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기병 하나가 이쪽으로 돌진해온다. 나는 심호흡하고는, 자세를 고 쳐 잡았다.
허리를 낮춰 무게중심을 아래로했다. 오른손으로는 창을 쥐고, 왼손으로는 간격을 쟀다.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 띠링!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이 활성화 됩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활성화되고, 시야가 천천히 흘러감과 동시. 머릿속에 정리된 지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투창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놈들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왔을 때 얼마나 많은 힘을 들여 창을 날려야 하는지?
새로이 습득한 스킬 '투창'의 보정이었다.
긴장에 침을 삼켰다.
"후우."
뜨거운 숨을 내뱉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추슬렀다.
기병이 다가온다.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다. 놈이 가까이 다가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하하하!"
광소를 내뱉으며 달려오는 기병.
무력한 보병들을 일방적으로 죽 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저 싸이코새끼.
"죽어라!"
충분히 접근한 놈이 기병창을 이쪽으로 들이밀었다. 녀석의 얼굴표 정,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감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지금이다.
종아리부터 허벅지, 허리와 등, 그리고 어깨와 팔뚝에 이르기까지. 전신의 근육을 모조리 활용해 손에 쥐인 창을 날려보냈다.
- 후웅!
묵직한 파공성이 울림과 함께, 창대가 내 손을 떠나 적 기병에게 로 날아간다.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놈의 표정 이 일순 굳었다.
직후.
- 퍼억!
"끄아아아아!"
기병의 옆구리에 창이 틀어박혔다.
녀석은 비명을 내지르며 말 위에서 휘청이더니, 말에서 떨어져내려 바닥을 굴렀다.
나는 달려가 녀석의 모가지에 검을 쑤셔 박았다.
"크억, 컥, 끄륵…."
녀석이 피거품을 내뱉으며 절명했다.
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되네."
투창. 해본 적은 없다. 그저 내 직감과 전투분석의 도움을 받아 처음 시도해본 일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것일까. 단 한번의 투창 공격으로 기병을 처 치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시야 구석에 떠올라있는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새로운 행동으로 인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 투창 (입문)]
새로운 스킬이 개안했다고 한다.
홀로그램을 꺼트리고는, 내 손바닥을 바라봤다. 방금 전투창에 의 해 쓸린 것일까. 벌겋게 부어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운 무기를 쓰면 스킬이 생 성되는 건가.' 처음 안 사실이다.
그동안 오직 장검만을 사용했기에 깨닫는 것이 늦었다.
"백인장님! 조심하십시오!"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
두두두두두.
다른 기병 둘이 이쪽으로 쇄도해 왔다. 이번에도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이를 악물고 바닥을 굴렀다.
- 콰가가가각!
기병창 두 개가 동시에 내가 서 있던 지면을 홅고 지나간다.
간신히 피해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달려 방진으로 복귀했다.
"맙소사! 백인장님, 저기서 살아 돌아오신 겁니까?"
"괜히 거점 방어전에서 살아 돌아오셨던 게 아니군요."
병사들의 놀란 눈빛. 하기야 방금 나는 놈들의 기병돌격을 몇 차례나 회피했고, 오히려 투창으로 기 병 하나를 처치하기까지했다.
허나 내 심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 하마터면 정말 뒈질 뻔했어."
손을 등 뒤로 가져다 대 더듬었다. 내 등짝에는 놈들의 기병창에 긁혀 생긴 기다란 자상이 아로새겨 져 있다.
아릿한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올라 왔다.
얕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깊었다면, 놈들의 창날이 내 등 근육을 헤집고 척추를 부숴버렸을 터이니.
"그나저나.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아군의 상태를 살폈다.
다른 백인대는 모조리 부서졌다.
그들은 소수의 생존자만이 살아남 아 도주하고 있으며, 몇몇 공국 기 병이 추격해 하나하나 죽여버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선발대 중 살아남은 것은 우리 4번 백인대가 유일.
공국 기병대다수가 이쪽을 공략 하고 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그때.
"무얼 꾸물거리는 거냐!"
어디선가 묵직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소음이 들린 곳을 바라봤다.
적 기병연대의 지휘관일까. 기병들 중에서 유독 화려한 장식을 지닌 이가 보였다.
"남은 것은 적 백인대 하나에 불과하다!"
그가 창을 드높이 치켜들었다.
"일제 돌격 준비해! 단번에 쳐부 숴 버린다."
두두두두!
생존자들을 사냥하던 적 기병들 이 단숨에 방향을 반전, 저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 기병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저희를 포기한 겁니까? 갑자기 후퇴하는 것 같습니다만."
병사들의 희망 어린 관측.
"그럴 리가."
그에 나는 부정했다.
"방금 적 기병중대장이 말했지. 일제 돌격을 준비한다고."
후욱.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온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놈들은 일단 후방으로 퇴각.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돌진해올 것이다. 가속력을 살려 동시에 말이야."
"그 말씀은."
"지금 남아있는 적 기병 팔십여 기가, 단숨에 이쪽을 두드릴 거라고."
주위 병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 셨다.
지금 남아있는 내 백인대원들은 거의 절반이 죽어나갔다. 헌데 무려 80에 달하는 기병들이 동시에 몰아 쳐온다면.
"우린 엿 된 거지."
나는 검을 수납하고, 바닥에 떨 어져 있는 창을 꼬나 쥐었다. 역시 나 핏물과 흙먼지가 엉켜 질척했다.
창을 써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장검보단 나았다. 적어도 창은 투창공격이라도 가할 수 있으니 .
병사들이 믿기 힘들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대로 죽을 순 없습니다. 정 녕… 살아날 방책이…."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기병 80기를 반파된 백인대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여기 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은 일.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 최대한 버텨라. 지원군이을 거다."
전령이 뒤로 적 기병대의 출현을 보고하러 갔다. 곧 지원군이 올 것 이다.
"우리가 무너지기 전에 지원군이 온다면."
그렇다면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 두두두두두!
저 멀리, 적 기병 80여 기가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주겠다는 것 일까. 놈들의 가속력이 심상치 않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끝인가.'
놈들의 기병돌격이 점차 가까워 진다.
무려 80의 기병이다. 놈들이 우리 방진에 도달한다면 이쪽은 단숨에 갈려나가리라.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른 듯 싶었다.
- 두두두두두!
아군의 배후에서도 말발굽 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기병대! 약 이백여 기!"
"제기랄. 공국 놈들이 앞뒤로 포 위한 겁니까?"
"이런 개 같은…."
병사들이 절망했다. 당장 앞에 보이는 적 기병을 막는 것도 버거 운데 후방에서도 기병이 등장하다 니. 앞뒤로 갈려나가는 꼴이 눈앞에 생생하리라.
허나 나는 웃었다.
"아니. 잘 봐라. 뒤의 기병은 적 이 아니다."
내 말에 병사들이 고개를 돌려, 뒤를 주시한다.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났다.
"3군단 기병대다."
뒤에서 달려오는 기병대의 기수 가 들고 있는 깃발은, 분명 제국군 깃발이었다.
드디어 배후에서 반격을 보낸 것 이다.
"아군 지원군이다!"
"살았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나는 앞을 바라봤다.
이쪽으로 쇄도해오던 적 기병들. 그들은 우리 배후에서 등장한 기병대를 발견한 것일까. 기수를 재차 반전, 뒤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동감입니다."
전멸하기 전, 겨우겨우 지원군이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봤다.
아군 기병대가 우리를 스쳐지나 가 적 공국 기병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고생이 많았다. 한지훈 백인장."
전투가 끝난 뒤. 나는 본대로 복 귀, 그레드 천인장을 만났다.
그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해왔다.
"하필이면 적 기병대를 만나다니. 운도 없구만."
"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레드의 말이 불쾌해서가 아닌, 등에서 아릿 한 통각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레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자네는 그나마 살아남아 서다행이다. 자네 4번 백인대를 제외한 1, 2, 3번대 백인장들은 모두 전사했어."
그가 서류를 꺼내들어 내게 보여 줬다. 이번 전투가 요약된 보고서였다.
나는 그것을 받아 훑어보고는 중얼거렸다.
"정말 호되게 당했군요."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완패였다.
아군 선도부대 4백여 명 중 과반 수가 전사. 1번, 2번, 3번 백인대 백인장 전사. 중경상자 다수.
반면 적병은 고작 스무 명밖에 전사하지 않았다.
"한지훈. 자네 부대 또한 가까스 로 살아남긴 했지만 손실이 막대하 군."
"그렇습니다. 절반이나 갈려나갔 으니 ."
우리 4번 백인대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정원 /백 명 중 오십여 명이 죽 거나, 중상을 입었다. 신병들은 아주 소수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갈려 나갔으며, 베테랑 병사들 또한 꽤 많은 수가 전사했다.
심각한 손실이다.
"천인장님. 저희 부대는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합니다. 고작 오십에 불과한데 백인대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지."
"그렇다면 이제 저희 4번 백인대는 어떡합니까? 후방으로 빠집니까?"
내 질문에, 그레드가 한숨을 내 쉬며 답했다.
"확실히, 자네 4번 백인대는 더 이상 작전행동이 불가능하다. 본래 라면 후방으로 이송, 재편성 후 전장에 복귀해야 하지."
"그렇다면…."
"하지만."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전장이다. 지금 당장 후송은 여의치 않다."
나는 침묵했다.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기에.
"더해 우리 파트라헴 천인대가 이곳 침공로의 지리를 가장 잘 알 고 있다. 우리는 길 안내를 해야 해. 본대가 안전하게 포트 갈레이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후송할 수 없다는 말.
나는 잠시 침묵하곤, 그레드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는 참담함이 가득하다.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귀족 놈들이 개수작을 부렸군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한지훈?"
"4개 백인대가 갈려나갔습니다. 파트라헴 천인대 천 명의 병력 중 40퍼센트가 손실된 것이란 말입니다. 헌데 계속해 작전에 투입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게임에서 겪었던 일이다.
파트라헴 천인대의 대규모 손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우리 천인대는 계속해 선봉을 맡아 전진한다.
어째서일까. 본래라면 후방으로 퇴각 후 재편해야 할 터인데.
게임으로 접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이상한 세상 속에 들어온 지금의 나는, 그이유를 알 게 되었다.
"귀족들이 파트라헴 천인대를 압 박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계속해 고기방패가 되도록. 아닙니까?"
"… 어떻게 알았나."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비정상 적인 소모에도 진군하라는 합당하지 않은 명령. 그리고 천인장님의 출신. 거기에 천인장님의 그분하다는 표정까지."
과거, 그레드는 나에게 말했었다. 자신이 평민이기에 전공이 평가절하 되었다고.
평민 출신 장교. 대부분이 귀족 으로 이루어진 군 지휘부에서 좋게 볼 리 없다.
"지금 천인장님께선 전투를 강요 당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소모가 계속되어도, 후퇴할 수 없도록 말입 니다."
그레드는 모두가 기피하는 선두 자리에 병력을 투입했다.
당연히 자의일 리 없다.
그가 평민 출신이기에 맡은 위험 한자리.
"…예리하군."
피식. 그레드가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분 좋아서 지은 미소 가 아닌, 체념의 빛이 어린 미소였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자조적으로 말해왔다.
"맞다. 한지훈. 이게 바로 평민 출신 사관의 한계다."
평민 출신 사관의 한계.
분명 그레드는 그리 말했다.
"나 또한 천인대의 손실이 크니, 군단 회의에서 후방배치를 요청했다. 허나 군단 참모와 천인장들은 하나같이 반대의견을 보이더군.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게 우리 천인대 이니, 천인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어 도 계속해 선도 정찰대 자리를 지켜야 한다나."
그의 인자하면서도 중후한 얼굴 에는, 흐릿하게나마 분노의 기색이 떠올라있다.
"위험한 일은 절대 맡기 싫다는 거다. 내가 평민 출신이라고, 모두 합당해서 이쪽에 위험한 일을 떠넘 기는 거지."
그레드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을 보더니, 곧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안타까움의 감정이 그득했다.
"자네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상관인 내가 평민 출신이라, 위험한 임무만 맡는군."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