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기사가 될 생각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베르겐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나직이 대답했다.
"각하. 제안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백인장으로 남고 싶습니다."
"… 이해가 안 되는군. 기사가 된다면 보다 나은 장비를 지급받으며, 제국의 중요 전력으로 취급된다. 더 해 계승 없는 단승작위라 하나 명예귀족 작위까지 하사되지."
베르겐은 내가 거절하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는 특권계층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으며, 전장을 호령하는 강자로 명예까지 지녔다. 게다가 명예작위라고는 하나 귀족 계급에 편입까지 되니. 평민으로선 더할 나위 없는 기회.
하지만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단장의 제자가 된다 한들. 포인트로 인한 성장만큼 내 능력을 빠르게 키울 수는 없다.'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너무나 비 효율적인 일이기 때문에.
나는 포인트를 사용해 능력을 키 워왔다. 퀘스트를 클리어 해 포인트 를 얻고, 그것을 사용해 스킬과 능력치를 강화시켜왔다.
하지만 만약 단장의 아래로 들어가 검술을 사사받기위해 수련을 한 다?
시간낭비다. 제아무리 기사단장 베르겐이라 한들 그의 가르침은 포인트만큼 나를 빠르게 강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순순히 밝힐 수는 없는 일.
"저는 백인대에 머물고 싶습니다. 제 부하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단장 각하."
때문에 나는 부하를 버릴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사실, 반쯤 진심이기도했다. 녀석들은 나를 신뢰하고 있다. 제목 숨이 위험함에도 나를 구원하고자 했을 만큼.
가급적 녀석들을 살리고 싶다.
"이해가 안 가는군. 자신의 출세 를 포기하면서까지 보병대에 붙어 있으려는 것이냐? 그깟 평민 병사들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두 번 제안하진 않는다."
화르륵.
그의 손끝에 푸른색 불꽃이 타오르고, 손에 들린 양피지가 순식간에 바스러져 사라졌다.
마법은 아니었다. 그저 강도 높은 오러를 발현해 양피지를 태워버렸을 뿐.
불에 탄 양피지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언젠가 후회할 거다. 한지훈. 자네는 큰 기회를 걷어찬 것이니."
베르겐이 나를 노려본다.
"미쳤구나 한지훈. 평기사 자리를 거절하다니."
파트라헴 천인대 지휘소로 돌아 온 뒤, 그레드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는 내가 평기사 자리를 거부한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하기야, 보잘것없는 평민이 명예 귀족작위를 거부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리라.
"더해 베르겐 단장 각하는 무려 일천의 기사를 이끄는 고위 군관이 시다. 그런 분이 직접 스승이 되길 자처했는데, 그걸 거절하다니…."
물론 나도 혹하는 제안이긴했다. 기사가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욱 나은 대우와 신분을 거머쥘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정 은 변하지 않는다. 베르겐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화제를 돌려 그레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천인장님. 저희 천인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냐니. 무얼 말하는 건가?"
"계속 진군합니까? 천인대 과반 이전사하거나 부상당했습니다. 더 이상 작전행동을 할 순 없지 않겠 습니까?"
사실 파트라헴 천인대의 상태는 결코 좋지 않았다.
병력의 수가 극히 모자라다.
선도 정찰대 임무로 절반이 사망했고, 나머지 절반 또한 공성전을 치르며 막대한 소모를 겪었으니 . 지금 파트라헴 천인대는 더 이상 천인대라고도 부를 수 없는 수준.
아니. 어디 우리 파트라헴 천인대뿐일까.
이번 공성전에서 3군단이 입은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우리 파트라 헴 천인대처럼 막대한 피해를 입은 천인대가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은 군단 차원의 재정비가 필요할 때.
그에 그레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 우리 3군단은 요새에서 주둔하며 재정비 기간을 가진다. 후 속 군단과 보충병력이 도착하는 일주일 뒤에나 다시 진군을 시작하겠지."
"일주일이라… 그렇다면 그때까지 우리는 그저 이 기지에 남아있는 겁니까?"
"그렇지."
역시 시나리오대로다.
파트라헴 천인대가 포함된 북부 3군단은 이곳 갈레이 요새에 잔류, 잠시간 휴식기를 거친다.
즉 한동안은 작전이 없다는 것.
나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시간을 얻었다.'
그동안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군에 소속된 이상 여러 작 전행동으로 인해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식기인 지금이라면 자유롭게 시간을 낼 수 있다.
그리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면,
'기연을 취할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레드에게 물었다.
"천인장님. 혹시 포로수용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이제는 동료를 얻으러 갈 때다.
천인대 지휘소를 나온 뒤. 나는 손에 들린 나무상자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제국 금화 100개라."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나무상자 안에는 무려 100개에 달하는 제국 금화가 들려있다.
많은 돈이다.
정말 많은 돈이다.
제국 병사는 한 달의 봉급으로 금화 하나를 받을 수 있다. 아무리 사관 계급인 백인장이라 한들 월봉 이 금화 다섯 개에 불과했다.
헌데 지금 나는 금화 백 개를 가지고 있다. 무려 제국군 병사 하나 의 8년 치 봉급에 상응하는 재화. 그 땅값 비싼 제도 외곽에 자그마 한 집 한 채 지을 수 있는 돈이다.
물론 집을 지으려 하는 건 아니다. 이 돈은 사용할 곳이 있으니 .
피식 웃었다.
"그 녀석을 데려오는데 쓰는 돈 이면 전혀 아깝지 않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나는 포로수용소로 향했다.
"백인장님. 신분을 알려 주십시오."
포로수용소는 포트 갈레이 외곽 구석진 곳에 자리해 있었다. 사실 포로수용소라 했지만, 적당히 커다란 저택 안에 포로들을 가둬두고 있을 뿐이었다.
보초를 서던 병사의 물음에, 나는 백인장 신분증표용 단검을 꺼내들며 대답했다.
"파트라헴 천인대 백인장 한지훈 이다."
"한지훈 백인장…!"
병사가 크게 놀랐다. 녀석 또한 내 이름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기절해있던 사흘 동안 얼마나 소문이 퍼졌던 것일까.
"신분 확인했습니다. 백인장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병사는 신기한지 내 얼굴을 잠시 힐끔거리고는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 나는 여유롭게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그리 쾌적하지 않았다.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제국이나 공국이나 . 포로 대우는 다 거기서 거기야.'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찌르고, 간간히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국 부상병들이 홀린 피와 그 들의 고통어린 신음이었다. 아마도 포로들 중에는 부상병들이 적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고문 흔적은 없네.'
아무래도 갇혀있는 것이 평범한 병사들이니만큼 고문행위까지는 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공국 장교 가 잡혀있는 포로수용소에는 지금 쯤 고문 작업을 통해 정보를 뽑아 내고 있으리라.
천천히 내부를 살폈다.
이곳저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널 브러져 있는 공국 포로들. 그들은 다 해진 군복자락을 입고, 여기저기에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제국 병사에게 다가갔다.
"자네. 잠깐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하명하십시오."
"포로를 찾는다. 소년병이고, 머리는 금발이다. 찾을 수 있겠나?"
"소년병이라… 알겠습니다, 백인 장님. 소년병들은 저쪽에 있을 겁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나는 병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공국은 징병제 국가다. 물론 그 들은 다 큰 성인들을 징병할 뿐. 평시에는 나이도 안 찬 핏덩어리를 동원하지는 않는다. 만약 동원한다 한들 비전투 일꾼으로 움직이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시, 그것도 공성정 당일에는 달랐다.
공국 측은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요새의 비전투원까지 전투 로 내몰았고, 그중에는 새파란 어린아이나 늙은 노인들도 많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는 가지만. 너무한 처사지.'
당장 요새가 함락될 위기이니, 검이나 창을 들 힘만 있으면 무조건 전장으로 몰았을 것이다.
위기상황에 어린아이를 전장으로 몰아넣는 것은 현대도 똑같았다. 2차대전기 베를린 공방전에서의 독일군이 그러했고, 현대 제 3세계의 반군들이 그러했으며, 이곳 포트 갈 레이의 공국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기 소년병들입니다."
잠시 후, 나와 병사는 수용소 구석에 도착했다. 그러자 그곳에 작은 체구를 가진 소년들이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었다.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누군가는 팔다리를 다쳤고, 누군 가는 복부에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직 앳된 소년들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 그들을 둘러보고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여기서 '마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 앞으로 나와라."
내 말에 소년병들은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호명했으니 , 불길한 일인 줄 알 터. 그에 녀석들 중 앞 으로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어딘가로 집중되었다. 구석에 앉아있는 금발 머리의 소년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잡아 일으 켰다.
"너군. 일어나라."
"으윽…."
소년이 고통에 신음하고는, 비틀 거리며 일어났다. 시선을 내려 녀석 의 다리를 보니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인가. 피 묻은 붕대가 감겨있었다.
나는 병사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겠다."
"백인장님. 허가 없이 포로를 데 려가는 것은…."
"쯧."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녀석이 뭘 원하는지 알고 있기에.
금화 다섯 개를 내밀었다.
"이거면 됐나."
"감사합니다, 백인장님!"
"입단속 잘하고."
나는 마이라는 소년을 끌고나와 포로수용소 밖으로 나왔다.
"… 제국 백인장님. 어째서 저를 데리고 나온 것입니까."
포로수용소 밖으로 나오자, 녀석 은 불안한 기색으로 그리 물었다.
나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전투식량인 육포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것인지 녀석이 꽤나 수척했기 때문이다.
후,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시선을 돌려 소년병을 바라봤다.
녀석은 내가 내민 육포조각을 받아들고는, 얌전히 받아먹었다. 배고 팠던 것인지 저 질긴 걸 열심히 뜯 어 먹는다.
아직 애새끼에 불과한 녀석이다.
키는 겨우 내 가슴팍에 닿을 정도. 많이 쳐줘야 갓 열다섯에 불과 할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리고 공국 은 이런 새파란 핏덩이까지 전장에 동원했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마이. 마이입니다."
"쯧."
나는 혀를 찼다.
"백인장님? 무슨 문제라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 달은 것일까. 소년이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나는 짐짓 표정을 굳히고 녀석에 게 되물었다.
"이름. 다시 말해봐."
"제 이름은 마이라고…."
"아니. 네 진짜 이름말이다. 어쭙 잖은 가명 말고, 네놈의 가문명이 포함된 진짜 이름."
흠칫.
소년이 잠시 몸을 떨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뎌석 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기야,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 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겠지.
나는 나직이 말한다.
"네 진짜 이름이 마이사 슈베츠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 띠링!
안내창이 떠오른다.
[마이사 슈베츠]
[슈베츠 왕국 1순 위 계승자]
마이사 슈베츠. 이 소년의 진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