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공국군 추격대를 따돌린 뒤. 나는 계속해 산을 타고 올라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건 뭐였지."
한스를 죽이고 도주할 당시까지 만 해도. 나는 기분이 좋아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남아 거점으로 향하는 지금. 내 감정은 완전히 가 라앉아 있다. 심상치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한다는 홀로그램. 한스를 죽이고 도주하는 와중 떠올랐던 안내창이다.
표정을 찌푸렸다.
"관리자의 개입이라니."
과거, 이 염병할 세상 속에 처음 들어왔을 적. 무수히 떠올랐던 홀로그램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적대 NPC의 잠재력이 상승합니다.]
[우호 NPC의 잠재력이 하락합니다.]
[유저 보정이 하향 조정됩니다.]
[대적자 NPC의 보정이 상승 조정됩니다.]
[시나리오 무작위 이벤트를 생성 합니다.]
불길해 보이던 수많은 안내창들.
개중에는 분명 이런 안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스템 관리자의 시나리오 개입을 허용합니다.]
당시에는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문구였기에 무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여겨봤어야했다.
그 관리자인지 뭔가 하는 놈이 직접 시나리오에 개입해 주무르고 있었다니.
후욱. 한숨을 내뱉었다.
"난이도 나이트메어. 이런 의미였 나."
게임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없었다.
게임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내 마우스와 키보드, 그리고 적 AI였다. 초월적인 무언가는 게임의 전개에 관여하지 않았고,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을 쳐부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관리자의 개입이라니.
"빌어처먹을."
기분이 정말 좋지 않다.
그 말인 즉슨, 관리자라는 놈이 언제든지 시나리오에 개입해 나를 방해할 수 있다는 소리다.
아니, 이미 방해당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시나리오와 달리 틀어 진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
본래 일주일 뒤였을 공국군의 침공이 당겨졌다.
시나리오대로라면 공국 침공군에 없었어야 할 한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이전보다도 더욱 빠르게 백인장으로 진급했다.
명백한 시나리오의 비틀림.
분명 그 관리자라는 놈의 소행이 리라.
"… 망할 놈."
앞으로 녀석은 더욱 노골적으로 내 앞길을 방해할 터.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암흑색 하늘을 바라봤다.
빗줄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폭렬 구의 궤적. 그리고 그보다도 높이 떠올라있는 별과 달이 보인다.
"다음에도 나를 방해하겠지. 관리 자."
왠지 저 밤하늘 위, 놈이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하늘을 바라보며 말해 본다.
"계속 방해해라. 나는 네놈의 개 수작을 모조리 쳐부수고, 이 엿 같은 세상에서 나갈 거다."
오기가 생겼다.
관리자인지 뭔지 하는 놈의 방해 를 물리치고, 이 게임을 클리어 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오 기가.
나는 계속해 길을 걸어 산 위로 향했다.
아군의 거점이 점차 가까워진다.
- 쿠구구구구궁….
밤하늘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수의 폭렬구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백인장님!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내가 거점으로 가자 가장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척후조 병사들이었다.
걱정했던 것일까. 녀석들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이 기쁘다는 듯 말해왔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혼자서 백인대를 상대하고도, 무사히 살아 돌아오시다니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 냐?"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카일의 말에 짐짓 여유 있는 척 해보았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정말 죽을 뻔했지.'
이번 전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놈들의 분견대를 격파했다. 백인대 규모의 적을 혼자서 유인해야 했으 며, 나중에는 적에게 포위되어 몰이 사냥까지 당했다.
내가 평범한 병사에 불과했다면 죽어도 수십 번은 죽었으리라.
나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딜 가려고 짐을 싸 고 있던 거냐? 임무는 거점 방어였을 터인데."
척후조 병사들은 하나같이 완전 무장 상태였다. 등에는 식량과 잡동 사니를 담은 군장을 메고 있었으며, 가진 무기까지 모두 챙긴 상태였다.
마치 어딘가로 이동하려 하는듯 한 모습.
그에 카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사실, 백인장님을 찾으러 가려 했었습니다."
"나를?"
"그렇습니다. 저희 상관을 홀로 버려둘 순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카일의 대답에 미소 지었다.
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한다면 백인대 규모의 적과 조우할지도 모르는 일이 었으니 .
"위험한 일이었을 텐데. 그리고 내가 죽어있었다면 헛고생이었을 테고 말이야."
"존경하는 백인장님입니다. 살릴 수 없다면, 시체라도 찾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련한 녀석들."
나는 피식 웃고, 카일과 척후조 병사들은 그에 반응하듯 낄낄 웃어 댔다.
그간 있던 여러 전투들 덕분일까. 녀석들은 보다 나를 의지하고 있다. 내가 혼자 떨어지자 굳이 구출해오려 할 정도로 말이다.
"잠깐, 백인장님! 많이 다치셨습니다."
문득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린 것 일까. 카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에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살 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리하긴 했어.'
녀석의 말대로,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에는 자잘한 자상이 수도 없이 아로새겨져 있다. 근육은 한계에 가까운 운동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 려왔으며, 전투의 긴장이 풀어진 탓에 묵직한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러 댔다.
당장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그럼에도 무시하기엔 힘든 부상.
"백인장님.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약과 붕대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치료 전에 먼저 상황 보고부터 받지."
"명령을 받듭니다."
카일이 척 경례하며 보고해왔다.
"현재 상황 보고드립니다. 마법사들이 거점에 도착, 적 공국 침공군 주력을 향해 광범위 폭렬마법을 갈 겨대고 있습니다."
"그래. 마법사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 콰르르르르릉!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익숙한 소음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할 때 울리는 마나의 울음. 꽤나 강력한 마법을 발현하고 있는 것일까.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소음의 기세는 흉포했다.
카일이 질린 표정으로 말해왔다.
"마법사들이 휴식을 끝내고 다시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시끄 럽지 않습니까?"
"카일, 나를 마법사들에게 안내해라."
"마법사들에게 말입니까? 먼저 치료하신 다음에 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보고가 우선이다. 치료는 나중에 받아도 되니."
"… 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뒤따라가는 와중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라면, '녀석'이 와있 겠지."
사실 내가 마법사를 보러가는 이유. 단순히 보고하러 가는 이유가 아니었다.
눈도장을 찍어놔야 할 녀석이 있었으니 .
피식 웃었다.
'그 괴팍한 녀석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마법사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지 랄 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무리는 아닌 일이었다. 거의 평생을 골 방에 갇혀 마법이라는 학문에 자신을 갈아 넣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마법사라는 지위일 터이니.
그리고 지금 내가 만나러 가는 마법사는 그중에서도 한층 괴팍한 놈이었다.
나는 계속해 카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볼 수 있었다.
- 마나 동조. 폭렬마법 50중첩. 준비해라.
마나 어린 음성. 그리고 지상에 도열해 있는 수십의 마법사들.
하나같이 두터운 회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녀석들이다. 그 들의 전신에서는 푸른색 기운이 일 렁이며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 며,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는 장중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이를 바라봤다.
- 타격점 조율은 내가 하겠다. 전원, 준비.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밝은 마나를 전신에 두르고 있는 이였다.
그가 마법지팡이를 휘저을 때마다 허공에 떠올라있는 마법진이 시 시각각 변화했다. 푸르게 빛나던 마법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보다 강렬한 빛을 발하며 번들거린다.
직후. 그가 지팡이를 내려그으며 읊조렸다.
- 발현. 폭렬폭풍.
그러자 이변이 일었다.
번쩍!
사방 천지를 뒤덮을 듯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허공에 생겨난, 무수히 많은 수의 불덩어리 들. 그것들은 매끄럽게 하강해 공국 침공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꼴을 멍하니 바라봤다.
- 번쩍! 번쩍! 번쩍!
저 멀리, 허둥지둥 움직이며 퇴 각하고 있는 공국 침공군. 그들 사이에서 다수의 섬광이 번뜩였다.
직후 대규모의 폭발이 연속해서 일었다. 불기둥이 치솟고, 핏빛 섬 광이 터져 나왔다. 퍼져 나온 화마 가 광활한 공간을 유린했다. 야음으로 뒤덮인 어둑한 야산이, 수많은 폭발과 넘실거리는 불길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 콰과과광!
그리고 몇초 후 들려오는 폭음 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역시 장관이야."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할 적. 마법사들의 광역 마법을 볼 때마다 내뱉었던 말이었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화려하고, 웅 장하며, 강력하다. 그들 수십이 모 여 발현하는 광역마법은 순식간에 군단 규모의 적을 와해시킬 정도로 몹시 패도적이었다.
"마법이 라."
역시 탐이 난다.
전장을 지배하는 강대한 힘. 게임 속에서도 마법사는 위대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것은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계속해 침공로를 주시했다.
침공로에는 계속해 폭렬구가 틀어박히고, 폭발이 일었다. 불길이 번져나가 침공로 전체가 불바다로 화해있다. 이글거리는 불길, 뭉게뭉 게 피어오르는 연기.
저기, 저 불타오르고 있는 침공 로에서는 몇이나 되는 생명이 바스 러 졌을까.
적어도 수십 수백 단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한 뒤.
재차 발걸음을 옮겨 마법사들을 향 해 다가갔다.
- 다음 폭렬폭풍 마법을 준비하라. 이번에도 50중첩… 잠깐, 누가 왔군.
내 접근을 확인한 것일까. 선두 의 마법사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척. 나는 주먹을 심장에 가져다 대며 경례했다.
"4번 백인대 지휘관 한지훈입니다.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그래, 네놈이…."
마법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마법사.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 는, 강대한 이능을 지닌 이들. 그들은 하나하나가 고명한 학자이자, 뛰어난 기술자였으며, 전장의 지배자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도 한층 더욱 드높은 존재가 내 앞에 자리해있다.
그가 로브의 후드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단장 제피르다. 네 녀석이 한지훈이로군."
드러난 것은 마법사로선 흔치않게 중년인의 외양을 한 얼굴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내 시야 한켠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제피르][라브리에 전투마법단 단장]
제국의 불꽃이라는 이명을 가지 고 있는 전투마법사. 다수의 전장을 전전하며 기나긴 정복 전쟁 동안 무수히 많은 수의 전공을 세운, 제국의 전쟁영웅.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단장 제피르.
그가 내 앞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