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유닛-46화 (46/390)

46화.

나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허술한 목제 천장.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윽……"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스 러워서라기보다는, 몸의 관절이 뻑 뻑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며칠 내내 누워있던 것 마냥 말이다.

어깨를 돌리고, 허리를 움직이며 관절을 풀어줬다. 그때마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누워있는 듯했다.

주위를 살폈다.

"여긴 치료소인가."

꽤 넓은 건물 안에 수많은 침상 이자리해있고, 각각의 침상에 부상 병들이 누워있다.

저마다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있는 병사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일어났군. 한지훈 백인장."

내가 깨어난 것을 확인한 것일 까. 누군가가 다가왔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는 의무장 교였다. 계급은 의무장. 천인장 직 급이다.

나는 물었다.

"의무장님.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요새는…."

"요새는 함락되었다."

의무장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하긴. 퀘스트 클리어 안내창이 나왔었으니까.'

시스템이 퀘스트 클리어를 인정 했었다. 더해 기사단이 성문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도 보았다.

요새는 완전 함락되었으리라.

"한지훈 백인장. 지금 자네가 있는 곳은 갈레이 요새다."

그가 어떤 서류를 내밀었다. 아무래도 내게 남겨진 전언인 듯했다.

"그레드 천인장이 부탁하더군. 자네가 깨어나면 자신을 찾아달라고. 그리고…."

의무장교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 보더니, 어깨를 두드려왔다.

"축하하네. 한지훈 백인장."

"축하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오러를 각성했다고 들었 네. 듣자하니 기사 다수를 상대로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고."

어찌된 일일까. 의무장교는 내가 오러를 다룬 것을 알고 있었다.

카일에게 들은 것일까.

"하여튼, 정말 축하하네. 자네도 이제 기사 계급이구만. 어서 천인장 에게 가보게. 그레드 천인장이 잘 설명해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치료소 밖으로 나왔다.

치료소 밖으로 나오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성벽이었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싼 성벽들. 확실히 눈에 익다.

나는 허허 웃었다.

"정말 요새를 점령했구나."

조금 생뚱맞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피를 흘릴 대로 흘려 기절한 것이었는데, 눈 떠보니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였으니까.

사실 반쯤 죽음을 확신했었다. 그 정도 부상이면 포션이 없는 한 반드시 죽을 테니까.

추측해봤다.

"누군가 내게 포션을 먹인 건가."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카일이든, 주위에 있는 병사든, 혹은 지나가던 누군가가 포션을 사용해 나를 살렸 으리라.

포션이 없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내 정보."

- 띠링!

알림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4번 백인장]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중급)]

[스킬 : 기마술(하급)]

[스킬 : 투창(입문)]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14]

[민첩 53]

[내구 15]

[체력 29]

[마나 50] (보유 : B등급 비밀 정보)

(남은 포인트는 40pt 입니다.)

나는 상태창의 '보유 : B등급 비밀 정보' 항목을 보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영 개꿈은 아니었네."

사실, 긴가민가했었다.

어둑한 공간에 들어가서 무언가 보상을 얻는 것. 꿈인 줄 알았다. 그 검은색 공간에 들어간 건 이 세계에 떨어질 때 단 한번밖에 없었 으니까.

하지만 단순한 꿈은 아닌 듯했다. 당시 내가 선택했던 보상인 비밀정보가 상태창 안에 자리해 있으니 .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천인대 지휘소는 어디 야'?"

파트라헴에서라면 눈감고도 찾아 갈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갈레이 요새. 전혀 모르는 곳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디에 천인대 지휘소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우두커니 서 있고는, 지나가는 병사를 붙잡았다.

"병사. 잠깐 길 좀 묻겠다."

"네! 여쭤 보십시오."

"파트라헴 천인대 지휘소를 찾고 있다.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병사가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가며 물었다.

"이곳 갈레이 요새가 함락된 지 며칠이나 됐지?"

"정확히 삼 일 지났습니다."

"삼 일이라……"

그 말인 즉 나는 삼 일 동안 기절해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긴, 포션은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도 살릴 정도로 그 효능이 막 대하지만 그렇다고 즉효성인 것은 아니다. 당시의 나는 빈사 상태에 달했으니 회복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리라.

병사가 물었다.

"날짜를 기억 못하시는 것 보니 부상당하셨 었군요. "

"그래. 방금 치료소에서 의식을 차렸다. 정말 죽다 살아났지."

"백인장님께선 어디서 전투하셨 습니까? 저는 동쪽 성벽을 공략한 5번 천인대입니다."

"나는 남문의 우측 성벽을 기어 올랐다."

"남문 우측 성벽이라. 파트라헴 4번 백인대가 있던 곳이군요."

"4번 백인대를 알고있나?"

의외였다. 애초 2만 명이 달려든 공성전이었다. 몇 번 백인대가 어디 를 공략할지는 자기 소속 부대가 아닌 이상 잘 모를 터인데.

그가 씩 웃었다.

"그야, 한지훈 백인장이 있던 백인대 아닙니까? 유명하지요."

"나를 알고 있나?"

"… 설마."

병사는 멈춰서더니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혹시, 정말 한지훈 백인장이십니까?"

"그렇다만."

"맙소사!"

순간 병사의 눈동자에 두 가지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처음은 놀라 움, 다음은 존경이었다.

녀석이 정중하게 말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한지훈 백인장님."

어째서 나를 알고 있는 것인가. 내심 놀랐다.

그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지금 한지훈 백인장님께선 군단 내에서 유명합니다. 이번 공성전의 주역이라고요. 더해 오러까지 각성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에 있는 병사는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말인 즉 적어도 파트라헴 천인대 소속은 아니라는 소리. 아니, 애초 녀석은 나에게 5번 천인대 소속이라 알려왔었다.

헌데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소문이라도 퍼진 건가?

'뭐. 여러모로 공훈을 세웠었으니 .'

확실히 이번에 나는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었다.

공성전에서 공훈을 세운 것으로 도 모자라, 오러까지 각성해보였으니 . 소문이 퍼질 만도 하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합니다. 막 오러를 각성해 기사들을 무려 다섯 이나 처치하다니요.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소문이 다소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기사 하나를 무력화 시키는 것 이 끝이었다만.'

기사 다섯은커녕, 하나를 잠시 무력화 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가까스로 안구를 긁어서 말이다.

이후에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

"일단 가지. 길 안내 부탁한다."

나는 병사를 따라 천인대 지휘소 로 향했다.

* * *

파트라헴 천인대 지휘소에 도착 한 뒤. 나는 그레드의 집무실 의자 위에 앉아 침묵했다.

침묵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그레드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막이 어색하다.

"으음…."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던 그레드. 그가 잠시 신음하고는, 마침내 입을 열어 말해왔다.

"여태껏 자네가 전공을 세울 때마다 놀랐지만, 이번에는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번 전공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소리다. 무어라 감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탁, 탁, 탁. 그레드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저것은 그가 무 언가 생각을 정리할 때 하는 버릇 이었다.

잠시 고뇌하던 그레드가 나직이 말해왔다.

"한지훈. 저번에 내가 말한 적이 있었지. 자네는 전장에서 죽을 녀석 이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공성전 직전, 내 긴장을 풀어주며 한 말이었다.

- 자신감을 가지게. 자네는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녀석이 아니야.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덕분에 당시 긴장이 풀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레드의 말이 이어진다.

"하지만 자네의 성장은 내 예상을 훨씬, 정말 훨씬 뛰어넘었어."

"오러 각성 말씀입니까?"

"그렇다. 한지훈."

확실히 내 전공은 상상 이상이었을 터다. 나도 벌써부터 기사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지 몰랐었으니 .

과거 게임 속에서는, 이번 공성 전에서 기사들과 조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기사들이 출현하고 말았다.

당시 퀘스트를 완료해 가까스로 포인트를 얻었기에, 스킬과 능력치 를 올려서 간신히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만약 포인트가 부족했으면 죽는 건 이쪽이었다.

그레드의 설명이 이어진다.

"한지훈. 보통 기사들이 오러를 각성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삼십 대중순에, 아무리 재능 있는 자라 해도 이십 대 후반에나 오러를 다룰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어릴 적부터 훈련받아온 엘리트 기사들이 말이다."

기사는 마나와 오러를 다루는 고급 병종. 그렇기에 쉽게 양성할 수 없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오러를 다 뤄야 하며, 오러를 다루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마나 적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나 적성은 사실상 혈통에 좌우된다.

때문에 기사 대부분은 기사 가문, 혹은 고위 군관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을 어릴 적부터 영재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해서 기사들이 오러 를 각성하는 게 보통 삼십 대중 반.

"하지만 자네는 스무 살 초반이 라는, 턱없이 젊은 나이에 오러를 각성한 거다. 그것도 아무런 혈통 도, 제대로 된 기사훈련도 받지 못 한 평민 출신인 이가 말이다."

대단한 일이긴했다. 온갖 지원을 받아가며 훈련하는 기사들에 비 해 훨씬 빠른 시기에 오러를 각성 했으니까. 그것도 평민 주제에 말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마치 검의 천재 처럼 보일 터.

허나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유저 보정 덕분이지만.'

내가 한 것이라고는 퀘스트로 벌 어놓은 포인트를 능력치와 스킬에 갈아 넣은 것밖에 없다. 하지만 그 레드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 내가 퍽 대단하게 보 일 수밖에.

"어디 그뿐인가. 자네가 이번 전투에서 세운 전공도 대단한 수준이지."

그레드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슬쩍 살펴보니 내 인사서류인 듯싶었다.

"읽어보게."

나는 서류를 받아서 읽어봤다.

서류에는 이번 공성전에서 내가 세운 전공들이 잘 기재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성벽을 올랐으며, 병력 투입 지점인 성벽 위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성문을 열고 기사단이 올 때까지 적 기사들에 맞서 사수하기까지했다.

그야말로 이번 전투의 주역이라 고 할 수 있는 수준.

"보면 알겠지만… 이번 전투에서 자네의 역할이 제일 컸다. 가장 먼저 성벽 위에 올라 후열을 엄호했고, 남문 성벽까지 개방했으니 ."

"확실히 그렇군요."

"자, 일어나게. 한지훈. 어디 갈 곳이 있으니 ."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에게 지시했다.

"자네 사관용 정복을 지급받았었 지. 전투복 벗고 정복으로 환복하 게."

"정복 말입니까?"

정복. 지휘관들이 공적인 자리에 참석해 격식 차릴 때나 입는 옷이다. 백인장으로 진급하며 지급은 받았었지만, 입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항상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높으신 분들을 만날 것이니 말이다."

"높으신 분이라 하면…."

"일단 가보면 안다. 백인장 숙소에서 환복하고 다시 찾아오도록."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지휘소 밖으로 떠났다. 아무래도 정복으로 갈아입으려는 것 같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서는데, 문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 막사 위치도 모르는데 ."

아무래도 병사들에게 또다시 길을 물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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