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61화 (61/390)

61화.

나는 그동안 전투에 스킬 '집중'을 활용해왔다.

전투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한다.

불필요한 감각이 소거되고, 시각 이 극도로 민감해지며, 사고가 가속 된다.

대단한 스킬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향된 집중 스킬은, 그이전까지 누렸던 효과들을 아득히 초월했 으니 .

- 콰앙!

한스가 이쪽으로 돌진해온다.

그리고 나는 그때,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대다수의 감각이 그 찰나의 가속을 위해 희생되었다.

촉각이 제거되었다.

아무런 감촉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피부 위를 타고 흐르는 혈액의 뜨거움도, 검의 손잡이를 맞잡은 손바닥의 감촉도, 사라져 느껴지지 않는다.

청각이 소거되었다.

박동하는 심장의 소음이, 터져 나오는 굉음이, 갈리는 이의 마찰음 이 들리지 않는다.

미각과 후각이 사라졌다.

입안에 맴돌던 비릿한 피맛이,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핏물의 혈향 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시각이 변조되었다. 모든 색상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모노톤으로 화했다.

시야가 극단적으로 좁아져 배경 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직, 한스의 검날만이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아주 찰나. 한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 속.

나는 몸을 움직였다.

검을 움직인다.

하지만 느리다.

마치 시간이라는 속박을 거스르 고 움직이려는 것처럼.

무시무시한 반발력이 내 움직임을 억누른다.

억지로 팔을 움직였다.

피부가 불타는 것만 같다.

욱씬.

집중 스킬 덕분에 느껴지지 않았 어야 할 고통이 오른팔에서 느껴졌다.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공기의 벽을 꿰뚫고, 공간을 억 지로 파고들며, 검날이 앞으로 향한다.

하려는 것은 찌르기.

콰드드득.

너무나 압도적인 가속 덕분이었 을까.

검의 첨단이 앞으로 향해가는 것 과 동시, 오른팔의 근섬유들이 찢어 지고 혈관이 파열되어갔다. 한계 이상 움직임으로 인한 부작용.

하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내 검날이, 앞으로 향한다.

푸욱.

한스의 가슴팍에 푸른색 검날이 파고들었다.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와 함께 거대한 먼지기둥이 일고, 웅장한 충격파가 주위를 뒤흔들었다.

오스카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무슨…."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스와 한지훈의 전투를 지켜봤다.

조금 전까지 오스카는 한지훈의 죽음을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스는 강했고, 한지훈은 노력했 으나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마지막 공격에서 오스카는 한지훈이 죽을 것이라 여기고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쿨럭…!"

한스가 입에서 검은색 핏물을 내 뱉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기다란 검 하나 가 하나 박혀있었다.

드워프제 장검. 한지훈이 사용하 던 무기다.

"쿨럭, 커헉!"

한스가 검은색 핏물을 왈칵 쏟으 며 무너져 내렸다.

털썩.

한스의 육신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

직후 소름끼치는 적막이 대지에 내려앉았다.

오스카는 경악해 읊조렸다.

"… 검이 보이지 않았다."

오스카는 오러를 다루는 초인.

그는 2만에 달하는 병력을 통솔 하는 지휘관이었으나, 그 스스로 또한 상위의 무력을 지닌 강자였다.

그런 그가 한지훈의 검격을 놓쳤다.

보이지 않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한지훈의 움직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마치 인간의 인식속도를 초월한 것 처럼. 허나 그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비틀.

방금 전 인지를 초월한 공격의 반동인가.

한지훈 또한 각혈하며 몸을 휘청 거렸다.

아니, 그저 각혈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오른팔이 완전히 망가져있다. 어깨부터 손가락에 이르기까지, 오른팔의 피부 전체가 거무죽죽하 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아마 저 초월적인 움직임 때문이 리라. 허나 그런 피해를 각오한 덕분에 한지훈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지훈 백인장!"

오스카가 비틀거리며 한지훈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믿기지 않다는 눈이 검은머 리 청년에게로 향한다.

"쿨럭, 커헉!"

나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내장이라도 다친 것일까.

핏물이 식도를 타고 울컥울컥을 라온다.

입가에 피를 닦고, 건물 파편에 등을 기대 숨을 골랐다.

"염병…."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타고 올라 온다.

온 근육이 욱신거렸다.

머리는 극도의 가속에 대한 반발 인지 멍했으며, 입과 코에서는 계속 해 피가 흘러댔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다.

하지만 제일 심한 것은 내 오른 팔이었다.

"이거 포션으로 회복할 수 있으 려나?"

축 늘어진 오른팔 전체가 시커멓 게 물들어 있다.

그 찰나의 순간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는 움직임을 행했기에, 내부 의 피가 모조리 쏠려 혈관이 파열 된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움직이려 했고.

"으윽…!"

직후 고통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는다. 혈관뿐만이 아닌 신경 과 인대까지 죽어버린 듯했다.

심각한 부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뭐. 포션이면 낫겠지."

숨만 붙어있다면 무조건 살려내는 것이 바로 포션이라는 아이템이다.

군단장의 목숨까지 살렸는데, 포 션 한두 개쯤 던져주겠지. 그것보다는 놈이다.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봤다.

"한스 요한바르첸."

나에게 죽었으나, 복수하기 위해 흑마법으로 되살아나 내 앞을 가로 막은 이.

녀석은 가슴팍에 검이 꽂힌 채 나자빠져 있다.

피식 웃었다.

"꼴좋다. 개새끼."

- 띠링! 띠링!

[업적 달성!]

['업적 : 대적자 NPC 처치 (2)' 를 달성했습니다! 포인트가 수여됩 니다.]

[정산 포인트 : 10pt]

(남은 포인트는 10pt입니다.)

[엑스트라 퀘스트 - '한스 요한 바르첸 처치'를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포인트가 정산됩니다!]

[정산 포인트 : 10pt]

(기존 보유 포인트는 10pt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20pt입니다.)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하지만 무시한다. 아직 뒤처리가 남아있기에.

"이번에는 확실히 죽여주마. 한스."

스르릉.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허리춤 의 단검을 뽑아들었다.

한스를 죽일 거다.

놈의 목을 잘라 죽이고 불태울 거다. 제아무리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는다 한들, 시체까지 불태우면 되 살릴 수 없겠지.

그렇게 내가 단검을 들고 쓰러져 있는 놈의 모가지에 검날을 들이밀 때.

그때였다.

- 제법이군. 한지훈.

콰앙!

내 몸이 무언가에 맞아 뒤로 날 아갔다.

바닥을 굴렀다.

저릿한 통각이 전신을 유린했다.

"커헉!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뒷말을 삼키고,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봤다.

언제나타난 것일까.

한스의 배후에 하나의 인영이 자리해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 음에도 마치 공간 그 자체에서 나 타난 듯 갑작스러운 등장이었다.

- 확실히 '시스템'이 선택할 만 한 인물이야. 한계를 파훼하고 순간 이나마 격을 초월하다니.

질척하고도 묵직한, 불길한 음성.

녀석을 바라봤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 쓴 이였다.

눈은 붉게 일렁였으며, 얼굴은 중년인의 외양을 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

하지만 어째서인가.

녀석의 모든 것이 익숙하게 느껴 졌다. 저 말투, 붉은색 안광,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희미한 존재감까 지.

- 롬, 베이먼.

그가 누군가를 호출했다.

그러자 그의 배후로 두 명의 암흑기사가 등장했다.

직감했다.

눈앞의 흑마법사는 분명 강력한 이였으나, 저 뒤에 있는 두 명의 암흑기사들 또한 한스를 능가하는 강자들이었다.

그가 지시한다.

- 한스를 회수해라.

그에 두 암흑기사들 중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있던 한스를 짊어들었다.

"무슨 짓을!"

나는 이를 갈며 땅을 짚었다.

온몸에 저릿한 통각이 일고, 관 절과 인대가 뿌득거리며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럼에도 억지로 몸을 일 으키려했다.

한스가 다시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소멸시켜야 하니까.

하지만.

- 쓸모없는 짓을.

로브를 뒤집어 쓴 이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마법이 발동되었다.

쿠궁!

갑작스레 증폭된 중력이 내 몸을 으스러져라 누르기 시작했다.

"커헉…!"

나는 폐부의 공기를 내쉬며 벌레 마냥 바닥에 처박혔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

숨을 쉬는 것이 괴롭다.

그럼에도 나는 오러마저 운용해 가며, 고개를 들어 올려 놈을 노려 봤다.

피식.

흑마법사가 웃는다.

- 한지훈. 네놈은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바닥에 짓눌린 상태 그대로 적개 심을 담아 놈을 노려봤다.

갑작스레 나타난 흑마법사와 두 명의 암흑기사.

놈들은 막 죽은 한스의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내 앞에 모습을 드 러냈다.

누구인지 도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흑마법사.

게임 속에서는 내 아군이었던 이 들. 그들이 어째서 지금, 나를 대적 하고 한스를 되살리려 하는 건가.

흑마법사가 나직이 웃으며 후드 를 벗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온갖 기하학적인 문신으로 뒤덮인 안면.

그리고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 붉은색 눈동자를 한 놈의 얼굴이 드러난다.

흑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 내 이름은 크라함.

내 눈이 크게 떠졌다.

크라함.

익숙하고도 친숙한 이름.

- 흑마법 학파 불라바아의 종주 된 이며.

경악해 몸을 짓누르는 고통마저 잊었다.

녀석이 어째서 지금 내 앞에, 그것도 나를 대적하기 위해 자리해 있는 것인가.

머리가 혼란스럽다.

- 전생에 네 가장 든든한 아군이 었던 이다.

띠링!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크라함]

[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놈이 질척하게 웃었다.

- 현생에서 보는 건 처음인가?

한지훈. 나의 예전 주인이여.

크라함.

혹마법 학파 불라바아의 종주.

녀석은 내 아군이었다.

[크라함]

[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동맹 제의]

["제국 북부군 최고사령관, 한지훈 각하. 저희 흑마법사를 귀하의 군대에 합류시키는 것은 어떻겠습 니까? 아아… 보수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체! 저희는 인간들의 시체와, 실험에 쓸 포로들만 있으면 됩니다. 백마법사 놈들이랑 달리 저희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시체만 공급해 주신다면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수락/거절]

게임 중반부 무렵, 북부야전군을 이끌던 내게 동맹을 간청했었던 이.

녀석은 강력하고, 사악했다.

[크라함]

[혹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한지훈 각하. 더 많은 시체를 모은다면 보다 상위의 흑마법을 발현할 수 있습니다. 제게 대도시 세 개만 맡겨주십시오. 그렇다면 위대 한 흑마법을 발현시켜 연합군의 서부전선을 망가뜨려 보이겠습니다."]

["병력이 부족하십니까? 그렇다 면 사령술사를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시체를 이용한 언데드를 만든다면 손쉽게 병력을 확보할 수 있지요.

나약한 놈들입니다만, 단순한 병사들을 상대하는 데는 쓸 만할 것입 니다."]

비록 기분 나쁜 존재였지만, 분명 녀석의 혹마법은 강력했다.

수많은 인간을 제물로 발현한 흑 마법은 전략 단위의 화력을 발했고, 시체를 소생시켜 만들어낸 군대는 몹시도 유용했었다.

중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강대한 화력, 막대한 유용성, 더 해 대가라고는 시체와 포로들 뿐.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떨어져서도 녀석을 아군으로 영입하려 했었다.

과거 메인 시나리오대로 간다면 언젠가 나는 제국과 적대할 것이고, 그렇다면 흑마법사의 힘은 몹시 유 용할 것이었으니까.

헌데 어떻게 된 일인가.

그 크라함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분명 녀석은 게임의 중반부에나 등장할 터인데.

- 이런, 이런. 혼란스러워 보이는 군.

녀석이 발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나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전히 내 몸이 중력에 짓눌려있 기 때문에 꼼짝할 수 없다.

오러를 운용해 벗어나려 해도 이미 내 심장 속 마나는 거의 고갈 상태.

놈이 내 코앞까지 다가온다.

- 그럴 수밖에 없지. 네가 알던 '게임'이, 시나리오가 아니니까. 안 그런가? 한지훈. 클클클, 녀석은 낮게 웃더니. 내 턱을 붙 잡았다.

- 그래. 기분이 어떤가? 네놈이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세계 속에 떨어진 기분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