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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53화 (53/390)

53화.

"… 그래서. 그 케니라는 기사랑 대련하게 되었다고? 그것도 진검대 련을?"

"그래."

기사단장 베르겐과 헤어진 뒤.

나는 마이사에게 가 그간 베르겐 과 있던 일을 밝혔다.

감탄인지, 놀람인지. 그녀가 헛숨을 내쉬었다.

"허어, 한지훈. 소문은 들었지만 대단하구나. 기사단장이 직접 관심을 가질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

"훈장은 폼으로 받았겠냐."

나는 턱짓으로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액자로 잘 갈무리된 훈 장 두 개가 놓여있었다.

제국 동성훈장과 은성훈장.

쉽게 받을 수 있는 훈장들은 아니다. 문득 그녀가 물어왔다.

"헌데, 기사가 되는 걸 그토록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보병대 백인장 지위보다는 기사 지위가 훨씬 더 좋을 터인데."

"음…."

마이사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지 잠시 고민했다.

사실 대답하고자 한다면 쉬웠다.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부하들을 버릴 수 없었노라고 말하면 되 니까.

하지만 마이사는 내가 직접 거둬 들인 인재였다.

녀석에게 섣불리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포인트를 사용해 강해 진다는, 어찌 보면 제정신이 아닌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기사가 된다면. 한계가 있으니까."

"한계?"

중요한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챈 것일까.

그녀가 경청한다.

"확실히. 당장 눈앞만 본다면 기사가 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강력한 동료들, 주위의 시선, 게다가 더 높아진 신분까지. 네 말처럼 이깟 보병대 백인장 따위보다 평기 사 대우가 월등히 좋아."

"허면 왜…."

"말했잖아. 한계가 있다고."

기사 작위.

더해 볼로냐 기사단의 단장 베르 겐의 수제자가 되는 기연까지. 누가 봐도 제안을 거절한 내가 미친놈이다.

하지만 나는 기사가 되면 안된다.

당장은 이롭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이기에.

"기사가 아무리 높아져봤자 결국 기사에 불과해."

기사는 제국의 검이자 창.

오러를 두른 초인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무력을 발하지만, 커다란 강철랜스를 들고 기사용 전투마에 탑 승해 전신갑옷을 입은 '기사'는 절 정의 무력을 발한다.

고작 수십, 수백으로 수천, 수만을 제압하는 강력한 힘.

기사들의 랜스차징은 진형을 무 너뜨리고 전장을 관통한다.

이렇듯 기사는 강하다.

하물며 그 기사들이 뭉쳐 만들어진 기사단은 너무나도 강하다.

중앙에서 경계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기사단장은 약하지."

"…그게 무슨 소리지? 기사단장 이 약하다니. 기사들 중에서 가장 드높은 무력을 지닌 게 기사단장 아닌가?"

"내가 말하는 건 무력적인 부분 이 아닌 위계와 권한의 문제야. 기사들이 아무리 강력한 전력이라 한 들 기사단장의 권한은 약해. 중앙에서 기사들의 반역을 경계하기 때문이지."

단순 무력으로는 볼로냐 기사단이 제 3군단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오러를 다루는 초인들의 능력이란 무시무시한 것이었으니 .

하지만 지휘권한은 정반대였다.

"전장의 최우선 지휘권은 군단장 이 가져가. 군단장이 전장의 기사들 과 마법사들까지 지휘할 수 있지. 반면 기사단장이나 마법단장은 휘하 외의 병력을 통솔할 수 없어."

같은 단장 계급이라 한들, 기사단장보다는 군단장이 보다 강력한 지휘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군단장이 사망하더라도 그 후임인 참모장이 전체병력을 지휘할 뿐.

전장 지휘권은 결코 기사들에게 부여되지 않는다.

즉 기사단장이 지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휘하 기사병력들뿐.

전장을 통제하는 것은 어디까지 나 군단장과 참모부인 것이다.

"게다가 기사는 아무리 승급한들 기사단장이 끝이야. 기사로서 정점에 도달해봤자, 제국의 예리한 칼날 이상은 될 수 없어. 정치적 권한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

기사단장은 사실상 기사 계급의 정점이었다.

기사단장 이상 가는 계급은 없다.

단급 부대장이 그들이 도달한 수 있는 최고계급.

"반면, 같은 단장 계급이라 한들 제국군 군관은 더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지. 군단장 너머에는 야전군 사령관이, 야전군 사령관 너머 에는 집단군 사령관이, 집단군 사령관 너머에는 국방성장관이 있다. 하지만 기사는 단장 계급이 끝. 차이 가 느껴져?"

"… 그렇다면 한지훈. 그대는 단장 계급 너머, 군의 정점에서려는 건가?"

"그래."

"해…"

마이사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개 백인장. 그것도 평민 출신 백인장이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먼 이야기구나."

"맞아. 먼 이야기지. 아마 하루이 틀로는 되지 않을 거다."

현대로 치자면 일개 중대장이 참모총장을 꿈꾸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하물며 평민 출신인 내가 하는 말이니 더욱 실현가능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씩 웃어보였다.

"그래도 이 정도 포부는 있어야 네 고향을 해방시킬 수 있지 않겠 냐?"

마이사는 무어라 답하지 않고 그저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그런 거다. 그래서 나는 기사가 될 수 없어. 출세하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한지훈. 그대는 신기한 녀석이구나."

"뭐가'?"

나는 마이사를 내려다보고, 마이 사는 아직 앉아있는 채로 이쪽을 올려다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의 감정이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대가 말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실현가능성 없는 이야기다. 일개 백인장이, 그것도 평민 출신이 군의 최고위층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왜. 허풍으로 보여?"

"그렇지 않아보여서 문제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지훈. 그대의 눈동자를 아무리 바라봐도 절대 거짓이나 허풍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라면 그 정도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고 있어."

당연하다.

이미 게임 속에서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제국의 주인인 황제를 죽이고, 적대하는 모든 세력을 쳐부수고, 대륙 그 자체를 정복했었으니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시스템 보정과 시나리오 정보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잡담은 이만 하고. 이제 시간이네. 슬슬 가봐야겠어."

"가본다니. 어디로?"

"신입들 맞이하러 ."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들었다.

아까 전 전령에게서 받은 인사명 령서였다.

"레인저 백인대로 개편이라니. 시나리오 그대로야."

레인저 부대.

모든 구성원이 척후병으로 편성 되어있는, 최정예 보병부대이다.

그리고 상부에서는 내게 레인저 백인대를 맡기려는 듯했다.

"한지훈. 어서 와라. 군단 전령에 게서 서류는 잘 받았지?"

"받았습니다, 천인장님."

나는 천인장 집무실로 가 그레드 와 마주했다.

그는 잠시 이쪽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받았다면 이야기가 빠르 겠군. 한지훈, 자네의 4번 백인대는 이 시간부로 재편, 1번 레인저백인 대로 재배치된다."

"소속은 파트라헴 천인대 그대로 입니까?"

"그렇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였다.

천인장 그레드는 나와 잘 맞는 몇 안 되는 지휘관이었다.

하물며 그의 출신도 나와 같은 평민, 다른 귀족 장교와 달리 대화 가 편한 상관이다.

그런 그레드가 계속해 내 직속상 관을 맡게 되었다.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한지훈. 자네는 여태까지 직속부관이 없었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아무리 글을 읽고 쓸 줄 안다지만, 서류처리를 도와줄 부관 이하나쯤 있는 게 좋겠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관을 하나 붙여주려고 하는데 ."

"부관이라… 제 부대 부관직을 희망하는 사관이 있겠습니까? 평민 인제 아래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장교가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백인대 부관은 본래 막 사관학교를 수료한 신입사관이 배치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관학교를 수료한 이들은 모두 귀족 출신.

헌데 그런 귀족 출신 사관을 평 민인 내부관으로 붙여주겠다니.

대부분의 사관은 자존심 상해 내 키지 않아 할 터인데.

그에 그레드가 씩 웃어보였다.

"한지훈. 자네는 스스로를 잘 모르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인 장님."

"자네 말마따나, 귀족 출신 사관 들 입장에서 평민 지휘관을 보좌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지. 하지만 자네는 단순한 평민 출신 사 관이 아니다."

그레드가 내 가슴팍을, 정확히는 내 가슴팍의 약장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는 이미 충분히 많은 전공을 세웠네. 게다가 훈장도 두 개나 수훈받았고, 최근에는 오러까지 각 성했지."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내 행적. 여태껏 내가 세워온 전공들이다.

"이런 인재를 그 누가 일개 평민 으로 본단 말이냐? 물론 귀족 우월주의에 찌든 사관이라면 자네 아래에서 일하는 것이 거북하겠다만. 출세욕이 있는 사관이라면 오히려 원 하는 자리이지."

"출세욕이라… 제 아래에 있다면 출세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자네처럼 능력 있는 장 교 아래에서 일한다면 전공을 세울 기회가 많지 않겠는가? 그리고 장 교가 승진하기 위해서는…."

"전공이 필요하죠."

그레드의 말을 이해해 고개를 끄 덕였다.

장교가 진급하기 위해서는 전공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아래에서 일한다면, 그전공을 세울 기회가 자연스레 많아질 터.

"자. 한지훈, 이걸 보게."

그레드가 테이블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내게 건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나직이 읊조렸다.

"인사서류군요."

"그래. 자네 부관으로 지원한 초급장교들의 인사서류들이다. "

"이모두가 말입니까?"

그레드가 넘긴 인사서류는 모두 여덞 장이었다.

"우리 3군단에 배치된 신입장교 들 중, 여덞 명이 자네 아래에 배 속되길 희망했어."

"생각보다 많군요."

나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읽어봤다.

사실 인사서류라 해봤자 별다른 건 없었다.

이름과 가문, 작위, 그리고 출신 사관학교와 그 성적까지. 이들은 갓 사관학교를 수료한 병아리들이었고, 그렇기에서류에 기재된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서류를 살펴보고는, 의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엘락 빌레펠트. 이자는 뭡니까?"

"왜 그러나? 한지훈."

"제국 수도 사관학교를 수료했는 데도, 제 부관 직에 지원했습니다."

엘락 빌레펠트.

빌레펠트 남작가의 차남.

제국 수도 사관학교를 수료했고, 특히 전략전술과 기마술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다.

"수도 사관학교 출신에 이런 점수라면, 다른 좋은 부대에도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엘락 빌레펠트의 사관학교 성적 은 우수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 출신이 수도 사관학교 이니, 이런 일선 전투부대가 아닌 중앙군이나 근위대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헌데 굳이 북부군, 그것도 평민 의 아래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그래도 우 수한 인력인 것은 사실.

나는 서류를 내밀며 결정했다.

"엘락 빌레펠트. 이 녀석으로 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잘 처리해두지."

서류를 받아든 그레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지훈. 꽤 신기한 소문 이 돌던데 말이다."

"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 니까?"

"듣기로는 베르겐 기사단장 각하 의 수제자와 대련하게 되었다고 하지."

나는 그레드의 말에 헛웃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대련을 약속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레드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소문이 돌았는가.

그레드 천인장이 이죽거렸다.

"자신은 있는 거냐?"

"네.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자만은 금물이다, 한지훈."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벌써 병사들끼리 내기를 벌이더 군. 훈장을 두 개나 받은 백인장이 이길지, 아니면 베르겐 각하의 수제 자가 이길지 말이다."

"돈내기 입니까? 이거야 원, 구경거리 신세군요."

"그래. 요새 안에 별다른 즐길 거리가 없지 않나. 자네의 그대련 이 꽤 흥미로운 오락거리가 된 거지."

하긴.

진짜 기사와 오러를 각성한 백인 장이 맞붙는 것이다.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대련은 일주일 뒤라 하지. 나도 직접 지켜보겠네. 한지훈, 반드시 이기게. 귀족 기사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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