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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31화 (31/390)

31화.

우리 4번 백인대는 거점방어 임무를 완수했고, 마법사들은 공국 침공군을 성공적으로 퇴각시켰다. 덕분에 이후 며칠 동안은 평화로웠다.

모처럼 얻은 짤막한 여유.

그에 나는 평소의 훈련을 재개했다.

- 파앙!

번뜩이는 검광. 터져 나오는 파 공성. 깔끔한 검로가 그어지며 검날 이 공기를 갈랐다.

땀방울을 흘리며 계속해 검격을 내질렀다.

수직 베기, 수평 베기, 사선 베 기, 찌르기. 기억 속에 있는 여러 검술 동작을 수행했다.

그러자 체감할 수 있었다.

'확실히. 성장했다.'

나는 강해졌다. 가진 능력치는 초창기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섰으 며, 이제는 평범한 병사들은 결코 나를 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는.

"모자라."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능력치를 확인해 보았다.

[근력 14]

[민첩 53]

[내구 15]

[체력 2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25pt 입니다.)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치였다. 그야말로 일반 병사들 따위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는 능력치.

하지만 나는 내 능력치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마법사."

시선을 돌려 북쪽 방향, 침공로 가 펼쳐져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였다.

저 멀리, 불에 타 완전히 잿더미 로 변한 침공로.

벌써 며칠이 지난 상태이기에 불 길은 완전히 사라져 있지만, 아직도 매캐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 고 있다.

얼마 전 마법사들의 힘을 보았다.

고작 오십에 불과한 인간들이 펼 친 이능의 힘.

마법. 그들은 광역공격마법을 사용해 적 군단을 타격했고, 2만의 군대를 말 그대로 와해시켜버렸다.

그 강력한 무위에 비해 일개 병사인 내 무력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괴물들이구만."

나는 강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 까지나 '평범한' 병사 중에선 강하다는 이야기다.

마나 유저들을 대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법을 발현하는 마법사. 오러를 끌어올리는 기사. 그들은 마나를 다 뤄 이능을 발현하거나 자신의 신체 를 강화시킨다.

그리고 마나를 다룰 수 없는 나는 그들에게 결코 대적할 수 없다.

다시금 능력치를, 그중에서도 마나 능력치를 확인했다.

[마나 0]

당연하겠지만, 나에겐 마나 따윈 쥐뿔도 없다.

여태껏 포인트를 투자한 적 없기 에.

"이제 슬슬 마나를 올려야 할 텐 데."

다른 능력치는 전투에 충분할 정도로 키워 올렸다. 이제 일반병 따 위에게는 절대 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기사 혹은 마법사를 적으로서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무력하게 죽어버릴 것이다.

마나 유저를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마나 유저들뿐이다. 그 말인 즉, 이제부터는 나 또한 마나 유저가 되기 위해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소리.

물론 방법은 있다.

"제국 중급 검술 상향."

제국 중급 검술은 마나 유저인 기사들이 수련하는 검술이다. 그 말 인 즉, 마나와 포인트를 모아 중급 검술을 개화한다면, 나 또한 기사들 처럼 강대한 무력을 지닐 수 있다는 소리.

허나 아직은 까마득한 이야기이다.

- 띠링!

['스킬 : 제국 검술(하급)'을 상향 합니다.]

[상향에는 50pt가 필요합니다.]

[상향에는 '능력치 : 마나'가 50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포인트가 모자랍니다.]

[요구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상향할 수 없습니다.]

"… 쯧."

역시나 포인트가 문제다.

지금 내 마나는 0. 이걸 50까지 키워야 한다. 더해 중급 검술로 상향시키기 위해서는 50pt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 말인 즉, 오러 유저가 되기 위해서는 무려 100pt에 달하는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소리.

하기야 다름 아닌 기사급 무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리라.

"포인트를 모아야 하는데 . 매번 전투 때마다 포인트를 사용해야 버 틸 수 있으니… 도무지 모이지 않는군."

나는 그리 읊조리며 한탄했다.

지독한 딜레마다.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격렬한 전투에서 버틸 수 없다. 그렇다고 포인트를 사용하며 퀘스트를 진행하자니 도무지 모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오러를 각성하는 데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소모될 것 이다.

내가 그리고심하고 있는 그때였다.

"백인장님."

저벅. 누군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시선을 돌려 살펴보니, 4번 전투 조장 라이들렘이었다. 녀석은 척 경 례하더니, 내게 다가오며 고했다.

"파트라헴에서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명령이라. 뭐지?"

"이 시간부로 거점에서 캠프를 철수, 파트라헴 전진기지로 복귀하 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격인가."

시나리오 대로 제국은 곧 공국으로 진격할 것이다.

앞으로 공국령을 향해 북진하리라.

"좋아. 캠프 해체해. 바로 파트라 헴으로 이동한다."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거점지역에서 철수했다.

파트라헴에 도착하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파트라헴입니까?"

"… 규모가 상당히 커졌습니다만."

파트라헴 전진기지의 모습은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파트라헴 의 크기는 몹시 방대해져 있었다. 기지를 통과하듯 기다란 도로가 나 있었으며, 성벽과 시설 또한 완전히 건설되어 있었다.

군사기지라기보다는 하나의 도시 처럼 변한 모습.

하지만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파 트라헴의 커다래진 모습이 아닌, 그곳의 안에 있는 병력의 수였다.

"북진 준비를 모두 마쳤나본데."

파트라헴 전진기지 안에는 수많 은 병력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군단 규모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수의 병사들. 나는 건물 위에 올라와있는 깃발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북부 제 3군단, 그리고 볼로냐 전투기사단인가."

파트라헴 기지 곳곳에 꽂혀있는 깃발들이 눈에 익었다.

북부 제 3군단과 볼로냐 전투기 사단의 군기들. 분명 이번에 공국으로 쳐들어갈 병력이리라.

카일이 허탈한 듯 웃었다.

"정말 사람이 바글바글 하군요. 저들과 함께 공국으로 쳐들어가는 겁니까?"

"든든하군요. 군단 규모의 아군이 라…."

군단 규모의 인원에 내심 질린 듯한 병사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게 끝이 아닐 거다."

"끝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뜻 이십니까?"

"저기, 3군단과 볼로냐 기사단은 선봉에 불과하다. 우리가 공국군 영토까지 제대로 파고든다면 더 많은 병력이 파병되겠지."

제국의 목적은 무력시위가 아닌, 공국의 멸망과 합병이다. 황제는 더 많은 병력을 추가로 증원해 공국을 완전히 집어 삼키리라.

"자, 그럼 너희들은 막사로 가 쉬어라. 나는 천인장님께 보고하겠다."

"명령을 받듭니다."

척. 카일과 병사들이 경례하고는 막사 방향으로 갔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천인대 지휘 소로 향했다.

"오랜만이군, 한지훈 백인장. 한 일주일 만인가?"

천인대 지휘소로 가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천인장 그레드. 그가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에 꽤 대단한 전공을 세웠 다고 들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담담히 그레드의 말에 대답했다. 그에 그의 입가에 아로새겨진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주시하더 니, 테이블 위 놓여있던 서류를 집 어 들었다.

그레드의 말이 이어진다.

"혼자서 백인대 규모의 적을 지연시켰다고 하지. 용케도 살았어."

"운이 따라줬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자, 여기 앉아 라. 자네에게는 해야 할 말도, 건네 줄 것도 있으니 ."

그레드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목제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허리에 매달린 검집을 풀고 의자에 앉았다.

그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한지훈. 상부에서 전해 듣기로는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장 제피르 각하께서 자네에게 훈장 수여를 추천 했다는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제피르가 내 전공을 상부에 보고, 훈장 수여를 추천했다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서류에는 내 이름이 박혀있다. 이번에 내가 세운 공훈의 보고서였다.

"사실, 원래대로였다면 자네는 혼 장을 받지 못한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표정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번에 내가 세운 공훈은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중요 거점을 끝까지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적 백인대 병력을 지연시켰다. 만약 내가 목숨 걸고 거점을 사수하지 않았다면 제국군은 승리하더라도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헌데 그런 공훈을 세웠음에도 훈 장을 받지 못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 그레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평민이기 때문이지. 나처럼 말이다."

순간 그레드의 말에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표정이 올라왔기에.

슬쩍 시선을 내려 그레드의 제복 가슴팍을 바라봤다. 많은 수의 약장 이 그의 가슴팍에 부착되어 있다.

"중앙의 행정직 군관들은 모두가 귀족이다. 그리고 그 귀족 출신 행 정 군관들이 훈장 수훈을 심사하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평민들의 공훈을 무시할 가능성 이 높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그레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제 복 가슴팍에 달린 약장들을 짚었다.

"나 또한 전장에서 나름대로 많은 공훈을 세웠다. 하지만 그중 인 정된 공훈은 반에 반이 안 되지. 이내가 받은 약장과 훈장들은 그야말로 내가 세운 전공의 일부에 불과하단 거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을 주워듣기로, 과거 제국 정복 전쟁 당시 그레드가 세운 공훈은 대단했었다. 분명 그는 뛰어난 무력과 폭넓은 전략적 능력을 지니 고 있다.

아마 그가 귀족 출신이었다면, 그리하여 세운 공훈을 모두 정당하 게 평가받았다면. 지금쯤 그는 전도 유망한 중앙의 참모로서 복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중앙은커녕, 변방 전진기지의 천인장으로서 복 무하고 있다.

세운 공훈에 비해 박한 인사조 치.

그가 평민 출신이기에 겪은 일이다.

"…그렇다면, 저 또한 훈장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군요."

내심 한숨 쉬며 그리 말했다.

훈장. 사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물건이다. 훈장을 수여받았다 한들 내 능력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본래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그것도 단순히 신분이 낮아서 훈장을 받지 못한다니. 신분제도가 없는 현대에서 살아왔던 입장으로선 다소 억울한 일.

허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레드 의 입에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너는 이번에 한해 확실하 게 훈장을 수여받을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방금 전에는 평 민이기에 훈장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를 추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제피르 단장 각하이기 때문이다. 한지훈."

그레드가 슬쩍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 서류를, 정확히는 서류의 추천인란을 바라봤다.

분명 추천인란에는 지저분한 글씨체로 '제피르,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 단장'이라 써 있었다.

"제피르 단장 각하는 수많은 전쟁을 제국의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제아 무리 콧대 높은 귀족들이라 한들 그분의 추천을 묵살할 순 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 즉, 제피르의 이름값이 있기에 귀족들도 제대로 심사할 것 이란 말이었다.

씨익. 그레드가 웃었다.

"하여튼, 훈장 수훈 축하한다 한지훈. 자, 이제 그이야기는 그만 하고. 자네에게 줄 것이 있다."

미리 준비했던 것일까. 그레드는 자신의 발치에서 어떤 나무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 큰 상자는 아니었다. 기껏 해야 현대의 서류가방만 한 작은 상자. 그는 그것을 내밀며 권했다.

"열어봐라."

그에 나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고급스런 천에 싸인 작은 단검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쥐어 보았다.

"단검이군요."

"그래. 제국군 사관용 단검이다."

단검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 실용적인 단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날은 짧았으며, 그립은 쥐기 불편했다. 꽤나 공들여 만든 물건인지 광택과 장식이 남달랐지 만 그저 그뿐. 전투에서 쓸 법한 물건은 아니다.

"백인장. 그 단검의 용도가 무엇 일 것 같나?"

"글쎄요. 전투에는 못써먹을 것 같은데. 사과라도 깎아먹을 때 쓰는 겁니까?"

"자결용이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레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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