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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6화 (36/390)

36화.

"자네 4번 백인대는 곧 보충해주 겠네. 3개 백인대 잔병들을 모두 합친다면 4번 백인대를 완편할 수 있을 걸세.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결국 그레드는 4번 백인대에 보병을 충원해줄 테니, 계속해 선도부 대 역할을 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인장 막사에서 나왔다.

"신분이라."

백인장 막사로 걸어가는 와중, 생각한다.

신분이란 뭘까.

지구에서 살 적에 나는 내 스스로 비천한 신분이라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한 걸 탓할지언정 혈통을 탓해본 적은 없었다.

허나 이 세상은 다르다.

이 세상은 명백한 신분제 사회다. 가장 높은 곳에 황제가 있고, 그 아래 귀족이 있으며, 귀족 아래 평민이 있다. 상위 계급을 가진 이들은 하위 계급인 이들을 도구로서 부린다.

"그깟 신분이 뭐라고."

시선을 돌려 군영의 모습을 살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파트라헴 천인대 군영이었다. 그리고 군영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반나절 전 수백의 사람이 적 기 병대에 의해 죽어버렸다. 같은 천인대인지라 나름의 교류가 있던 만큼. 전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 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다른 천인대의군영을 바라봤다.

다른 천인대는 평온했다. 그들은 그저 하루 종일 행군한 피로에 불평하고 있을 뿐, 슬퍼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다.

오직 우리 파트라헴 천인대만 손실을 입었다. 천인장 그레드가 평민 이기에. 상부 귀족들은 우리 파트라 헴 천인대에 모든 손실을 강요했다.

덕분에 다른 천인대들은 아무런 손실 없이, 평온하게 움직였다.

문득 카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 잘난 귀족과 장군 나리들은 일반 평민들을 개만도 못하게 보고 있습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놈들은 평 민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직 도구로서 인식하고 있다.

자신들의 피해를 감수하기 싫어 서, 만만한 평민 지휘관에게 위험부 담을 몰아넣고 있으니 .

역겨운 놈들.

"…가서 쉬자."

나는 터덜터덜 걸어 백인장 막사로 향했다. 내일을 대비해, 피로를 풀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후우…."

적막한 천인장 막사 안. 그곳에서 그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그는 부하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보였다.

평민 출신이기에 받는 핍박과 억 압. 그레드는 평민 출신 사관이었고 그렇기에 위험한 임무를 억지로 떠안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한지훈. 이건 너로서도 기회다. 전공을 세울 기회."

그가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자리해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령서. 파트라헴 천인대는 계속 해 아군 군단을 선도하라는 상부의 명령.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전공을 세우는 데는 위험이 따르지."

그는 손을 뻗어 서류뭉치를 뒤적거렸다. 다름 아닌 병사와 사관들의 인사정보가 담긴 서류들이었다. 그는 그중 한 장의 서류를 뽑아들었다.

그가 뽑아든 것은 한지훈의 인사 서류였다.

"그리고 전공을 착실히 쌓아간다 면, 진급한다."

그의 눈이 한지훈의 인사서류를 훑었다.

한지훈은 분명 애송이었다. 군 경력은 짧았으며 나이 또한 어리다. 하지만 그의 인사서류에는 그럴듯 한 전공이 다수 기재되어있었다.

척후병으로서 공국의 전면전 의도를 읽어내었다.

침공로의 중요 거점을 장악, 사 수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지훈은 단신으로 적 증강백인 대를 지연시켰다.

아마 훈장까지 수여된다면 이 인사서류에 또다시 그의 공훈이 기록 되리라.

"어서 성장해라. 한지훈."

그레드는 아직도 바라고 있다.

한지훈이 성장해 높은 자리에 도 달하기를. 그리하여 평민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말이다.

한지훈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전성기의 그레드를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니 .

평민 출신인 고위 군관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이는 것. 그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그는 우묵한 눈으로 한지훈의 인사서류를 바라봤다.

다음날 4번 백인대가 충원되었다. 내가 그들을 받아들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십인장을 뽑는 것이었다.

"자네. 1번 백인대에서 십인장이 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백인장님!"

"그럼 우리 5번 전투조 조장을 맡아라. 저번 전투 때 팔이 잘려서 불구가 되어버렸거든."

"명령을 받듭니다!"

1번에서 3번 백인대의 생존자들은 고스란히 4번 백인대에 흡수되었다. 나름대로 생존한 이들이 많은 것일까.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니 4번 백인대의 총원은 150여 명이 되었다.

"백인장님. 이 정도면 일반적인 백인대보다 훨씬 큰 규모군요."

"그래. 증강백인대 규모지."

본래 백인대는 112명이다. 각 조에 십인장과 병사를 포함 열한 명, 조 10개가 뭉쳐 110명. 지휘관격인 부관과 백인장을 포함하면 112명. 이것이 제국군 백인대 정식 편제였다.

하지만 지금 4번 백인대의 전력 은 무려 150여 명. 일반적인 백인대의 규모를 명백히 상회했다. 이 정도라면 증강백인대 급이었다.

"전투조 애들 중 창병 비율이 어떻게 되지?"

"대략 절반 정도가 창병입니다."

"좋아. 그럼 숫자 맞춰서 파이크 장창 지급 요청해. 일반 창으로는 기병에게 대항할 수 없다."

"이번에도 보급관이 거절하면 어떻게 합니까?"

더해 나는 보급대에게 파이크 보 급을 요청했다. 다음에도 기병이 출 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비해 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병사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파이크를 지급 안 해 준다면, 내가 직접 가서 보급관새끼 를 죽여버리겠다고 전해."

"… 알겠습니다."

"만약 그래도 거절한다면 이 말 도 함께 전해. 내가 부하 절반을 잃어서 눈깔이 돌아갔기 때문에 정말 보급관이고 뭐고 쳐 죽여버릴 것 같다고. 그러면 어련히 승낙하겠지."

저번 전투 전, 나는 보급부대에 게 파이크 장창 지급을 요청했었다. 당연히 기병대에게 습격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보급관이 거절했었다. 산 악지형이기 때문에 기병이 나타날 확률이 적다는 것이 그이유였다.

덕분에 아군 4개 백인대는 적 기 병대에게 아주 쉽게 갈려버렸다.

"염병할 보급관 새끼."

보급장은 천인장 계급이었지만, 보급관은 백인장 계급이다. 일단은 같은 계급. 그렇기에 나는 병사를 시켜 보급관을 협박케했다.

나중에 문제시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저번처럼 커다란 피해를 입는 것은 사양이다.

물론 녀석은 일단 귀족 계급이긴 했지만 알게 뭔가.

"백인장님. 이번에도 저희가 선도 정찰대 배치입니까?"

한 십인장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영광스럽게도 말이다."

"망할."

"선두는 이제 싫습니다."

병사들이 칭얼거렸다. 하긴, 군단 선도부대 자리에서 적 기병대에게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일단 적이 기병을 운용하 기 시작한 이상, 언제 다시 또 다른 기병을 운용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에 한탄을 내쉬는 병사들 이었다.

"선도부대는 그냥 고기방패 아닙 니까? 적 병력이랑 마주치고, 일단 얻어맞고, 후열에 보고하는 역할 말 입니다."

"맞다. 그래서 아주 개 같은 자리지."

나는 이를 갈았다.

고기방패 짓거리를 더 해야 한다 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백인장님. 그럼 이번 선도부대는 몇이나 갑니까? 1번부터 3번 백인대가 무너졌는데 . 설마 저희 4번 백인대만 단독으로 선도합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군 참모 부가 그 정도로 생각 없진 않아."

"그렇다면…."

"5번, 6번, 7번, 8번 백인대가 함께한다."

1번부터 3번 백인대는 이제 없는 상황. 대신해 5번부터 8번 백인대 가 함께 선도 역할을 하기로했다.

그에 병사들이 표정을 찌푸렸다.

"백인장님. 그럼 이번에도 저희 파트라헴 천인대만 선도부대 역할을 맡는 겁니까?"

"… 그래."

"이상합니다. 아무리 저희 천인대 가 인근 지리에 익숙하다 해도 손실이 이토록 큰데 계속 선도 역할을 맡는다니요. 다른 천인대는 어째서 선도부대를 맡지 않는 겁니까?"

"으음…."

나는 병사에게 무어라 대답을 해 주려다 그만뒀다. 천인장 그레드가 평민이기에 우리가 피해 입는다는 사실을 알려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상부에서는 그렇게 결정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상부 결정이라는, 전형적인 변명 밖에 없었다.

"선도부대 역할이 고되고 힘들겠 지만 조금만 참아라. 포트 갈레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간다면, 이 지랄 맞은 고기방패 짓 도 안 하게 되겠지."

나는 병사들을 다독였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배치는 역시나 선도 정찰대. 진군중인 아군 본대보다 훨씬 앞에 진출해있다.

침공로를 따라 계속해 걸었다. 나는 주위에 도열해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파이크를 지급 해줬군. 다행이야."

"그렇게 보급관을 협박했으니 , 당연히 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혼잣말에 옆에 있던 카일이 답했다.

지금 내 휘하 창병들은 모조리 기다란 창-파이크 장창-을 장비하고 있었다. 평소에 사용하던 2.5m 언저리인 보급창에 비해 훨씬 긴, 무려 5m에 달하는 길이였다.

이것이 있다면 적 기병에게 대항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저리 기다란 장창을 든다면, 대인전투력은 오히려 하락할 것 같습니다만."

카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파이크는 보급창에 비해 보다 긴 리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다루기 힘들었다. 아마 기병이 아닌 일반 병사가 상대라면 오히려 더 불리할 터.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저번처럼 기병에게 갈 려나갈 수는 없잖냐. 대 보병 전투력 하락은 감수해야지."

"하긴, 그렇지요. 다시 기병 놈들에게 갈려나가는 건 사양입니다."

저번 전투로 기병의 위력을 절절 히 체감했다.

기병은 전장의 악몽이다. 놈들은 먼 거리서부터 달려와 강력한 충격을 투사하고, 진형을 무너뜨리며, 기병창의 리치와 말의 높이를 살려 일반 보병을 도륙한다.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말이다.

때문에 대 보병 전투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파이크를 장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해 나는 알고 있다.

'적은 보병이 없다.'

이곳 침공로에서 조우하는 적은 무조건 기병이다. 적인 공국 1군단 의 보병은 모두 요새의 방어에 전 념하고 있다.

그 말인 즉, 행군 중에는 오직 기병만 신경 쓰면 된다는 소리.

"… 좋아. 모두 경계태세 확실히 하고, 전진하자."

5개 백인대. 제국군 5백 명이 침공로를 따라 북진했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기병새끼들을 찢어 죽인다."

이번에도 기병을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모든 능력을 살려 녀석들을 죽여버릴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아군이 진군한다.

"연대장님. 보고드립니다."

공국군 기병 중 하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에 나무 그루터기에 멍하니 앉아있던 한 중년 남성이 반응했다.

"부관인가. 무슨 일이지?"

"침공로를 따라 진군하는 제국 놈들을 발견했습니다. 보병대입니다."

"드디어 왔군."

남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갑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그의 갑옷 가슴팍에는 계급장이, 그것도 기병부대 연대장 계급장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철컥. 남성이 허리춤에 장검을 패용하며 물었다.

"제국 선발부대인가. 수는?"

"백인대 다섯 개. 약 오백여 명 입니다."

"오백이 라."

그는 피로가 그득한 얼굴로 나직 이 읊조렸다.

"제국 놈들. 어제 그렇게 당해놓 고기어이 몰려오는군. 녀석들에겐 학습 효과란 게 없는 모양이야."

중년인의 이름은 클락. 무려 백 여 명의 기병들을 통솔하는 , 공국 기병연대의 수장인 이었다.

그가 투구를 뒤집어쓰며 씩 웃었다.

"좋아. 가자. 이번에도 선발대 놈 들을 괴롭혀 주자고."

다시금 공국 기병부대가 제국군을 급습한다.

백여 명의 기병이 한지훈과 그의 동료들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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