."
"부족한 예산은 황실 내탕고에서 충당하도록. 다음으로 국방성 장관."
"하명하십시오. 황제 폐하."
"진군속도를 올린다. 지금 전쟁계 획대로라면 공국 수도를 점령하고 전쟁이 끝나기까지 얼마나 걸리 지?"
"앞으로 약 한 달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이 주일 안에 끝낸다. 가능한 빠른 속도로 진격하도록. 필요하다 면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도록 하게. 추후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기사단과 군단들을 추려 내게 보고 하도록."
"명령을 받듭니다. 폐하."
황제는 공국 전쟁을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끝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예산을 증액 했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 를 늘렸다.
공국은 보다 강력한 제국군의 공세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다음, 마법성 장관."
"마법성 장관 우르겔. 황제 폐하 의 명을 기다립니다."
황제의 시선이 알현실 외곽에서있던 한 노인에게로 향했다.
마법성 장관 우르겔. 그 스스로 최상급에 이른 마법사이며, 황실에 속해 여러 마법사들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이.
황제가 그에게 묻는다.
"흑마법사가 전쟁에 개입했다. 마법성 장관 우르겔. 놈들을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사옵니다. 허나…."
"말해보게."
우르겔의 주저하는 듯한 행동에, 황제는 재촉했다.
그에 우르겔이 잠시 침묵하고는.
굳은 얼굴로 고했다.
"흑마법사를 효율적으로 제압하 기 위해서는… 도시를 소각하면 됩 니다. 진군하는 와중 마주친 모든 도시를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망발인가! 우르겔!"
"도시 소각이라니. 당신은 황제 폐하께 학살을 종용할 생각인가!"
자리에 있는 대신들이 기함했다. 그만큼 마법성 장관 우르겔이 한 말이 충격적이었기에.
도시를 파괴하라니? 그것도 진군 하는 와중 마주친 모든 도시를?
미친 짓이다.
"폐하! 도시 소각은 너무한 처사 이옵니다!"
"포트 갈레이부터 공국 수도까지, 두 개의 대도시가 자리해 있습니다!"
"적게 잡아 수만, 많다면 십만이 넘는 수의 민간 사망자가 나올 것 입니다."
"그들 또한 전쟁이 끝난다면 제국의 신민이 될 이들입니다! 부디 우르겔의 망언은 잊어 주시옵소 서!"
그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검과 마법이 지배하는 야만적인 세상이라 한들 저항할 수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하물며 그들 또한 언젠가 제국의 백성이 될 이들. 제국은 오랜 정복 전쟁으로 과한 탄압은 분열을 부른 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제국 황실은 전쟁 중 적의 병사들을 몰 살시킬지언정 민간인사상은 최대한 억제해 왔었다.
헌데 다름 아닌 마법성의 장관이 도시의 파괴를 황제에게 간언한 것 이다. 대신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 한 일.
그에 우르겔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도시 소각 이라니. 확실히 제 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짓이지요."
"우르겔! 그렇다면 어째서…!"
"흑마법사가 전선에 등장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대신들께서 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신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 죽음과 광기를 받아들 여 마법을 발현하는 이들. 그들은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의 마법발현 방식 때문.
"흑마법사들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 전쟁에 소모합니다. 시민 일천을 죽여 제국군 백을 처치할 것이고, 십만 인구를 가진 도시 하나를 소모해 일만 제국군을 소멸시킨단 말 입니다."
흑마법사의 마법 대부분은 제물 의 죽음을 시작으로 발현된다.
군단을 유린하는 대규모 파괴마 법도, 병력을 분열시키는 세뇌와 환 각마법도, 지휘관을 은밀히 암살하는 저주마법도, 사자를 일으켜 병사 로 부리는 사령마법도.
그 모든 것이 제물. 즉 인간을 소모해 이루어진다.
"흑마법사가 끼어 든 이상, 공국 도시의 민간인들은 흑마법의 제물 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흑마법 이 우리 제국군을 노리게 될 터."
흑마법사가 전쟁에 등장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루어졌던 일이다.
인간의 생명을 죽이고, 그 영혼 과 생명력을 타락시켜 어두운 힘을 끌어올려 흑마법을 발현한다.
그렇기에 대륙에서 흑마법사들은 철저히 배척받아왔다.
적도, 아군도. 모조리 소모해가는 끔찍한 일이기에.
"도시를 불태워야만 흑마법사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법성 장관은 제안했다.
적의 흑마법 제물로 도시가 사용 될 바에, 먼저 이쪽에서 제거해 버 리자고.
적의 병참선을 끊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일이다. 단, 이번에는 보급품 행렬이 아닌 인간의 도시를 불태우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학살을…."
"아군이 혹마법에 휩쓸리는 것보 단 낫지 않겠습니까, 국방성 장관. 장관께서도 그대의 군단들이 혹마법에 당해 패퇴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들도 언젠가 제국의 신민이 될 이들이다. 우르겔!"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재무성 장관. 지금은 그저 적국의 민간인들 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납득할 수 있을 리 만무. 대신들은 우르겔의 말에 반발을 그치지 않았다.
"그만."
황제가 나직이 입을 열어 그들의 설전을 제지했다. 그에 알현실에 자리한 고위 대신들이 입을 닫는다.
황제가 옥좌 위에서 턱을 괴며 고했다.
"우르겔. 도시 소각은 민감한 사 안이군. 결정은 뒤로 미루겠다."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이전쟁은 가능한 제일 빠른 속도로 끝내야 한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알현실 안에 들어찬 대신들을 훑어 보며 말을 이었다.
"흑마법사 놈들이 전쟁에 개입했다."
공국은 보잘것없는 약소국이었다. 국토는 좁았고, 병력의 수는 적었으며 그 질 또한 허술했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전쟁에 개입 한 이상 상황이 반전되었다.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는 쉬운 전쟁에서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수렁으로.
"각 성들은 전쟁을 가장 빠르게 끝내는데 집중한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게 보고하도록. 합당한 것 이라면 예산과 권한을 부여해주지."
"… 명령을 받듭니다. 황제 폐하."
"회의는 끝이다. 각 대신은 움직이도록."
고위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물러난다.
황제는 옥좌 위에 턱을 괴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흑마법사. 흑마법사라…."
쯧. 그가 혀를 찼다.
"공국 놈들. 멸망이 코앞이라고 흑마법사를 끌어들이다니."
하긴 순순히 멸망할 바에, 대륙에서 배척받는 흑마법사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멸망을 피하고 싶었겠지.
허나 그렇다 한들 공국은 약소 국, 그리고 제국은 남부 대륙의 패 자. 그들의 발악은 말 그대로 발악일 뿐이다.
공국은 결코 전쟁에서 이기지 못 한다. 다만 전쟁이 더욱 험악해질 뿐.
"… 도시 소각이라."
황제는 그리 읊조리며 눈을 감았다.
그는 도시 소각 명령에 대해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