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나와 병사들은 계속해 전진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백인장님."
아르덴이 입을 열었다.
머나먼 곳을 주시하고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알려왔다.
"적 기병대를 찾은 것 같습니다."
그가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군 대열의 좌측, 음영 진 산맥 안쪽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네. 잘 찾았다, 아르덴."
아르덴은 눈이 좋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에게 경계 임무를 맡겨놨었다. 그는 좋은 눈을 이용해 항상 멀리 있는 적을 잘 찾아내곤했다.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주목."
주위의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본다. 나는 굳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적 기병대를 발견했다."
"맙소사…!"
"또다시 기병이라니."
역시나라고 할까. 병사들의 낮빛 이 꺼멓게 죽어갔다.
바로 어제, 적 기병대에 의해 지옥을 경험했던 그들이다. 그에 단숨에 사기가 곤두박질친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다.
'공포에 질리진 않는다.'
병사들은 어제와 달리 좀 더 침 착해보였다.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 의 감정이 올라오긴 하지만, 그렇다 고 패닉을 일으키는 이들은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신병이 얼마 없으니 .'
어제 전투에서 죽은 건 대부분이 신병들이었다. 즉, 지금 남아있는 이들은 대부분 베테랑 병사들이란 소리.
신병들이 대부분 전투에서 소모 된 까닭에 비교적 강한 병사들로만 백인대가 구성된 것이다.
물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이크도 제대로 갖췄다.'
시선을 돌려 창병들이 들고 있는 장창을 주시했다.
파이크 장창. 무려 5미터 가량이나 하는 기다란 창이다. 저장창으로 방진을 짠다면, 기병 놈들 또한 섣불리 이쪽을 노리지 못할 터.
나는 지시했다.
"지금 당장 대기병 방진을 짜 라. 전령은 후방 본대로 가 적 기 병대의 등장을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듭니다!"
병사들이 방진을 짜고, 전령 역할을 맡은 기병이 뒤로 달려 나갔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적 기병대 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
나는 검의 그립을 굳세게 쥐어 잡았다.
"저기 오는군."
공국 기병연대장 클락. 그는 산 의 고지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리 읊조렸다.
그의 눈길이 침공로로 향한다.
조심스레 전진하는 제국 보병들. 그들의 수는 고작해야 5백 명에 불과했다.
백여 명의 기병들을 상대하기에 너무나 적은 수.
문득 클락이 중얼거렸다.
"잠깐. 저놈 저번에 본 것 같은 데."
클락의 시야에 어떤 이가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 왠지 모르게 눈에 익다.
그는 잠시 청년의 모습을 살피고,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 그 투창 보병이군."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투창 공격을 가해 자신의 부하 하나를 죽였던 제국의 백인장.
"과연. 어째서 저 백인대만 저리 기다란 창으로 무장했나 싶었는데 . 어제 우리한테 혹독하게 당했던 녀석들이었어. 학습을 할 줄 아는 기 특한 녀석이야."
클락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우리에겐 안된다."
그는 그리 읊조리며 말 위에 올 랐다.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등 자에 발을 집어넣은 다음, 고삐를 꽉 쥐었다.
"연대장님. 어찌하시겠습니까? 바로 돌격합니까?"
클락의 부관이 물었다. 그에 클 락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돌격해. 놈들의 측면을 친다. 가 자!"
파앙! 그가 말의 배를 박찼다. 흥분한 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클락이 고삐를 꽉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나를 따라라!"
공국 기병대가 돌진한다.
"온다!"
병사들이 하나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장창이 지면에 비스듬히 박 히고, 주위를 향해 겨눠졌다. 고슴 도치처럼 빽빽한 장창방진이 완성 되었다.
나는 심호흡하며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적 기병의 수는 약 백여 명.'
날카로운 눈으로 놈들을 노려봤다.
산의 내리막을 타고 내려오는 공국 기병대. 놈들은 하나같이 기다란 기병창으로 무장한 상태.
'모두 경기병. 방어력은 약하다.'
놈들 중 그 누구도 중갑을 입지 않았다. 기껏해야 몸통의 급소를 방어하는 경갑과, 머리를 보호하는 철 제 투구뿐.
그렇다고 얕볼 순 없다.
'경기병은 빠르지.'
경기병의 최대 장점은 바로 기동력이다. 놈들은 가벼우며, 그렇기에 기민하게 움직여 전장을 뒤흔든다.
나는 곧장 궁병들에게 지시했다.
"화살을 쏴."
"사거리 밖입니다! 맞힐 수 없습니다!"
"굳이 맞힐 필요는 없어. 다만 이쪽으로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사격해. 지속 견제사격이다!"
"명령을 받듭니다!"
피잉! 핑!
궁병대가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미약한 파공성이 일고, 수십 의 화살 세례가 적 기병대에게 향 한다.
하지만 활 소리는 곧 적 기병의 말발굽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 두두두두두!
놈들이 다가온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제발 다른 곳부터 먼저 쳐라.'
다소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놈들이 다른 백인대부터 노리기를 기원했다. 그래야 이쪽이 더욱 오래 버틸 수 있을 테니.
내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 쾅! 콰쾅!
파이크를 들고 있는 우리들이 부담됐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측 면부터 파고들려 하는 것일까.
기병 놈들이 다른 백인대를 공격 하기 시작했다. 5번 백인대였다.
"으아아악!"
"살려줘!"
"커헉!"
기병 백여 명이 순차적으로 돌진, 기병창을 차례로 내질러 5번 백인대의 보병을 도륙해갔다.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했다.
"5번 백인대, 붕괴되었습니다!"
"망할. 잠깐을 못 버티는군."
5번 백인대가 붕괴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녀석들이 최대한 오래 버티기를 바랐건만,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다.
"모두 죽여라!"
"하하! 죽어라!"
공국 기병대가 5번 백인대 잔당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기병 앞의 보병은 나약하다. 더 해 방진이 붕괴되어 흩어진 보병은 더더욱 나약하다. 기병대가 이곳저곳을 누비며 도망치는 생존자들을 사냥했다.
이를 갈았다.
"역시 기병은 기병인가. 아무리 그 공국군이라지만, 기병대는 얕볼 수 없어."
공국의 보병은 약하다. 그들은 징집병. 장비도, 훈련도, 심지어 개인의 각오도 그 무엇조차 챙기지 못한 허접쓰레기가 바로 공국군이 었으니 .
허나 그 공국이라 한들 기병은 정예였다.
애당초 기병은 일반 보병보다 훨씬 육성하기 힘든 상급 병종. 그들은 일반 병사들에 비해 훨씬 단련 되어있다.
"8번 백인대! 위험합니다!"
5번 백인대는 대충 정리되었다는 것일까. 기병들이 다시금 기수를 돌려 8번 백인대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쾅! 콰직!
기병들이 연달아 돌격해 8번 백인대의 방진을 타격했다. 전열이 흔들리고,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 져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제발 오래 버텨라.'
아마 8번 백인대는 붕괴를 면치 못할 것이다. 허나 나는 그들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마지막까지 발 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쪽이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므로.
하지만 역시나.
"8번 백인대! 방진 붕괴!"
"빌어 처먹을!"
8번 백인대 또한 쉽게 무너졌다.
나는 재빨리 적 기병의 남은 병력을 살폈다.
'두 개 백인대를 부수는데 고작 10기 손실인가.'
기병들의 손해는 역시나 경미했다. 이쪽은 무려 두 개 백인대, 약 200의 손실을 입었지만. 놈들이 잃은 기병의 수는 고작해야 십여 기.
승산이 없다.
"후우."
슬슬 결정할 때다.
이자리에 앉아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지. 아니면 뭐라도 해볼 지.
계속해 전장을 주시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보고가 들어왔다.
"백인장님! 6번 백인대가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뭐?!"
나는 놀라 6번 백인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정말로 볼 수 있었다.
"저 새끼들은 왜 뒤로 가는 거 야'?!"
분명 이쪽과 대열을 맞춰 대기 병 방진을 펼쳤던 6번 백인대.
헌데 어째서일까. 놈들은 지금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비록 방진을 꾸린 상태였지만, 이동하는 와중이기 때문에 형태가 비를리고 있다.
어째서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인 가.
무언가 전술적인 행동을 하려고?
아니, 혹시.
설마.
"저 겁쟁이 새끼들! 도망치는 거냐!"
6번 백인대는 도주 중이었다. 슬 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녀석들은, 어느새 방진조차 풀고 뒤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이해는 한다. 순식간에 두 개 백인대가 붕괴되어 갈려나갔으니까. 겁도 났을 거다.
하지만.
"개새끼들!"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동료 인 이쪽이 목숨 걸어 버티고 있는데 도주하다니!
물론 놈들의 행동은 멍청한 짓이었다. 적 기병들이 도망치는 것을 놔둘 리 만무.
- 퍼억! 콰직!
느려터진 보병들은 결코 기병을 따돌릴 수 없었다.
공국 기병들이 도주 중인 6번 백인대 병사들을 순식간에 추격, 하나하나 처치해갔다.
"끄아아아아!"
"으악!"
"살려줘! 살려…!"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병들이 아주 손쉽게 6번 백인대를 요리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이제 남은 건 우리 4번 백인대, 그리고 7번 백인대뿐인가.'
시선을 돌려 전장을 주시했다. 그리고 보인다.
"다음 백인대를 친다! 내 주위로 모여!"
적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휘관 놈. 백여 기의 기병을 통솔하고 있으니 , 아마도 계급이 기병 연대장이 리라.
결심했다.
'놈을 처치한다.'
기병은 고도로 훈련된 정예군이다. 놈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집단적인 공격력을 발휘한다.
즉, 지휘관이 몹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일반 보병에게도 지휘관 이중요하지만 기병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런 놈들의 지휘관을 처치한다 면.
놈들의 공세를 약화시킬 수 있을 터.
"후우."
숨을 고르며, 지면에 있는 창을 주워들었다. 내가 미리 챙겨왔던 일반 보병창이었다.
그것을 들고 숨을 고른다.
'투창.'
내가 유일하게 적 기병을 타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창을 쥐어 들고,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
온 감각을 끌어올렸다.
집중했다. 눈에 힘을 주었다. 자세를 낮추고,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목표를 노려봤다.
- 띠링!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이 활성화 됩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시야 속, 다수의 기병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놈들이 다가온다. 말발굽이 지면을 밟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녀석들 이 이쪽으로 쇄도해온다.
잠시 후 놈들은 방진에 도달, 창 격을 내지르리라.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노려봤다.
'노리는 것은 적 지휘관.'
가장 선두에 있는 놈이다.
녀석을 죽인다면, 조금이나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심호흡하고는,
"뒈져라!"
악을 내지르며 창을 쏘아 보냈다.
- 부응!
기다란 창대가 파공성을 일으키 며 날아간다. 그것은 이쪽으로 달려 오던 기병을 향해 정확히 날아갔고, 고? 퍼억!
명중했다.
"끄아아아아!"
옆구리에 창이 틀어박힌 기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나자빠졌다. 놈이 낙마해 바닥을 굴렀다.
적 기병 처치. 허나 나는 표정을 구겼다.
"망할. 빗나갔어."
사실 방금 투창은 적 지휘관을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투창이 빗나가 버렸다. 대신 옆에서 있던 다른 기병의 옆구리에 틀어박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일이었다.
"쯧."
나는 혀를 차며 다른 창을 꺼내 들었다.
투창.
이것이 내가 생각해온 방법이었다.
파이크로 둘러싸인 방진 안에서 이쪽으로 접근하는 기병들을 투창 으로 하나둘 처치한다면 더욱 오래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백인장님. 대단하십니다. 이번에 도 투창으로 기병을…."
옆에서 있던 카일이 감탄했다.
나는 녀석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음 적을 노리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그런데 저 전투마. 도망치지 않는군요."
"기수를 잃어서 우왕좌왕하는 거 같은데."
시선을 돌려 병사들이 바라보는 곳을 주시했다.
그곳에는 말하나가 엉거주춤하 게 서 있었다. 공국군 전투마였다.
전투마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천천히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어떤 것을 떠올렸다.
[새로운 행동으로 인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 투창 (입문)]
처음으로 내가 투창을 해봤을 때, 새로운 스킬이 생겼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었다. 게임 속에서 전투에 관련된 행동을 하면 스킬이 생성된다는 것을.
그렇다면.
"기마 스킬. 얻을 수 있지 않을 까."
직감이었다. 투창조차 스킬로 인 정되는데 기마가 스킬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국 기병 놈들은 7번 백인대를 노리고 있다.'
덕분에 이쪽 4번 백인대에는 비교적 놈들의 공세가 미약한 상황.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7번 백인대마저 무너진다면, 방진 밖으로 나 갈 틈조차 없다니.
갈 거면 지금이다.
"카일."
"네! 백인장님."
"네가 잠시 백인대를 지휘해라."
"백인장님?"
카일이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당장 적 기병대를 상대하는 이 와중에 어딜 가냐는 눈빛.
파악!
나는 지면을 박차고 방진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