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마이사 슈베츠나는 그이름을 알고 있다.
[마이사 슈베츠][연합 중앙군 최고사령관]
["한지훈. 네놈은 여기서 패배한다."]
과거. 녀석은 연합의 중앙군 최고사령관이었다.
놈의 지능은 범상치 않았다.
한스가 그이상하리만치 정확한 직감과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나를 대적했다면, 저 마이사라는 녀석은 철저히 계산된 지략으로 나를 상대 하던 녀석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녀석이 있다.
시선을 내려 녀석의 모습을 살폈다.
'이 꾀죄죄한 꼬맹이가 나중에는 그런 지략가가 되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게임에서의 마이사는 그야말로 고귀한 모습이었다. 손짓 하나로 수십만의 군대를 운용하며, 특유의 카리스마로 휘하를 사로잡았다.
놈의 전략은 천재적이었다.
녀석은 필요하다면 수십, 수백 km를 후퇴해서 전선을 망가뜨리기 도 했으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미 끼로 삼아 내 군단을 격파한 적도 있었다.
녀석의 수작질에 말려든 것이 몇 번이었던가.
문득 녀석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마이사 슈베츠][연합 중앙군 최고사령관]
["내 패배로군. 어서 죽여라, 한지훈."]
마이사는 목숨구걸조차 하지 않 고 담담히 패배를 받아들였었다.
물론 이쪽이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내가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마이사가 사령관으로 발탁 되기 전, 연합과 제국의 전력이 비등했다면. 그랬다면 패배하는 것은 연합이 아닌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놈의 지략은 대단했으니 .
탐나는 인재가 아닐 수 없다.
'역시. B등급 비밀 정보를 선택하 길 잘했어.'
시선을 돌려, 시야 구석에 표시 된 안내창을 바라봤다.
[B등급 비밀 정보 활성화.]
[정보를 개방합니다.]
[대적자 NPC-마이사 슈베츠는 현재 포트 갈레이 포로수용소에 수 감되어 있습니다. 마이라는 가명을 사용 중입니다.]
B등급이라 얕봤지만 꽤나 쓸 만 한 정보였다. 그 마이사를 미리 확보할 수 있다니.
녀석의 모습을 살폈다.
자세히 보면 꽤나 귀티 나는 외 양이다. 금발은 먼지에 지저분했음 에도 환한 빛을 반짝였고, 피부 또한 각종 잡일에 시달린 보통 꼬맹이와 다르게 부드러웠다.
만약 녀석이 입고 있는 옷이 저런 넝마쪼가리가 아닌, 고풍스러운 옷차림이었다면. 그 누가 봐도 훌륭한 귀공자의 모습이었으리라.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마이사. 나는 네 녀석을 잘 알 고 있다. 네가 사실은 연방 자치령에서 넘어왔다는 것도. 그리고 슈베 츠 왕국 후계자의 혈통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마이사는 몰락 왕족이었다.
연방의 침략에 의해 지금은 연방 자치령, 과거에는 슈베츠 왕국이라 불렸던 곳의 왕자 출생이었다.
물론 이 정보는 건 보상으로 얻 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게임을 진행하면서 얻었던 것이었으니 .
녀석은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 고 가만히 서 있는다.
잠시 고민했다.
'역시 죽일까.'
사실, 처음에는, 정보를 알자마자 죽여버리고자 했었다.
녀석은 게임 속 나를 몰아붙였던 대적자. 기회가 온 이상 확실하게 죽이는 것이 안심할 수 있었으니 .
하지만 나는 녀석을 죽일 수 없었다.
'그렇기엔 능력이 너무나 탐난다.'
마이사는 전쟁의 천재였다. 녀석 의 전략은 항상 날카롭게 빈틈을 찔러 들어왔으며, 아무도 예상치 못 한 방법으로 이쪽을 공격했다. 그렇 기에 나는 녀석에게 항상 고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마이사는 보잘것없는 소년병 포로에 불과하다.
충분히 내 아군으로 회유할 수 있는 상황.
"… 그래. 들킨 건가."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감았다 뜬 녀석의 눈동자에는 이전처럼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나름대로 완벽하게 위장했다 여 겼는데 . 설마 내 신분을 알아챈 이 가 있을 줄은…."
마이사의 눈동자는 방금 전의 잔뜩 움츠러들었던 모습과 달리, 너무나도 당당했다.
마치 이것이 바로 고귀한 혈통의 증명이라는 것처럼. 저 어린 덩치 로, 그리고 저토록 허술한 옷차림에 도 불구하고 나름의 위압감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의 사관이여."
마이사가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네놈의 말대로 나는 왕가의 피 를 이었다. 지금은 멸망해 연방 자치령이 되었지만, 내 몸속에는 슈베 츠 왕국의 피가 흐르고 있지."
불쌍한 소년병 포로 연기는 그만 두기로 한 것인가. 녀석의 몸에서 고귀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껏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졌다. 아래에 처박혀있던 시선이 곧게 위로 향한다.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 반짝인다.
소년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날 어떻게 하려는 건가? 나를 연방 자치령에 팔아넘길 셈이냐? 아니, 영토 확장에 미친 제국이라면… 나를 전쟁 명분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군."
녀석이 똑바로 이쪽을 바라본다. 호수처럼 깨끗한 푸른색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어쨌든, 어서 나를 데려가라. 이미 도망치기엔 늦었으니 반항은 하지 않겠다."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며 포기하는 마이사.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착각이 심하군그래. 마이사, 나는 너를 포로로 넘기지 않을 거다."
"..yw 녀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나는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털어줬다. 지저분한 먼지가 털려 나 오고, 녀석의 찬란한 금발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네 신분을 알고 있는 건 나 혼자뿐이다. 내 상관도, 제국 국방성 도, 그리고 황가조차 네 존재를 모르고 있지."
"그게 무슨 소리지?"
"네 처우는 온전히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거다."
마이사 슈베츠. 게임 속 지략가 이자 내 대적자.
나는 녀석의 존재를 상부에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부하가 되어라. 마이사 슈베 츠 제 1왕자."
녀석을 휘하로 영입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것일까. 마이사의 눈가에 의아한 기색이 떠오른다.
"나는 네 능력이 탐난다."
"능력이라니?"
소년이 이쪽을 똑바로 노려본다.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이 허 약한 몸뚱이와 쓸데없이 고귀한 혈 통밖에 없다. 내겐 검술의 재능도 마법의 소양도 없지. 그런 이 몸에 게 무얼 바라는 것이냐?"
"네 머리."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널 내 참모로 영입하고 싶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게임 속 내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범인의 머리로 노력했던 결과에 불과했다. 모니터 너머 수많은 전투를 지휘하고, 계속해 경험을 쌓아갔던 것 이었으니 .
하지만 녀석, 마이사는 다르다.
'녀석은 천재다.'
마이사는 천재다. 나 같은 범인 의 머리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정한 천재.
알치온 평원 진격전에서도, 글라 보스 대산맥 전투에서도, 그리고 마지막 전투인 윈터아르비엔 공방전에서도.
녀석의 지략은 범상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거두고자 한다. 놈의 재능을 내 아래에 두고 싶기에.
"선택해라. 마이사."
나는 손을 뻗어 포로수용소를 가 리켰다.
"저기 포로수용소로 가다시 불 쌍한 소년병 포로 생활을 할 것인 지."
엄지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 리켰다.
"아니면 내부하로 신분을 숨긴 채 나와 함께할 것인지."
마이사의 얼굴에 혼란이 일었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부하로의 영입 제안이라 니.
그가 생각하기론 자신의 혈통을 살려 정치적 포로가 되는 것이 고작이었을 터다.
잠시 침묵하던 마이사가 문득 물었다.
"제국의 사관이여.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녀석이 내 눈을 똑바로 노려본다.
"내 신분을 알면서도 나를 거두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 겠다. 그것도 제국의 백인장이 말이다."
그야 궁금할 것이다. 내가 어째서 녀석을 부하로 들이려 하는지.
나는 아직 일개 백인장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뜬금없이 지략 운운 하며 부하로 받아들이겠다하니. 그 의도가 궁금하기도 할 터.
녀석의 물음에 나직이 대답했다.
"나는 언젠가 연방 자치령을 해 방할 생각이다."
* * *
"…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구나."
마이사는 표정을 찌푸렸다.
연방 자치령의 해방. 슈베츠 왕국의 탈환. 분명 바라마지 않던 숙 원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 사관은 말했다.
연방 자치령을 해방하겠노라고.
믿기지 않는 소리다. 그렇기에 마이사는 반박했다.
"연방 자치령의 뒤에는 연방이 있다. 그리고 연방은 강하지. 한때 강국이었던 우리 슈베츠 왕국조차 겨우 3년을 버텼을 만큼."
연방은 강하다. 연방은 서부 대륙을 완전히 장악한 거대 연합국가. 그들의 국력은 제국을 아득히 상회 하며, 대양을 넘어 타국을 정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연방의 힘을 뒤에 지고 있는 자치령을 탈환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아니. 나와 너라면 연방 자치령을 해방할 수 있다."
그는 단언했다. 연방 자치령을 해방하겠노라고.
마이사는 청년의 눈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다.'
마이사는 스스로의 안목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 이사가 보기에, 눈앞의 청년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청년의 눈동자는 새카맸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 그 눈빛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어째서일까. 저 제국 사관은 진정 연방 자치령을 치고, 슈베츠 왕국을 탈환할 생각을 하고 있다.
고작 일개 백인장 주제에 말이다.
"제국의 사관이여. 네 이름이 무엇인가."
문득 마이사는 청년의 이름이 궁 금해졌다. 분명 범상치 않은 기인이 라 여겼기에.
그에 청년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한지훈. 파트라헴 천인대 4번 백인장 한지훈이다."
"한지훈…."
마이사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한지훈.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그대가 마나를 각성한 평민 출신 보병대 사관, 한지훈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나 보네."
"포로수용소까지 이름이 퍼져있었다. 오러를 각성한 평민 출신 보병 지휘관이라니. 유명할 수밖에 없지."
마이사는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 여러 소문을 주워들었었다. 그중 하나가 제국 보병대 백인장 한지훈에 관한 소문이었다.
평민 출신으로서 백인장에 올랐고, 오러까지 각성했다 하던가.
나중에 듣기로는 훈장 수훈까지 받았다고 한다.
마이사는 시선을 내려 한지훈의 제복 가슴팍을 바라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제국 동성훈장, 그리고 은성훈 장.'
동색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두 개 의 훈장.
저토록 젊은 나이에, 그것도 일 개 백인장 주제에 훈장을 무려 두 개나 수훈받았다.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일.
한지훈이라. 확실히 범상치 않은 사내였다.
평민 출신으로 다수의 전공을 세 웠으며, 백인장으로 진급했고, 오러 까지 각성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슈베츠 왕국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다.
조국의 탈환. 왕가의 마지막 일 원이었던 마이사가 바라마지 않는 일물론 실현가능성 없는 이야기였다. 연방은 강하고 한지훈은 고작 하급 사관에 불과하니.
하지만 어째서일까.
"한지훈. 그대는 진정 슈베츠 왕국을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하지. 나와 네가 힘을 합친 다면, 언젠가 자치령을 탈활할 수 있을 거다."
눈앞의 청년, 한지훈을 믿고 싶어졌다.
피식. 마이사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고국의 해방이라.'
기나긴 도피 생활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숙원.
머나먼 타국인 이곳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마이사가 입을 열었다.
"좋아. 한지훈, 너와 함께하지."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였다. 마이사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터다.
노출된 슈베츠 왕가 후계자의 신분. 더해 녀석은 지금 포로다. 내 아래로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포 로수
용소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겠지.
게다가 나는 녀석의 숙원인 자치령 해방까지 언급했다. 함께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네 부하가 되긴 싫다."
그러나 아직까지 왕족의 자존심 이 남아있는 것일까.
마이사가 요구해왔다.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는 포로라 하나 본디 나는 왕국의 혈통을 이 은 후계. 고작 제국 백인장, 그것도 평민 출신인 그대의 부하로 들어가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구나."
"부하가 싫다라… 그렇다면?"
"동료."
동료. 마이사는 자신을 부하가 아닌 동료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다.
"한지훈. 너와는 동등한 관계가 되고 싶다. 나를 부하가 아닌 동료 로 받아들인다면 네 제안을 받아들 이지."
"부하가 아닌, 동료라…."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이사, 너를 동등한 전우 로 취급하겠다."
어차피 녀석을 험하게 다룰 생각 은 없었다. 동료나 부하나 그게 그거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마이사."
나는 기특한 마음에 녀석의 머리 를 재차 쓰다듬었다. 그러자 녀석이 다시금 표정을 구겼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탁!
마이사가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을 뿌리쳤다.
"숙녀의 머리는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다."
"숙녀? 뭔 개소리야. 너는 남자 잖아."
"아니. 나는 여자다.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해놓 고는, 성별조차 모르고 있었구나."
"… 뭐'?"
녀석이 한 방 먹였다는 듯이죽 웃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남장 차림의 소녀, 마이사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