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과거 내가 게임을 할 적. 나는 인재 욕심, 정확히는 유닛 욕심이 많았다.
블랙 오케스트라에는 다양한 계 급과 직종을 가진 유닛이 많았다. 단순한 전투병부터, 지휘관을 보좌 하는 참모, 돌격해 적진을 유린하는 기사, 강대한 화력으로 적을 쓸어버 리는 마법사까지.
나는 그들 중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아군으로 영입하는데 주저 가 없었다. 높은 잠재력을 가진 이 를 휘하에 둔다면, 보다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영입하려 했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마법사, 제피르였다.
나는 제피르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었다. 그리고 게임의 후반기, 마침내 녀석과 독대할 수 있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네놈 아래로 들어가라고? 거절 하지. 한지훈."]
하지만 그는 내 영입제안을 거절 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흑마법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제피르는 그대칭점이라 할 수 있는 백마법사였으니 .
흑마법사와 백마법사는 서로 적 대관계. 결코 함께하지 않는다.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터.
허나 그가 거절한 진짜 이유는 내 예상과 달랐으니 .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나는 전쟁이 좋다."]
그는 전쟁광이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한지훈. 네놈은 확실히 강하다."]
["네 군대는 제국을 집어삼켰고, 연방을 몰락시켰으며, 유목연합과 상인연합 또한 갈기갈기 찢어발겼지."]
["만약 내가 연합군을 이탈해 네 놈에게 합류한다면. 연합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고 종전이 찾아올 터."]
그의 말대로, 당시 내 세력은 강 대했다. 강력한 군대를 운용해 여러 적대 세력을 파괴했고, 광활한 영토 를 차지했으며, 대륙의 절반을 정복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중추세력중 하나인 제피르의 마법군단이 이쪽에 합류한다면. 내 군대는 순식간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었다.
허나.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그래서는 재미없지 않나."]
그는 전쟁을 일찍 끝낼 생각이 없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나는 더욱 오래전쟁을 즐기고 싶다."]
["오직 전쟁만이 내가 살아가는 의미. 나는 여태껐 강한 적에 맞서 싸우기를 고대해왔다."]
["그리고 한지훈. 네 녀석이 바로 내가 그동안 바라마지않던 적이다."]
["제국 황위 찬탈자, 잔혹한 전장 의학살마, 위대한 대륙의 정복 자!"]
["나는 네 녀석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미친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진정 전쟁광이었다.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적을 죽이고 파괴하는것에 희열을 느끼는.
놈은 나를 대적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자, 한지훈. 전쟁을 계속하자. 여태처럼 나를 즐겁게 해다오. "]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결국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제피르를 포섭하지 못했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전장에서 싸우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념을 끝내고, 고개를 들어 을려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 인다.
제피르.
내가 마지막까지 손에 넣지 못했 던, 강력한 마법사.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네 녀석. 부상이 심각하군."
잠시 내 몸을 훑어보던 제피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 부상을 입고서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 꽤 터프한 녀석이군."
그는 한 손으로 품속을 더듬더니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작은 유리병 속 찰랑이는 붉은색 액체.
포션이었다.
"자, 받아라."
그는 포션을 가볍게 내 쪽으로 던졌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다시금 제피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우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네 공이 컸다고 들었다. 공을 세운 사관을 홀대할 수는 없는 법. 그 포션으로 치유하라."
미리 병사들에게 거점의 상황을 들은 듯. 그는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포션을 얻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 이고는, 포션을 들이켰다.
은은한 기운이 신체 속에 퍼져나 가며 자잘한 부상을 치료해간다. 상처가 아물며 흘러나오는 피가 줄어 들어갔다.
제피르는 품속에서 궐련을 꺼내 물더니 말을 이었다.
"백인장. 치료하면서 대답해라."
화르륵.
그가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을 일으켜 궐련에 불을 붙였다.
"혼자서 증강백인대 규모의 적병을 유인했다고 들었다. 틀림없는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마치 재밌는 걸 찾았다는 듯, 유쾌 한 반응이었다.
"혼자서 적병 백여 명을 유인하 다니. 나만큼 정신이 나간 미친놈이 로군. 마나도 못 다루는, 일개 보병에 불과한 네 녀석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거점을 지키기 위해선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해 살아 돌아왔고 말입니다."
"그래. 성공했지. 그래서 신기한 거다. 고작 병사 하나가, 수만 규모 회전의 승패를 좌우했다니 말이다."
아니. 백인장이니 병사가 아니라 사관이군. 그는 그리 중얼거리며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후욱, 회색 연기가 뿜어진다.
"만약 네가 저 덜떨어진 공국 병사들을 유인하지 않았다면, 우리 마법전력은 전장에 뒤늦게 도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군의 피해가 극대화 되었겠지."
제피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 니, 말해왔다.
"잘 싸웠다. 한지훈 백인장."
나는 빈 포션병을 갈무리한 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려 제피르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 고 있었다.
"나는 네가 한 일에 매우 감명받 았다."
"감사합니다. 단장 각하."
"추후 네 공훈은 내가 직접 상부에 보고하지. 못해도 훈장쪼가리 하나쯤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 말하고는 뒤돌아 걸어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훈장이라."
말은 훈장 '쪼가리' 였지만, 아마 생각보다 꽤 괜찮은 훈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 그만큼 내가 해낸 일 은 꽤 컸으니까.
나름의 보상을 기대해도 좋겠지.
"들어가서 쉬어라, 백인장. 정확 한 보고는 나중에 듣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인장 막사로 돌아갔다.
들어가는 와중 생각한다.
'제피르를 동료로 영입해야 한다.'
과거 게임 속에서는 그러지 못 했었다. 당시에는 녀석이 원하는 것 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녀석이 만족할 만한 전장을 만들어준다면.'
그렇다면, 제피르는 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녀석을 내 동료 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고작 일개 백연장에 불과하기에.
하지만 추후 천인장, 군단장, 그리고 북부군 사령관에 이르러, 제국을 적대할 때. 그때라면.
놈을 동료로 영입할 수 있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인장 막 사 안으로 향했다.
한지훈이 막사로 돌아간 뒤. 제피르는 자리에 남아서 계속해 마법사들을 지휘했다.
그가 지팡이를 휘저을 때마다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르고, 지팡이를 내려 그을 때마다 수많은 붉은색 궤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려 공국군을 유린했다.
그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 공국군의 침공로. 그 광 활한 면적은 이미 불바다로 화해 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침공로 전체 가 넘실거리는 불길에 삼켜져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다.
꽤나 장엄하고도 압도적인 광경.
허나 제피르는 그런 광경을 주시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했다.
"한지훈이라."
막 마법 하나를 발현한 그가 마나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따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한지훈. 다름 아닌 이거점을 사수한 백인대 의지휘관인 이였다.
"꼴이 말이 아니었었지."
제피르는 한지훈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색 머리에는 반쯤 마른 피가 질척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온몸에 아로새겨진 자상에서는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으며, 근육을 혹사시켰 던 것인지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 그 누가 보더라도 절로 딱하게 여겨질 법한 안쓰러운 모습이다.
허나 청년은 그저 처참하기만 한 모습은 아니었다.
'녀석은 눈빛이 살아있었다.'
한지훈의 눈동자는 또렷했었다.
분명 온종일 격렬한 전투를 겪었고, 전신에 걸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총 기를 진하게 머금고 있었다.
마치 계속해 싸울 수 있다는 듯이.
씨익. 제피르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쓸 만한 놈이야.'
그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살아온 전투마법사. 여러 전쟁을 겪어온 그는 여러 영웅들을 보아왔었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장군,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던 기사, 강대 한 마나의 힘을 자유자재로 운용하 던전투마법사,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승리를 달성했고 아군에게는 존경을, 적에게는 절망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그가 보아왔던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로 인한 짙은 피로에 도, 치명적인 부상에도. 빛바램 없이 또렷하고 총기 어린 눈.
한지훈이 보였던 눈이다.
"나중에는 꽤 볼만하겠어."
제피르는 직감했다.
한지훈이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이 보아왔 던 영웅들처럼, 드높은 존재가 되리라고 말이다.
"고작 일개 병사가 영웅의 눈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재밌는 일이 야."
제피르는 웃으며 지팡이를 휘저었다. 다시금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 높이 떠오른다.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마법사들을 지휘해 공국 침공군을 타격했다.
굉음과 섬광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 * *
넓고 화려한 공국 왕궁의 알현실. 그곳의 옥좌 위에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헤임스 요한바르첸. 제국 침공을 시도했던 공국의 공왕이자 한스 요 한바르첸의 아비 되는 이.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눈앞의 전령을 바라봤다.
"다시 말해봐라, 병사. 군단이 어떻게 되었다 했지?"
"말하라 하지 않았나."
전령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더욱 깊이 박고는, 외쳤다.
"대패입니다, 공작 각하! 제 1군단은 진격 도중 적 마법사와 조우, 광역 마법공격에 당해 와해되었습니다!"
헤임스 요한바르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2만. 무려 2만의 병력이 한순간에 와해되어 무너져 내렸다. 너무나 커다란 패배였다.
허나 지금 그의 심상을 채운 것은 침통함이 아닌, 의문이었다.
'어째서 패배한 것인가. 분명 나는 신의 명을 이행했을 터인데.'
제국 침공을 준비할 당시 그의 머릿속에 들려왔던 음성. 그것은 분명 위대한 존재의 목소리였다.
너무나 장엄하고도 고귀한 음성 이었다. 그렇기에 헤임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위대한 존재의 명령을 충 실히 따른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 믿었기에.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의 군단은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확신했다.
"시련인가."
시련. 헤임스는 이번의 패배가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가 신의 목소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시련. 그에 헤임 스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광역 마법에 의해 타격 되었다 한들, 아군의 병력이 2만이었다. 생존자가 적어도 몇 천 이상 은 남아있겠지."
"그렇습니다. 생존한 병력들은 모두 포트 갈레이로 후퇴하는 중입니다."
"좋아. 갈레이 요새까지 후퇴한 뒤, 방어태세를 다져라. 놈들은 우리 군을 격퇴한 것에 만족하지 못 하고 공격해올 것이다."
제국은 몹시 호전적이다. 비록 공국의 침공군을 손쉽게 격퇴했다 한들. 놈들은 여기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을 터다.
그들은 분명 진격해오리라. 그래서 공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처형해 공국 그 자체를 집어삼키리라.
막아야 한다.
헤임스가 명령했다.
"포트 갈레이에 제 2, 3군단과 기사단을 급파한다. 침공로의 잔존 병력을 추슬러 후퇴, 요새에서 놈들을 틀어막아라."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어서 움직여!"
전령은 급하게 알현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헤임스 공작은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마법전력이라. 분명 한스가 임무에 실패한 것이겠지. 모자란 놈."
헤임스는 한스에게 친위대인 바 첼부대의 병력까지 주어가며 중요 거점의 탈환을 명했었다. 그곳으로 마법사들이 도착할 것이었기에.
하지만 한스는 실패했다. 그리하여 제국의 마법사들은 제시간 안에 거점에 도달했고, 침공군에게 광역 마법을 난사. 그들을 완전히 와 해시켜버렸다.
쯧. 그는 혀를 차며 읊조렸다.
"역시 놈은 후계자의 그릇이 아니었다. 다음 후계자를 정해야겠 군."
헤임스는 결정했다. 한스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그에게 공국을 넘기 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그는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고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