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제국군 하급 창병 루이스.
그는 성벽 위에서 멍한 눈으로 북쪽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 초병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성벽 밖에서 다른 군대나 침입자 가 접근하는지 감시하는 임무.
지루한 임무가 아닐 수 없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불빛 하나 없는 밖을 멍하니 노려보는 것이니.
졸음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그는 태만할 수 없었다.
"루이스. 졸지 마라."
"… 졸지 않았습니다! 십인장님!"
그의 직속상관인 십인장이 주기 적으로 순찰했기 때문.
"조금만 있으면 곧 교대다. 제대로 경계해."
"알겠습니다."
루이스는 고개를 좌우로 털고는, 다시금 성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나 보이는 것은 까만색 어둠. 그리고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 과, 커다랗게 보이는 만월에 이른 달 뿐.
루이스는 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인다.
그렇게 그가 초병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이었다.
- 바스락, 투툭, 툭.
작은, 너무나도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
자잘한 돌들이 바스라지고 떨어 지는 소리.
너무나도 적막했기에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 소음 이었다.
"밖에 마물이라도 있나?"
분명 성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허나 루이스는 소음을 그리 중요 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크기가 너무나도 작았기에. 그저 마물이 움직이는 소리이리라. 그렇게 여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들린 소음을 무시하 기도 힘든 노릇.
그는 횃불을 집어 들고, 성벽 아래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 서걱.
아래에서 검은색 궤적이 그어지고, 루이스의 목이 떨어졌다.
후드득 떨어지는 붉은색 핏물.
그의 목이 힘없이 성벽 아래로 낙하하고, 그는 그 자리에서 실 끊 긴 인형마냥 무너져 내렸다.
"뭐, 뭐야?!"
루이스의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경악했다.
하지만 그 또한 곧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콰드득.
그의 목이 완전히 뒤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것일 까.
병사의 목을 돌린 것은 검은색 갑주를 입은 기사였다.
직후 성벽 너머에서 다수의 소음 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스락, 달그락, 철그럭, 사박.
성벽 너머에서 들려왔던 미세한 소리.
그것은 암흑기사가 성벽의 미세 한 요철들을 밟고, 기어오르는 소음이었다.
마침내 성벽을 기어오른 암흑기 사들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극히 미세 했고, 검은색 갑주는 어려움 없이 어둠 속에 동화되었다.
- 퍼억! 콰직!
곧 성벽 위에 있던 초병들이 하나둘 죽어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검은색 궤적이 그어 지고, 핏물이 치솟았다.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 성벽 위 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그렇게 성벽 위 초병들이 얼마나 죽어나갔을까.
암혹기사들 중 하나, 베이먼이 붉은색 안광을 빛내며 지시했다.
- 성문을 열어라. 공국 병력을 요새 안으로 불러들여라.
-요새 내성, 사령부를 제압하라.
암흑기사 오백, 그리고 공국군 병사 사천과, 수십의 흑마법사들.
그들이 요새 안으로 진입한다.
나는 마이사에게 숙소 안에 숨어있으라 지시한 뒤, 무장을 갖춰 입고백인장 숙소 밖으로 나왔다.
"야습! 야습이다!"
"모두 당장 일어나!"
"북문이 열렸다!"
숙소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이곳저곳에서 고함과 괴성이 들려오고, 요새 저편에서는 커다란 폭 음소리가 쾅쾅 울려 퍼지고 있다.
나직이 읊조렸다.
"시나리오가 바뀐다는 것. 이런 의미였나."
본래 포트 갈레이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이곳은 그저 제국군이 재정비하는 곳이었을 뿐.
야습 같은건 일어나지 않았다.
헌데 어째서인가.
지금 제국군이 공격받고 있다.
명백한 시나리오의 비틀림.
"쯧."
혀를 찼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작성한다고했다. 그 말인 즉, 기존 시나리오가 비틀리는 걸 넘어 아예 다르게 변화한다는 뜻.
나는 빠르게 달려 백인대 막사로 향했다.
"백인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야습이라니요! 이건 도대체…."
과연 척후병들이라는 것인가.
내 휘하 부대원들은 모조리 일어나무장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베테랑이니만큼 위급상황에 기민 하게 반응한 것일 터.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빠진 사람 없이 모두 다 집결했 나? 각 십인장, 보고."
"1번 십인장, 카일. 전 병력 집결했습니다."
"2번 십인장 에시. 집결 완료했습니다."
"3번 십인장 아드레이…."
예상대로 모든 병사들이 긴급 상황에 집결해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확인하고는,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북문이 열린 것 같다."
화재가 일어난 것일까.
요새의 북쪽 방면에서는 붉은 빛 이번들거리며 어둠을 몰아내고 있다.
"그리고 적에게 마법사까지 있군."
놈들에게는 마법전력이 있을 것 이었다. 콰르릉, 하는 폭음이 계속 해 들려오고 있으니 .
아군의 마법전력인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이 토록 신속하게 반응하지 못할 터. 적에게 마법전력이 있다고 봐야한다.
쯧. 혀를 찼다.
'염병할 공국새끼들. 야습도 어지 간히 좋아해야지.'
파트라헴에서도 그렇고, 이곳 포 트 갈레이에서도 그렇고.
놈들은 항상 야습해온다. 밤이 그렇게도 좋은가.
"일단 우리는 천인대 지휘소로 간다. 지휘체계 없이 막무가내로 전투하다가는 각개격파당 할 뿐이야."
"알겠습니다, 백인장님."
"어서 움직여!"
이후 나는 부대를 이끌고 천인대 지휘소로 향했다.
적의 규모와 전력을 모르는 상황.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일단 마나통신이 들어오는 천인대 지휘소로 가야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동했다.
하지만 천인대 지휘소까지 금방 도착할 수는 없었다.
"전방에 공국군 발견! 수, 약 삼십여 명!"
천인대 지휘소까지 가는 길목 이곳저곳에 공국 병사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십인대 단위다. 갈아버 려!"
내가 명령하고, 병사들이 돌진했다.
내 휘하 병사들은 모두가 척후조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 그들은 정예 였고, 그렇기에 가로막는 공국 병사들을 수월하게 처치해가며 진군해 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우리는 무사히 천인대 지휘소에 도착해 그레드와 재회할 수 있었다.
"한지훈! 역시나 무사했구만."
그레드의 모습은 급박한 상황임을 여실히 보여줬다.
들고 있는 쌍검에는 붉은색 핏물 이 질척하게 묻어있었고, 주변에는 공국군 병사들의 시체들이 아무렇 게나 널려있었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격렬하게 적과 싸웠을 터.
그가 내게 알려왔다.
"방금 전, 군단 사령부에서 연락 이 들어왔다. 적의 규모는 약 오천 가량, 그중에는 기사와 마법사까지 포함되어있다."
"역시."
쳐들어온 적이 오직 병사들밖에 없었다면 이토록 빠르게 성문이 열 리진 않았을 것이다. 기사와 마법사 들을 미리 침투시켰기에 성문이 열 린 것이리라.
"한지훈. 자네의 레인저 백인대에 게임무를 하달하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끄는 부대는 정예인 레인 저 부대.
분명 어려운 임무를 맡기리라. 그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요새 중앙 내성, 군단 사령부가 함락당 할 위기다. 자네가 가세해 구 원하도록. 절대 그곳을 뺏기면 안된다."
요새 중앙 내성.
지금은 우리 북부 3군단이 사령 부로 사용하는 곳이다.
즉 군단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곳. 그곳을 빼앗긴다면 군단의 전체 지휘체계가 흔들리고 만다.
반드시 사수해야 하리라.
"자네 백인대가 먼저 사령부로 가세하게. 나는 나머지 병력이 모이는 대로 합류하겠다."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 띠링!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군단 사령부를 구원하라.]
퀘스트가 부여되었다.
불길이 치솟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붉은색 화마가 요새 안 길거리 를, 건물을, 그리고 제국의 병사들을 불태워갔다.
그리고 그 불길이 넘실거리는 길거리 속을 여유롭게 걷는 이가 있었으니 .
"모조리 죽여버려라. 제국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여라!"
한스였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며 주위를 살폈다.
검은색 기사들이 제국군을 학살했다. 그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은색 궤적이 그어졌고, 제국의 병사들이 질척한 핏물을 쏟아내며 쓰 러져갔다.
콰과과과광!
하늘에서 흑색 마탄 세례가 쏟아 졌다. 그에 이쪽으로 달려오던 또 다른 제국군 부대가 쓸려나갔다.
피 안개가 피어오르고, 비릿한 혈향이 넓게 퍼져나간다.
한스가 붉은색 안광을 빛내며 읊 조린다.
"한지훈. 어디 있느냐."
그의 앞에서 수많은 제국군들이 무더기로 죽어나가고 있다.
비명과 고함 사이,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음울하게 번진다.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기연을 얻어 더욱 강해진 한스.
그는 한지훈을 죽여버리고자 한다.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목을 가 르고, 목뼈를 부숴서.
한스는 한지훈을 찾아 길을 걸었다.
군단 사령부인 내성은 요새 정 중앙에 있다.
그리고 그 성의 주위에는, 격렬 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모두 죽여!"
내가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런 나를 보좌하듯 병사들이 뒤따른다.
달려 나가며 검을 휘둘렀다.
파앙! 하는 파공성과 함께 청색 검광이 번뜩인다.
내 앞을 가로막았던 공국 병사의 목이 절삭되었다.
컥…
놈은 힘없는 단말마를 뱉으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약해빠진 공국 놈들. 역시 놈들 의무위는 허술했다. 징병된 병사들 의 한계다.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완전히 풀 수는 없었다.
- 피잉! 핑!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살.
자리를 박차고 지면에 몸을 던졌다.
퍼퍼퍼퍽!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 이쪽으로 달려오던 공국 병사들에게 명중했다.
두셋의 적병이 휘청거리며 쓰러 진다.
이를 갈았다.
"염병. 공국군이 너무 많아."
공국 놈들의 주력이 이곳, 내성 인근에 집중된 듯하다.
하기야, 사령부는 전략단위의 제 1목표. 이곳을 먼저 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 .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 부관 인 엘락이 다가와 보고했다.
"백인장님! 아직 내성은 함락당 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못 버틸 것 같습니다. 적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내성이 먹히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역시."
내성 주위에 공국 병사들이 쫙 깔려있었다.
당연히 내성 안으로도 놈들이 쳐 들어갔겠지. 물론 내성 안에는 나름 의 수비병력들이 있을 터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다.
후우.
뜨거운 한숨을 내쉬며 지시했다.
"내성 안으로 진입한다. 함락당하 기 전, 군단 지휘부를 구원해야 해."
"하지만…."
내 말에 엘락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전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보인다.
내성을 포위하듯 서 있는 공국 병사들의 무리. 그들의 수는 언뜻 보아도 천을 넘어보였다.
너무나 막대한 수의 적병. 저들을 뚫고 내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사령부를 탈환해야 해."
사령부인 내성이 함락당한다면, 그리하여 안에 있을 군단장을 비롯 한 모든 참모진이 몰살당한다면. 2만에 달하는 전 병력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군단 사령부와 지휘관들을 구해내야 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검을 쥐어들었다.
"모두 돌진 준비해. 내성까지 길을 뚫는다."
"… 명령을 받듭니다!"
병사들도 알고 있다. 내성을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그에 불안해하면서도 전의를 끌어올리는 그들이었다.
후욱.
심호흡했다.
이제 곧 달려가야 할 때.
그때였다.
"오랜만이군 그래. 한지훈 백인 장."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살폈다. 건물 모퉁이에서 로브를 입은 마법사 하나가 걸어 나온다.
"훈장 수여식 이후로 일주일 만 이지."
나타난 것은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의 단장, 제피르였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 것일까.
그는 진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한지훈 백인장. 자네는 저 천여 명의 병사들을 뚫고 내성으로 진입 하려 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마법단장 각하. 사령부를 사수해야 합니다. 안에는 오스카 군단장과 군단 참모진이 있습니다."
"가로막는 적이 저토록 많은데 도?"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고작 백여 명이서 천 명을 뚫고 가겠다라. 용맹한 건지, 무모한 건 지 모르겠군."
클클클. 그가 낮게 웃더니, 나직 이 읊조렸다.
"그래. 마음에 들었다."
화륵. 그의 손끝에서 작은 불꽃 이 피어났다.
그는 입에 궐련을 물고는 불을 붙였다. 가느다란 회색 연기가 피어 오른다.
"조금 도와주지. 저기 공국 병력 들을 걷어내 주마."
화륵! 화륵! 화륵!
제피르가 지팡이를 들어올리고, 그의 배후에 붉은색 폭렬구가 생성 되어가기 시작했다.
"곧 내 휘하 마법사들이 이쪽에 집결할 거다. 내성 주변 잡병들은 금방 정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성 안쪽은 자네의 백인대가 정리해야 한다. 우리 마법사들은 실내에서 전투하기엔 적합하지 않으니 말이다."
마법사들은 실내전을 할 수 없다.
그들이 자칫 화력을 제대로 조율 하지 않는다면, 내성 건물 그 자체 가 무너지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내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길을 열겠다."
화륵! 화륵! 화르르륵!
폭렬구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처음에 한두 개에 불과했던 그것 은 곳 열 개를 넘어갔고, 지금은 백여 개에 이르고 있다.
많은 수의 폭렬구들.
저 정도의 화력이라면 천여 명의 공국군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나와 내부하들이 진입할 수 있는 틈을 만들기에는 충분하리라.
"지금이다. 가라, 한지훈!"
그가 지팡이를 내려그었다.
붉은색 궤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직후, 콰과과과과과광!
무수히 많은 폭발이 일어났다.
공국 병사들이 갈가리 찢어지고, 육편조각들이 허공으로 비산한다.
핏물이 사방천지에 흩뿌려졌다.
"달려!"
나는 지면을 박차고, 크게 외치 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병사들이 뒤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