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후작가를 조심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심으로 의아해 물었다.
알키온 후작가.
베르겐의 설명에 따르면, 꽤 커다란 권세를 지닌 제국의 중앙귀족 가문이라고 한다.
헌데 뜬금없이 조심하라고 하다니.
그 의도가 궁금했다.
그에 베르겐이 입을 열었다.
"한지훈. 자네는 케니를 이겼다. 압도적으로 말이야."
"이기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 이겨야지. 내기인데. 하지만 너무 압도적으로, 마치 가지고 노는 것처럼 이겨버렸어. 악감정을 가지겠지."
"악감정이라…."
하긴.
케니 알키온은 고위귀족 자제다.
녀석을 인정사정없이 밟아버렸으니 , 체면이 상할 수밖에.
나중에 무언가 수작을 부려올 수도 있다.
"물론 노골적으로 가문의 힘까지 빌리진 않을 거다. 알키온 후작가가 강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귀족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다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머리가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대련내기였고, 최선을 다해 이겼을 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정적이 생기다니.
허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애초 내 신분은 평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신분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미 한 차례 겪었었다.
전 백인장이었던 갈랜 알디니의 노골적인 배척.
지금 나는 고작 백인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점차 군 고위직으로 올라 갈수록 나를 견제하고, 배척하는 이 들이 더더욱 나타날 터.
언젠가는 귀족들과 척을 질 것이 확실하다.
굳이 눈치 볼 필요는 없겠지.
"만약, 추후 이 일로 알키온 가문이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 한다면 내게 알리게. 내가 비록 백작위에 불과하기에 그 권세가 후작위에게 밀리긴 하다만, 그렇다고 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 * *
"한지훈. 대단하더구나."
백인장 집무실로 돌아오자, 마이 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묘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정말 기사를 이겨버리다니. 그저 허풍인 줄 알았는데, 그럴 만한 실력이었어."
"말했잖아. 패배할 가능성은 없다 고."
물론 허풍이라 여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갓 오러를 각성한 이가 현직 기사, 그것도 기사단장인 베르겐의 수 제자를 이길 거라 생각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보다 마이, 잠깐 심부름 좀 해줘."
"심부름? 뭘 시키려고."
마이사가 묻고, 나는 씩 웃으며 천주머니를 들어올렸다.
철그럭, 찰랑.
천주머니가 흔들리자 안에서 동전부딪치는 소음이 들려온다.
"이번 대련내기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으니까, 회식이라도 하려 고."
대련 직전 걸었던 금화가 53개.
그것들이 지금은 334개로 불어나 있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수익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득을 얻었으면 베풀 줄 도 알아야 하는 법.
"금화 조금 줄 테니까, 고기랑 술 닥치는 대로 사 와. 군단을 따 라온 상단에게 가면 팔 거다."
기분 좋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오늘 하루쯤은 풀어져도 좋을 테 지.
"백인장님!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카일이 음식을 입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녀석은 우적우적 고기를 씹어 삼 키고는, 옆에 놓여있던 럼주를 들이 켰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이길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 케니라고 했나? 기사가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하고 무너지더군요."
"저도 성벽 위에서 봤었습니다. 멀어서 자세히는 못 봤습니다만… 정말, 엄청나더군요."
지금 나와 내 소속 병사들은 회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고기를 굽고 나르고, 술잔을 채워준다.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데 호들 갑 좀 작작 떨어라."
"호들갑이라니요! 평민이 순수 무력으로 기사를 이긴 겁니다. 오히려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합니다!"
"이미 소문 쫙 났습니다. 저희 백인장님이 기사를 완전 가지고 놀 았다고."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녀석들이 마치 제일인양 기뻐하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쪽을 바라보는 내 후하 병사들.
녀석들의 눈동자에는 신뢰와 존경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이번 대련덕분에 나에 대한 믿음이 늘어난 상황.
좋은 일이다.
상관된 이로서 부하가 이쪽을 믿고 따른다면 보다 통솔하기 쉬워질 터이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 3군단이 내일 진군하는건 다들 알고 있을 거라 믿는다. 행군에 차질 없을 정도로만 적당히 마시고, 제때 들어가 쉬어라."
"벌써 들어가십니까?"
"그래. 상급자가 있으면 즐기기 힘들 것 아냐. 내가 눈치 있게 빠져준다."
"전혀 아닙니다! 백인장님, 편하 게 드십쇼!"
"됐어. 배불러."
붙잡는 병사들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회식장소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시간은 밤. 완전히 어둑 해져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밤하늘이 시야에 박힌다. 과거 서울에서 살 적 봤던 밤하늘 과는 너무나도 다른 하늘. 공기는 깨끗해 투명했고, 별자리는 지구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으며, 만월에 이른 달은 너무나도 커다랬다.
이렇듯 밤하늘을 볼 때마다 체감 하게 된다.
내가 정말 다른 세계에 떨어졌구나, 하고.
그렇게 얼마나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한지훈 백인장님.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최근에 합 류한 부관, 엘락 빌레펠트였다.
녀석이 내게 다가와 옆에 섰다.
"기사를 상대로 대련에서 승리하 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그러냐."
그놈의 대단하단 소리, 오늘 하루 종일 들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것만 같다.
"역시. 한지훈 백인장님의 부대에 지원한 건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엘락. 너는 제국 수도 사관학교 출신이었지."
엘락을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로, 하지만 눈가에는 희미한 호기심을 품은 채 내 옆에서 있다.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어째서 내부대 부관직을 희망 한 거냐? 네 출신과 성적이라면 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엘락은 제국 수도 사관학교를 우 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제국 중앙군이나 근위대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 있었을 터다.
헌데 녀석은 북부군, 그것도 평 민인 내부관이 되는 걸 지원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
그에 엘락이 입을 열었다.
"저는… 출세가 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출세하고 싶다면 중앙군이나 근위대를 가야 하지 않나. 수도 사관학교 출신에, 네 성적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을 터 인데."
제국군은 크게 다섯 개의 야전군 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남북의 접경지대 방위를 담당하는 4개 야전군, 그리고 제국 중부지방을 수호하는 중앙군. 그중 가장 출세에 유리한 곳이 바로 중앙군이었다.
"맞습니다. 제 성적으로는 중앙군 이나 근위대에 들어갈 수야 있었겠 지요. 하지만 그뿐입니다."
엘락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빌레펠트 남작가의 차남입 니다. 그리고 남작이라는 작위는 중앙군이나 근위대에서는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지요. 가장 낮은 작위이 니 말입니다."
하긴.
엘리트들이 모여있는 중앙이나 ,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근위대의 군 관은 대부분이 고위 가문 출신이다.
남작가문 출신이 가봤자 고급군 관이 되기는 힘들겠지.
"남작위인 제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전공이 필요합니다. 전공이 없다 면 진급할 수 없지요. 그리고 중앙 군이나 근위대는 아시다시피…."
"전투가 없지."
"그렇습니다. 중앙이나 근위대는 전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세울 기회도 없지요."
중앙군은 수도를 비롯한 황실 직할령을 담당하는 군대였고, 근위대는 황궁과 황가를 수호하는 황제의 친위병력이다.
당연히 실전경험을, 전공을 쌓기 힘들 수밖에.
"때문에 저는 북부로 왔습니다. 전공을 쌓기 위해서. 게다가 마침 공국과의 전쟁이 일어났었고 말입 니다. 그리고… 한지훈 님의 소문을 들었지요."
"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나는 여러 전공을 세워왔다. 훈장을 두 개나 받을 정도로 눈에 띄는 전공들을.
전공을 세워 올라가고 싶어하는 엘락에게는 내 옆자리가 매력적으로 보였을 터.
씨익 웃었다.
"내부대에 지원한 건 좋은 선택 이었다. 엘락."
마음에 든다.
전공을 세우고 싶어, 출세하고 싶어 내 옆에 왔다라. 어찌 보면 속물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의욕 있다는 소리였다.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라. 그깟 전공. 지겹 도록 세우게 될 테니까."
물론 엘락이 무능하다면 힘들겠 지만.
녀석은 저래 봬도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수료한 인재. 전공을 세우는 건 그리 힘들지 않겠지. 부관 엘락의 활약이 기대되었다.
* * *
나는 회식자리를 뒤로하고 백인장 숙소로 향했다.
덜컹.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닥에서는 마이사가 자고 있었다.
녀석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넘어가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후우."
한숨을 내쉬자, 속에서 진한 술 냄새가 올라온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 졌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대적자 NPC인 한스를 처치했고, 마이사를 포섭했다. 퀘스트를 클리 어 해 오러를 각성하고 개인의 무력을 키웠다. 게다가 내 휘하 백인대를 완전히 정비하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했다.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를 바라 봤다. 그곳에는 베르겐에게 받은 드워프제 장검이 있었다.
그것을 잡아, 천천히 뽑아 들어 보았다.
- 스르르릉….
유려한 검신이 튀어나오고, 검날 이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반사해 은은하게 빛난다.
피식.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게임 속 세계에 끌려 들어가, 검을 휘두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벌써 이 세상에서 지내게 된 게 어언 두 달이 넘었다.
이 세상에 익숙해졌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비릿한 혈 향도, 사람을 벨 때의 그 꺼림칙한 감촉마저.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갑작스레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모든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본래 세계의 평화로운 생활 로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고,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금 이 생활을 완전히 잊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네."
달칵.
나는 검을 수납하고는, 침대 옆에 기대어 놨다.
밤이 돼서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 걸까.
평소에 하지 않던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잠이나 자자."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군단의 재정비가 완전히 끝날 것이고, 다시 행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쓸모없는 생각을 할 시간도 없어지겠지. 눈을 감자 시야가 어두워졌다.
조금씩 졸음이 쏟아진다.
몽롱한 기운에 몸을 맡기고, 막 수마에 집어삼켜지려는 순간.
- 띠링!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 뭐?!"
나는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홀로그램을 노려봤다.
"이건 무슨…."
과거, 한스를 죽였을 때 처음 보았던 홀로그램.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한다는 안내창.
어째서일까.
그것이 지금 떠올라있다.
갑작스레 잠이 확 달아났다.
하지만 아직 홀로그램은 끝나지 않았다.
- 띠링!
[치명적인 오류!]
[메인 시나리오에 치명적인 오류 가 발견되었습니다. 시나리오를 수정합니다.]
[시나리오 수정… 실패.]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를 작성합니다.]
나는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시나리오의 치명적인 오류, 수정, 새로운 시나리오라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내가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을 때.
- 땡! 땡! 땡! 땡! 땡!
창밖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저 멀리서, 병사의 외침이 들려 왔다.
"야습! 야습이다! 공국군이 쳐들 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