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백인장님. 저 꼬맹이는 뭡니까?"
백인대 막사로 돌아가자, 내 옆에 있던 마이사를 보고 카일이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주워온 애다. 심부름꾼으로 부려 먹기 위해 데려왔지."
"그렇습니까? 하긴, 나무 벨 소동이 있으면 편하겠군요. 아, 백인 장님! 훈장 수훈 축하드립니다!"
"그래. 쉬어라."
다행이 카일은 별다른 의심을 안 하는 듯했다.
이곳은 중세시대와 비슷한 사회 구조다. 군영에 나무를 베거나 청소를 시키는 심부름꾼이 있는 건 그리 드문일 이 아니었다. 덕분에 마 이사를 데려온 걸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나는 백인대 막사를 지나 백인장 숙소 문을 열었다.
"네가 워낙 사내처럼 생겨서 다들 여자로는 안 보는군. 다행이다. 덕분에 둘러대기 편했어."
"흥!"
마이사는 콧김을 내쉬며 백인장 숙소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여자처럼 안 보인다니 내심 자존심 상한 듯했다.
나는 마이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확실히. 알고 보면 여자 같긴 한데.'
언뜻 보기에 마이사는 남자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으며, 얼굴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더해 산발처럼 휘날리는 머리카락 까지.
이래서야 그 누가 봐도 평범한 난민 소년이라 여길 법하다.
하지만 자세히 본다면 여성스러 운 특성이 보이긴했다.
기다란 속눈섭이라든가, 혹은 갸 름한 이목구비와 턱선이라든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그 마이사가 여자였을 줄은.'
게임 속에서도 몰랐던 사실이다.
어째서일까. 마이사 슈베츠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 내게 사로잡혀 처형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 행세를 했었다.
하긴. 여자의 몸으로 군을 움직이는 것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것이 많았을 터이니 자신의 성별을 숨겼을 것이리라.
뭐, 녀석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녀석의 무력이 아닌 지성을 보고 동료로 영입한 것이니.
나는 주머니에서 포션병을 꺼내며 말했다.
"마이사. 다리 내놔봐."
"무슨 소리인가."
"다리 다쳤잖아. 치료해야지."
마이사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종아리에는 완전히 붉은 색으로 물든 붕대가 감겨있었다.
붕대를 풀어내자 절로 얼굴이 찌푸려 졌다.
"너도 참고생했구만."
마이사의 종아리는 깊게 베여있었고,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해 크게 곪아있었다.
이 정도 상처라면 걷는 것도 힘들 었을 터인데 용케도 버텼다.
나는 녀석의 상처 부위에 포션을 반절 붓고는, 나머지를 마시라고 건 넸다. 녀석이 병을 받아 들이킨다.
치이이익.
상처부위에서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 자상이 점차 아물어 간다.
"그런데 포션이라니. 설마 제국군 에선 백인장에게도 포션을 지급하는 건가?"
"아니. 돈 주고 샀어."
방금 전 마이사에게 건넨 포션은 의무장교에게 뒷돈을 찔러주고 받은 것이었다. 45금화를 녀석에게 줘 포션 3개를 얻을 수 있었다.
거금을 지출했지만 합당한 소비였다. 이번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 . 앞으로는 가급적 포션을 휴대하 려 한다.
물론 포션을 뒷돈주고 사는 건 엄연히 군용품 부정습득이었지만, 내 알바 아니다.
"좋아. 다 나은 것 같네."
녀석의 자상은 완전히 아물어 있다.
상처가 순식간에 나은 것이 신기 한 것일까. 마이사는 다리를 붕붕 휘두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에게 몇 가지 물건을 건넸다.
"…이건 뭔가. 한지훈."
"제국군 군복이랑 호신용 단검. 일단 받아 놔라."
내가 내민 것은 군복과 호신용 단검이었다.
계급장과 부대 표식이 없는 단순 한 군복. 더해 짧은 길이를 가진 작은 단검.
마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들고, 나는 뒤이어 말했다.
"마이사. 앞으로 마이사라는 이름 은 쓰지 마라. 혹시 네 신분을 아는 녀석이 있으면 복잡해지니까 그대로 가명인 마이를 사용해."
"나는 멍청이가 아니다."
"그래."
나는 미소 지으며 마이사를 바라 봤다.
마이사 슈베츠. 훌륭한 전략셔틀을 찾았다. 녀석을 잘 키운다면 추 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제국군에게 점령당한 포트 갈레 이의 내성. 그곳의 회의실에는 두 명의 인영이 자리해 있었다.
제국 북부 제 3군단 군단장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후작.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것은 볼로냐 전투기사단장인 베르 겐 라 프랜시스 백작.
그들은 작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보기 좋게 까였군 그래. 베르 겐."
먼저 입을 연 것은 오스카 후작 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 찻잔을 들어 올 리며 베르겐을 바라봤다. 기사단장 베르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쯧. 베르겐이 입가를 비틀었다.
"그래. 까였지. 설마 기사임명을 거절할 줄은 몰랐다. 고작 평민 주제에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련이 남은 것 같은데."
"… 그렇지."
베르겐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발 치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까 전, 자신이 불태운 기사 임명장 양피지 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미련이 없을 순 없지. 그런 대 단한 재능을 타고난 녀석이 일반 보병대에 그대로 남겠다니 말이다."
"녀석의 재능이 그렇게 탐나는 건가?"
"그렇다. 평민 출신, 그것도 저토록 어린 나이에 벌써 오러를 각성 한 거다. 오히려 탐내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싱긋. 오스카가 미소 지었다.
"그 베르겐이 평민 하나 때문에 전전긍긍하다니. 신기한 광경이군."
"자네도 오러의 길을 걷고 있으니 알 것 아닌가. 그 평민의 성장 속도가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그래. 확실히 비상식적이지."
오스카는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올려져있는 종이를 들어올렸다. 한지훈의 인사서류였다.
그는 서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군 경력이 몇 년에 불과한 애송이가 오러를 각성. 더해 그간 세워 왔던 여러 전공들까지… 자네가 탐 낼 만한 인재이긴 하지."
"오스카. 물어볼 것이 있다."
"뭔가 베르겐."
오스카 군단장이 시선을 돌려 베 르겐을 바라봤다.
베르겐은 잠시 생각하고는, 나직 이 물었다.
"한지훈 백인장을 그대로 보병대에 소속시킬 생각인가?"
"…그렇다면?"
"오러각성자를 보병대에서 굴리는 것은 전력 낭비다."
한지훈은 오러를 각성했다. 그리고 오러를 각성했다는 것은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
기사가 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 를 계속해 일반 보병대에서 굴리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반 보병으로 다루기엔 아까운 인재이긴 하지. 그렇다고 기사직을 바라지도 않고.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레인저 백인대를 맡길 생각이다."
"레인저? 하긴. 기사가 안된다면 레인저로 활용하는 것이 더 낫 겠지. 물론 기사가 되는 것이 제일 좋겠다만."
베르겐의 말에, 오스카는 씩 웃으며 서류를 내려놨다.
"베르겐. 자네는 한지훈 백인장을 심히 탐내는 것 같군 그래."
"그렇지. 재능 있는 제자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흐음… 회유해보는 건 어떻겠나?"
"회유라. 구체적으로는?"
"금화 좀 던져주고 자네의 기사단으로 꿰어내는 거다. 돈 안 좋아 하는 놈은 없을 테니."
베르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평기사 임명과 명예귀족 작위까지 걷어찬 놈이다. 딱히 재물 로 녀석을 꿰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그것도 그렇겠지."
오스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홀짝였다. 베르겐은 나직이 한탄했다.
"내 아래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언젠가 내 뒤를 이어 기사단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을… 빌어 처먹을. 그 재능이 아깝군."
베르겐의 말에, 오스카는 재차 미소 지었다. 일개 평민 하나 때문에 안달복달하는 베르겐의 모습이 퍽 새로웠기 때문이다.
"역시 자네의 인재 욕심은 못 말 리겠군 그래."
물론 오스카는 그런 베르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기사단장과 군단장이라는 서로 다른 직책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그 둘 모두 고위 군관이었다. 오랜 정복 전쟁을 최전선에서 경험 해온 경험 많은 군관.
그렇기에 그들은 알고 있다. 전쟁이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라지만, 몇몇 용맹한 이들이 전황을 뒤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뭐, 그건 알아서 하게. 본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인사 조치를 취할 테니까. 그나저나… 베르겐, 자네에게 알릴 것이 있다."
오스카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화창한 날씨 아래 포트 갈레이의 전경이 그대로 들어 와 있다.
그는 여유 넘치는 얼굴을 가라앉 히고, 금세 진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제국 국방성에서 정보가 들어왔다. 다른 나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국가의 정황.
바뀐 오스카의 표정에서 진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베 르겐이 자세를 바꿔 이야기를 듣는다.
"다른 나라라 한다면. 어디지? 공국의 배후인 카렌 왕국인가?"
"카렌 왕국도 포함되지."
"… 포함이라니. 한두 나라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
"그래. 카렌, 람셀, 트웨인, 그리고 코르자카 공화국까지. 놈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 같다."
"그게 무슨…."
베르겐이 순간 눈가를 찌푸렸다. 오스카의 입에서 나온 국가들의 수 가 예상보다 많았기 때문에.
"저 네 개의 국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국경지대에 병력이 집중되고 있다."
"마법사는 발견되었는가?"
"아니. 마법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허나, 저놈들의 군대가 집결하는 곳이 모두 제국과의 접경지대 야."
제국은 드넓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토가 넓은 만큼, 국경을 접하는 국가들의 수도 많았다.
카렌 왕국, 요한바르첸 공국, 람 셀 왕국, 트웨인 왕국, 코르자카 공 화국, 마지막으로 연방 자치령까지.
그리고 그들 중 제국의 우방은 단 하나도 없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제국은 주변 국가들과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 염병할 정복 전쟁 덕분이지."
제국은 거의 대부분의 주변 국가 들과 적대관계였다. 과거 정복 전쟁 당시, 광활한 영토를 주변국에게서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변국들의 상태가 심 상치 않다.
"벌써 백인대 단위의 소규모 국 지전이 이곳저곳에서 발발하고 있다. 몇몇 접경지대에서는 군단 단위 의 적영이 보이기도했다. 기사단과 대규모 보급마차와 함께 말이야."
갑작스러운 대규모 군대의 움직임. 세작을 움직여 알아볼 것도 없이, 너무나 노골적인 전쟁 준비 태 세다.
"상부에서는 놈들이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네 개국가가 한꺼번에 쳐들어 오기라도 한다는 건가?"
"어쩌면."
"멍청한 놈들. 연방을 견제하기도 바쁠 놈들이 제국을 노리는군."
"연방이 자치령을 완전히 안정화 하고 다시 침략해오기 전. 우리 제국을 집어삼켜 국력을 기를 생각이겠지."
"놈들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 는가?"
"글쎄. 하지만 정말 네 개국가 가 연합해 전면전을 걸어온다면, 아무리 우리 제국이라 한들 버거운 건 사실이야."
제국은 오랜 전쟁 경험을 지닌 강력한 군사국가. 제국군은 정복 전쟁으로 단련되었으며, 그 장대한 전쟁 경험과 노하우들은 아직까지 현 역인 장성과 장교들을 타고 내려와 군을 움직이고 있다.
제국군은 강하고 실전적이다.
허나 그렇다고 제국 혼자서 주위 접경국가 모두를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달칵. 오스카가 찻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지금은 국력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는 열강이었던 녀석들이니 말이야. 놈들이 한번에 쳐들어온다면 우리도 위험해."
현재 남아있는 제국의 접경국가 들은 모두 과거 열강이라 불렸을 정도로 강국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제국 주위에 있던 국가들 중 강국 아닌 이들은 대부분 멸망해버렸기 때문이다.
카렌, 람셀, 트웨인, 코르자카.
모두 과거 제국의 정복 전쟁을 견뎌내었던 강국들. 아무리 제국이 라 한들, 저 네 국가가 연합해 쳐 들어온다면 제국의 큰 위기가 될 터.
오스카가 심각한 표정으로 알린다.
"베르겐.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아. 공국과의 전쟁은 시작에 불과 해. 그리 머지않아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거다. 북부 대륙 전체를 아 우르는, 과거 정복 전쟁을 넘어설 정도로 거대한 전쟁이."
확전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