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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26화 (26/390)

26화.

산의 정상 위. 그곳에 푸르른 광 휘를 휘감은 수십의 인영이 등장했다.

모두 로브를 입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로브에는 하나같이 어떤 문양이 박혀 있었다.

타오르는 붉은색 불꽃, 그리고 그 불꽃을 휘감은 푸른색 원.

제국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문양이었다.

"드디어 공국 놈들이 쳐들어왔 군."

한 마법사가 나직이 읊조리며 로 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자잘한 주름이 아로새겨진 중년의 얼굴.

중년은 라브리에 마법전투단의 단장, 제피르였다.

그가 시선을 돌려 북쪽을 바라봤다. 그의 시야 속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횃불의 빛.

어둠을 뚫고 천천히 행군하고 있는 공국군의 모습이다. 무려 일만이 넘는 수의 군대가 침공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들을 주시하는 제피르의 입가에 천천히, 질척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의, 정말 오랜만의 전쟁이다."

중년인의 모습을 한 노인의 눈에서, 결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피 어오른다.

그는 진심으로 전쟁을 반기고 있다.

부웅.

제피르가 커다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공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 쿠르르르르르릉…

장중한 기운이 몰려들고, 지팡이 끝에 박힌 보석이 푸른색 빛을 번 들거렸다. 그가 지팡이를 치켜든 채, 나직이 지시했다.

"자, 마나공조를 시작하라. 합동 마법이다."

그의 지시와 동시, 뒤에 도열해 있던 수십의 마법사들 또한 마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푸르른 기운이 일렁이더니, 수십 마법사들의 마나가 서로 이어졌다.

직후 허공에 커다란 마법진이 떠오른다.

그들은 서로의 힘을 모아, 보다 대규모 마법을 발현하고자 한다.

"시전할 마법은 폭렬폭풍 50중 첩. 목표는 전방의 공국 침공군 대열."

마법진이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패도적인 기운이 일렁이며 대량의 마나가 유동한다.

"침공군을 궤멸시킨다. 놈들을 쓸 어버려 제국의 강대함을 알려라."

막대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허공에 붉은색 마법진이 점차 선명해졌다. 강렬한 붉은색 광휘가 주위 로 퍼져나간다.

그들은 대규모 공격마법을 준비 한다.

* * *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른 기운이 퍼져나가 암흑색 어둠을 지워버렸다. 달빛을 가리는 밤구름이 밀려나 흩어 사라진다.

신비하고도 장중한 마나의 파장. 그것이 산의 정상 거점지역에서 퍼져 나오고 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 어떡할 거냐, 한스 요한바르 첸."

시선을 내려, 내 앞에서 있는 녀석을 바라봤다.

한스 요한바르첸. 게임 속에서도 그리고 이 세상에 떨어진 지금에서 도 나와 악연으로 엮인 이다.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마법사…."

반쯤 정신이 나간 것일까. 놈은 허탈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믿기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 마법이라는 이능으로 인간을 뛰어넘은 힘을 발하는 이들.

그들이 마침내 전장에 등장했다.

"그래. 결국 임무 실패로군."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한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녀석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헌데 어째서인가. 방금 전까지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녀석의 눈동자가 차갑 게 가라앉아있다.

"네놈. 이름이 뭔가."

문득 녀석이 내게 물었다.

이름을 묻는 말. 별로 꺼릴 이유 가 없기에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한지훈이다."

"한지훈… 한지훈이라."

놈이 내 이름을 되뇐다. 똑똑히 기억하겠다는 듯이.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한지훈. 나는 직감했다."

녀석이 그립을 양손으로 잡고, 검날을 수평으로 뇌였다.

"네놈을 살려놓는다면 계속해 나 를 방해할 것이라고. 지금 그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철그럭.

녀석이 검의 첨단을 내게 조준했다. 검날이 빛을 반사해 시퍼런 빛을 번뜩인다.

당장이라도 전투를 준비하는 모양새. 그에 나 또한 검을 들어올렸다.

"마법사가 도착했는데 . 도망치지 않는 건가."

"그쪽의 마법사는 아군의 본대를 노릴 것이다. 당장 이쪽을 신경 쓰 지는 않겠지. 그리고…."

놈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어차피 실패한 임무다.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이라도 죽일 것이다."

"미련한 놈."

저 미친놈은 끝까지 나를 노릴 셈이다.

하긴, 제대로 성질을 긁어두긴했다. 더해 나 때문에 엿 먹은 것 이 한두 번이 아니니 끝장을 보고 싶을 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좋지 않아.'

사실, 놈이 임무 실패에 포기하고 퇴각하기를 바랐었다.

이쪽 또한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능력치를 상기했다.

[내구 5]

[체력 19]

내구가 5. 체력이 19. 50이 넘는 민첩에 비해 심하게 모자란 능력치 들이다.

두 시간 동안이나 산 곳곳을 달렸기에 체력을 심하게 소비했으며, 격렬한 운동 때문에 온몸의 관절이 삐그덕 거렸다.

즉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계가 그리 머지않은 상황.

좋지 않다.

"한지훈."

녀석이 다시 한 발자국 접근해오 며 나직이 말했다.

"죽여버리겠다. 반드시."

순간,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녀석의 전신에 강렬한 기세가 일기 시작했다. 여태껏 그 어떤 적에 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묵직한 위압 감.

그 불안한 기척에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콰앙!

녀석이 검을 내찔렀다. 막대한 힘이 실린 흉악한 검격이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키기긱!

검날이 투구의 윗면을 긁었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음이 울린다.

"여전히 잽싸군. 하지만 언제까지 나 피할 수는 없을 거다, 한지훈!"

놈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콰앙!

한스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강맹한 힘을 품은 검광이 사선으로 내리그어 진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의 어깨. 검신을 들어올려 놈의 검격을 흘려 보냈다.

카가가가가각-!

녀석의 검날이 불똥을 튀기며 내 검신을 따라 미끄러진다.

이를 악물었다.

"힘 한번 더럽게 세네."

역시 녀석의 근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놈의 검격을 정면에서 막지 않고 흘려보냈음에도, 검이 미칠 듯 흔들렸다. 충격에 손목이 시큰거린다.

한스는 더욱 성장해있다. 검격은 더욱 민첩해져있으며, 검날에 실린 힘 또한 이전의 그것보다 더욱 중 후했다.

꽤나 빠른 성장속도. 거점방어전 당시의 놈보다도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워졌다.

하지만 성장한 것은 놈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성장했다.

후욱.

뜨거운 숨을 토하며 앞으로 파고 들었다. 한스가 내 접근에 반응해 반격한다.

콰앙!

놈의 검날이 나를 저지하기 위해 휘둘러졌다. 커다란 검광이 공기를 양단하며 수평을 그리고, 검풍이 지면의 잡풀을 뒤흔들었다.

꽤나 강대한 힘이 실린 일격. 하지만.

' 보인다.'

강대한 힘이 실린 만큼 검로가 단순하다. 저 정도라면 쉽게 피할 수 있다.

상체를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놈의 검날이 가슴팍의 경 갑을 스쳐 지나간다.

키기긱, 쇠를 긁는 소음. 경갑의 표면 위로 기다란 스크래치가 아로 새겨졌다.

"뭣..!"

내가 당하리라 확신했던 것일까. 녀석이 당혹어린 신음을 냈다.

나는 씩 웃었다.

"느려 터졌잖아."

녀석의 공격은 분명 치명적이지만, 그리 빠르지 않다. 그리고 맞지 않는 공격은 의미 없다.

방금 전공격을 피해낸 덕분에 놈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빈틈이 훤 히 드러난 상황.

기회는 지금이다.

"뒈져!"

외치며 녀석의 간격 안으로 파고 들어가, 검을 내뻗었다. 노리는 것은 놈의 목. 두터운 중갑을 입은 녀석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내 검날이 한스의 목을 향해 움직인다.

그때였다.

"백인장님!"

부웅!

시야의 사각에서 검날이 쇄도해 왔다. 나는 한스에게 쏘아진 검의 방향을 바꿔, 내 등을 노리는 검을 쳐냈다.

쩌엉!

배후의 공격을 튕겨냈다. 시선을 돌려 나를 공격한 이를 확인했다.

"염병…!"

공국 병사였다.

제 지휘관이 밀린다는 것을 인식 하자, 나와 한스의 전투에 끼어든 것이다.

이를 갈았다.

'죽일 수 있었는데 .'

방금 전 나는 한스를 압도했다. 막대한 민첩 능력치를 살려 놈에게 파고들었고, 치명타를 가할 기회를 얻었었다.

허나 방해가 있다. 지금 나와 한스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공국 병사들이다. 놈들은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잊으면 안된다. 나는 놈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고립되어있다.

"놈을 공격해!"

"죽여어어!"

한 병사가 끼어들자, 용기를 얻 은 것인가. 다른 공국 병사들도 하나둘 나를 노리고 공격을 가해왔다.

다수의 창격과 검격이 나를 노리고 쏟아져 들어온다. 사방을 에워싸는 듯한 공격.

선택해야했다.

위험을 감수하며 한스를 처치할 지, 아니면 일단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을 뺄지.

내 선택은 후자였다.

"흐읍!"

몸을 던져 지면을 굴렀다. 방금 전 내가 서 있던 공간을 검날과 창 격이 난자한다.

가까스로 적 병사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내게 공격을 가하는 것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죽어라, 쥐새끼!"

한스 또한, 어느새 자세를 추스 르곤 나를 노리고 있다. 놈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나를 향해 검을 내 리친다.

퍼억!

녀석이 검을 내리그었다. 나는 손과 발로 지면을 박차 튕겨지듯 일어났고, 놈의 검날은 방금 전 내가 있던 흙바닥에 처박혔다. 충격에 흙먼지가 튀어 오른다.

"염병할 놈들."

고작 나 하나 잡는데 여럿이 덤 벼들고 있다.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못 죽인다.'

일대일 상황이라면 한스를 죽일 자신이 있다. 50이 넘어가는 민첩 은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 므로.

하지만 지금은 한스를 보조하는 병사들이 너무나 많다. 죽일 수 없다. 놈을 죽이기 위해 무리한다면 다른 병사들이 나를 노리고 가세할 것이다.

그러니,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 무리해서 한스를 처치한다 한들, 내가 죽으면 본말전 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숨을 고르고는 주위를 살폈다. 녀석의 포위망 중 허술한 부분을 노려 도주하기 위해.

"도망치려는 것인가."

그런 내 움직임을 간파한 것일 까.

한스가 저벅, 발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접근해왔다.

"도망치게 놔두지 않는다, 한지훈. 임무를 실패한 이상, 네놈만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녀석의 눈동자에 집념이 일렁인다.

"망할."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쪽을 둘러싼 병사들의 포위망. 돌파하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스가 정면에 있는 이상 그리 쉽게 틈을 드러낼 수 없다.

놈은 느리지만 강하다. 아니, 느리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나와 비교할 때의 이야기다. 녀석은 일개 병사들 따위보다 훨씬 빠르고 기민하 게 움직인다.

아무리 나라 한들, 쉽게 틈을 보 일 순 없다.

"네놈은 이곳에서 죽는다."

저벅, 저벅.

녀석이 계속해 다가온다. 동시에 이쪽을 포위한 병사들도 점차 간격을 좁혀온다.

압박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포위되어 죽을 판이다. 나는 계속해 주위를 살 폈고, 빈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쿠르르르르르르릉…!

장중한 소음이 사방천지를 뒤엎었다. 나무가 흔들리고, 강렬한 충격파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갑작스레 일어난 굉음. 그리고 온몸을 저릿하게 하는 중후한 진동 까지.

나는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시작됐네."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금 하늘의 광경을 시야에 담았다.

밤하늘에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라있다. 마법진의 색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게임 속에서 자주 보았던 거대 마법진.

어쩌면, 한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 쿠르르르르르르…!

소음과 함께, 마나의 파장이 더욱 중후해졌다. 허공에 떠오른 마법 진의 빛이 더더욱 강렬해진다.

마법진은 계속해 그 크기를 늘려 가며, 보다 웅혼한 파장을 발해갔다.

곧 일렁이는 빛이 절정에 이는 그때.

나는 눈을 감았다.

직후 이변이 일어났다.

- 번쩍!

마법진이 환한 빛을 터트렸다.

순간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의 막대한 광량이 사방천지를 뒤덮었다. 주위에 있던 공국 병사들이, 그리고 한스가 그 강렬한 빛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눈을 떴다.

녀석들은 갑작스러운 섬광의 여 파로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황.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파앙!

나는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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