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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2화 (32/390)

32화.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레드를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눈가는 참참히 가라 앉아, 진중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한지훈. 백인장부터는 사관의 영역이다. 즉, 장교라는 말이지. 그리고 장교는 일반 병사들은 모르는 중요 정보를 지니고 다닌다. 그런 사관이 적에게 사로잡힌다면…."

"아군의 중요 정보가 빠져나가겠 군요."

즉, 적에게 사로잡힐 것 같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정보누출을 막기 위해 생포당하 기 전자결하라니. 처음 듣는 소리 입니다. 거짓말 아닙니까?"

나는 평민 출신이지만 대부분, 아니 절대 다수의 제국 사관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다. 아무리 제국이 라 한들 귀족에게 자결을 강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레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겼다.

피식. 그레드가 웃었다.

"들켰군. 그래, 거짓말이다."

그럼 그렇지.

"사실 이 단검은 네 신분을 증명 할 때 쓰는 증표다. 여기 보면 단검에 네 백인장 계급과 이름이 각 인되어 있지."

"표정이 너무 진지하셔서 하마터 면 진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저 농담인 것은 아니다."

그레드가 보다 진중해진 얼굴로 고한다.

"만약 사로잡힌다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거다."

"고문 말입니까?"

"맞다. 고문. 어찌 보면 잡혀서 고통받다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죽 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고문이라.

상상하기 싫다.

"자네도 알다시피, 주변국들은 제국을 증오하니 말이다. 그 망할 놈 의 정복 전쟁 덕분이지. 사로잡히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새겨두겠습니다."

나는 단검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하긴, 제국과 국경을 접한 국가 들은 모두 제국을 증오했다. 그들 대다수가 영토를 빼앗겨왔기 때문. 정복 전쟁으로 제국은 영토를 확장 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적대적인 국가를 많이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제국군 장교가 생포 당한다면, 아마도 그 처우는 꽤나 혹독할 터.

"물론 사로잡히지 않는 게 제일 최선이겠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포로로 잡히는 것만은 절대 피해야해.'

나 또한 게임 속에서 포로수용소 를 본 적이 있다. 덕분에 적국이 포로를 어찌 다루는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아마 그레드 또한 포로수용소를 본 적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 면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터이니.

"그럼, 당당한 제국의 정식 사관 이 된 걸 축하한다. 한지훈. 여기다음 임무다."

덜컹. 그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며 어떤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다음 작전의 지령서였다.

"바로 내일 아침, 아군주력이 공국군 영토로 진격할 것이다. 그리고 자네의 4번 백인대는 선도 정찰대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표정을 구겼다.

선도 정찰대라니.

"어째서 하필 저희 부대가 선도 정찰대 입니까?"

"자네가 침공로 지리를 잘 알지 않나? 십인장 시절부터 계속 들락날락 했으니 말이다. 유능한 길잡이 를 안 써먹을 순 없지."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럼, 내일 진격에 대비해 잘 쉬어두게. 개인 정비도 제대로 해놓 고 말이야."

그레드는 그 말은 남기고는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집무실 안, 나는 나직 이 읊조렸다.

"위험한데."

나는 이번 진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 때문에 안전한 대열의 중간이 되길 바라마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바램 은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선도 정찰대라니."

선도 정찰대. 군단보다 한 발자국 앞서 진로를 개척하고 아군을 선도하는 가장 앞선 자리.

다른 이들에겐 가장 먼저 적 영토를 밟는 영예로운 자리였지만, 나 에게는 위험천만한 자리에 불과했다.

쯧 혀를 찼다.

"망할. 이번에도 힘들겠어."

나는 다음 임무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서브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포트 갈레이까지 아군을 선도하라.]

이제 움직일 때다.

"좋아. 모두 주목."

그날 저녁. 나는 각 조의 십인장 들을 백인장 막사로 불러 모았다. 작전 브리핑을 하기 위함이었다.

천천히, 내 주위에 도열해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1번 척후조장 카일, 2번 척후조 장 에시, 3번 전투조장 브리든, 4번 전투조장 라이들렘… 열 명의 십인 장들이 또렷한 눈으로 나를 주시한다.

녀석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에는 평소와 다른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존경과 경외.

저들은 나를 깊이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긴. 이번에 좀 활약하긴 했지.'

내가 거점지역에서 세운 전공은 꽤 대단한 것이었다. 혼자서 목숨 걸고 적 백인대 병력을 유인했고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

말 그대로 훈장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저들에게 존경스 러운 상관으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 한 일. 그에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존경의 감정이 서려있다.

나쁜 일은 아니다. 저들이 나를 존경하는 만큼, 내 입지가 확고해 질 터이니.

나는 그들을 잠시 둘러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진군이다. 이제 우리 제국군은, 공국 영토로 진격한다."

병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에 들린 지휘봉으로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짚었다. 다름 아닌 침공로였다.

"어제의 마법 공격으로 공국 침공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더해 놈들의 후속대 또한 보이지 않는 상황. 공국 놈들의 침공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확실히 마법사들의 화력은 대단했다. 고작 백이 안 되는 전투마법사들이 발현한 합동마법은 만 단위 의 군세를 유린했고, 통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침공로가 깔끔하게 정리 된 상황.

"우리 북부 3군단은 침공로를 따 라 이동, 공국령에 발을 들여놓을 거다."

공국 침공.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다. 그것도 방어가 아닌, 공격측으로.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침공군의 가장 선두자리, 군단 선도 정찰대에…"

나는 말을 끊고는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우리가 서게 되었다. 군단의 앞에서 아군 후열을 선도하는 거다. 정말 기쁘지 않나?"

"선두라니요!"

"오… 맙소사."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점에서 죽어라 싸웠는데 선도 정찰대 배치 라니요. 너무합니다."

십인장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하긴, 군단 대열의 제일 앞 선도 정 찰이라니. 가장 위험한 자리다.

선도부대를 비유하자면 고기방패다. 아군 본대보다 훨신 앞에서 병력을 선도하며 위험요소를 탐색한다.

본대와 떨어져 한발 앞서 진군하 니 매복과 적의 습격에 취약. 전투 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꺼려지는 건 당연한 일.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침공로를 매일 밥 먹듯이 돌아다닌 덕분에 길잡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빌어 처 먹을."

나도 가급적 선봉을 서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명령은 하달되었고, 군인인 이상 명령은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카일이 물었다.

"백인장님. 그래도 군단 규모의 진군입니다. 저희들만 선도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나마 다행히도 우리만 앞서진 않는다."

지휘봉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이었다.

"파트라헴 예하 1번, 2번, 3번, 그리고 우리 4번 백인대. 이렇게 4개 백인대가 군단을 선도한다."

"4개 백인대라… 다른 지원은 없습니까?"

"군단 기병대 측에서 전령 역할 기병을 몇 붙여주기로했다. 물론 전력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오직 연락용으로만 쓰일 것이니."

기병 몇 기를 받았지만, 전령 역할이다. 기껏해야 몇 기에 불과한 수. 아마 제대로 된 전력으로는 기대할 수 없으리라.

"아침 동틀 무렵부터 바로 출발 이다. 그럼 모두 푹 쉬어라. 내일 부터는 계속 행군할 테니까."

나는 그리 말하고는 브리핑을 끝 냈다.

곧 제국군이 공국령으로 진격을 시작한다.

요한바르첸 공국 왕궁의 알현실. 그 화려하고도 넓은 공간에는 단 한 명의 인영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왕 해임스 요한바르첸. 그는 알현실에 옥좌에 앉아 수정구에 대 고 대화하고 있었다.

- 면목 없습니다. 공작 각하.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퍽 중후했다. 하지만 중후함 이상으로, 죄책감과 슬픔이 스며있는 목소리기도했다.

제국을 침공해간 공국측 선발대. 침공군 제 1군단 사령관, 페라다 루고 후작.

그는 공작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대패입니다. 2만의 병사 중 1만 5천을 잃었습니다.

공국 제 1군단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들은 2만을 상회하는 군 세 중 과반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명백한 대패. 허나 공작은 차마 후작을 나무랄 수 없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라니.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너무 자책하지 말게."

공작 또한 가망 없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그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만약 라브리에 전투단이 나설 것임을 알았다면. 카렌 왕국에서 더 많은 마법사를 지원받았어야했다.'

라브리에 전투단 상태로 고작 백 명의 마법사는 너무 부족한 전력이었다. 그들은 괴물, 정복 전쟁 시기 수많은 국가를 파괴한 전장의 지배자들이다.

아무리 카렌 왕국의 마법전력이 우수하다 한들, 라브리에 전투단의 상대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공작이 페라다 후작에게 물었다.

"포트 갈레이까지 후퇴했다 들었다. 현상황을 보고하도록."

- 병력을 정비해 방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포트 갈레이 수비군을 합쳐 병사 육천, 기병 천, 기사는 약 이백이 남아있습니다.

"마법전력은?"

- …마법전력은 전무합니다. 저희에겐 마법사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공국 침공군의 마법전력은 전멸 해버렸다. 주력을 살리기 위해 방어 마법을 한계까지 운용하며 마지막 까지 버텼기 때문이다.

그들 마법사들의 분투가 없었더 라면. 나머지 병력조차 살아남지 못 했을 것이리라.

"확실히 놈들의 공세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군. 특히 마법전력이 없는 것이 큰 문제야."

-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증원이 필요합니다.

후작의 증원 요청. 그에 공작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이미 제 2군단과 3군단을 보냈다. 마법사 또한 카렌 왕국과 협상 해 더 증원해보지. 마법사들은 초장 거리 도약 마법으로 금방 도착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포트 갈레이를 사수하라. 포트 갈레이는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만든 견고한 요새. 그곳이 무너진다 면 뒤로는 평야지대뿐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니."

- 명심하겠습니다.

수정구 속 후작의 모습이 사라지고, 은은하게 일렁이던 마나광이 가 라앉았다.

수정구 통신을 종료한 후. 공작 이 나직이 읊조렸다.

"제국이라."

사실, 후작은 제국의 국력을 다소 과소평가한 감이 있었다.

공국은 작은 약소국이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무장과 훈련 정도 또한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단 단위의 군대를, 고작 단 한번의 회전으로 쓸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국은 아주 최소한의 피해만 입으며 말이다.

"과연 대단한 놈들이군. 정복 전쟁 당시 제국 놈들의 위명은 헛것 이 아니었다."

공국 제 1군단의 파멸. 비록 몇 천의 병력이 살아남아 포트 갈레이 로 후퇴했다 하나 그럼에도 커다란 손실이었다.

1만 5천의 병사, 1천의 기병, 3백의 기사. 단 한번의 전투로 잃은 병력이었다.

너무나 치명적인 손실.

허나 그럼에도 공작의 얼굴에는, 아직도 여유가 남아있었다.

"이제 슬슬 동맹이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 아직인가…."

사실, 공국이 움직인 것은 전혀 무모한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적은 오직 공국뿐만이 아니었다. 곧 공작과 비밀동맹을 맺은 다른 국가들 또한, 하나둘 제국에 선전포고 하리라.

"제국 본토를 유린할 날이 기대 되는군."

공국이 제국을 침공한 것. 그것 은 단순히 제국의 이목을 집중시키 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아직 제국은 모르고 있다. 그들을 노리는 국가는 요한바르첸 공국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헤임스 공작이 질척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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