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화살 세례가 쏘아졌다.
수십의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피잉, 핑. 날선 파공성이 공기를 어지럽힌다.
그와 동시,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발동되었다.
시야 속 움직임이 점차 느려져 간다. 온몸의 신경이 반응한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신기한 감각 이다.
시야가 일순 느리게 흘러가고, 공기의 음파가 웅웅 울리는 것처럼 들리는 감각.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느려진 것 만 같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검을 휘둘 렀다.
부웅.
들고 있는 횃불의 빛이 검날에 반사되었다. 평소와는 다른 붉은색 검광이 반월을 그리며 회전한다.
파직. 퍼석.
내 머리를 노리며 날아오던 화살 두 개가 허공에서 박살났다.
재차 검을 놀렸다. 회전했던 검 날을 아래에서 위로 추켜올렸다. 붉은색 궤적이 사선으로 그어진다.
콰직.
복부에 꽂힐 화살이 허공에서 반 토막 났다.
몇 걸음 더 뒤로 걸었다.
화살이 계속해 날아온다. 가속된 시야 속 그것은 빠르지만 느리게,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검을 휘둘러 쳐냈다.
나는 화살을 피하고 부수면서 어떤 희열을 느꼈다.
' 대단해.'
그것은 높아진 능력치에 대한 감탄.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다니.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묘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능력치의 힘을 빌려, 그리고 스킬의 발현을 통해 이리 훌륭하게 보이고 있다.
- 콰직. 퍼적.
몇 걸음 더 걸어 뒤로, 공국 궁 수의 사선이 안 닿는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부서진 화살 파편이 흩 어진다.
"휴."
뜨거운 숨을 토하며 몸을 숙였다. 아직 화살이 날아오고 있긴 하지만 바위 뒤로 물러났기에 이쪽을 결코 맞추지 못한다.
나는 검을 굳게 쥐고 숨을 골랐다.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개자식!
품위 없는, 그저 악에 받친 욕지 거리다.
나는 가만히 숨죽여 녀석의 목소리를 훔쳐들었다.
-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어지간히 빡쳤나보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본래 이번 미션에서 한스는 등장 하지 않는다.
적어도 과거 게임에서는 그러했었다. 놈이 다시 백인장으로 진급한 것은 공국의 침공군이 전멸당했을 때였다.
하지만 놈은 벌써 백인장이 되어 있다. 더해 원래라면 이곳에 없을 녀석이 지휘관으로서 내 앞에 자리 해있다.
어째서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고 곧.
'악몽 난이도.'
난이도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스가 벌써 백인장이 될 이유가 없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개입이 있다고 봐야 할 터다.
예를 들자면 난이도 변경으로 인 한 시나리오의 개변이라던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병사 삼십을 이끌고 놈을 죽이 러 가겠다! 나머지 너희들은 계속 해 산을 타고 움직여라.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 은 한껏 흥분한 듯, 목소리가 높아 져 있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
지금 놈이 이끌고 있는 병력은 약 백여 명 안팎. 헌데 나를 죽이 기 위해서는 일부인 삼십 명의 병력만을 운용하겠다 한다.
곤란한 일이다.
놈들을 유인하고, 기만해,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고작 삼십의 병사들만 유인한다면 나머지 적이 거점으로 가버릴 터.
그래서는 안된다. 놈들을 모조리 유인해야 한다.
나는 자리에 앉아 고민했고 그때.
"아."
무언가가 내 시야에 잡혔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화살 파편들 이었다. 반으로 쪼개지고 갈라진 그것들이 바위 위 아무렇게나 흩뿌려 져 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화살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중간이 잘려 반 토막 난, 화살촉이 달려있는 화살 파편이었다.
"좀 더 놀려줄까."
벌떡, 일어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바위 아래 나를 추격하기 위해 병사들을 선별하고 있는 한스가 보였다.
나는 주웠던 화살토막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목에 스냅을 실어, 그것 을.
휙.
던졌다.
화살토막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다. 그리 빠르지 않게 날아간 그것은 정확히 병사들 사이에 있는 한스의 투구 위에, 툭.
명중했다.
튕겨 나온 화살이 힘없이 떨어진다.
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하하."
문득, 웃음이 흘러 나왔다.
한스의 표정이 너무나 웃겼기 때문에.
분노와 어이없음이 뒤섞인 저 표정. 현실에 있을 적 나조차도 몇 번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고작 삼십 가지고 되겠냐?"
놈을 도발할 것이다. 안 ?아오 고는 못 배기도록.
천천히, 엄지로 목을 그으며, 이어 말했다.
"꼴값 떨지 말고 다 덤벼. 전처럼 목을 다시 베어 줄 테니까."
한스의 얼굴에 어이없음의 감정 이사라지고, 그 공백이 분노로 메 꿔져 갔다.
격렬한 분노에 물들어가는 녀석 의 눈.
하지만 나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한마디 더 덧붙이며 이죽였다.
"이번에는 포션 잘 챙겨왔냐?"
그 순간.
"네놈---!"
한스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 졌다.
콰앙!
놈이 흉성을 토하며 이쪽으로 돌진해왔다. 중갑을 입었음에도 무지 막지하게 빠른 속도였다.
"개자식! 죽여버릴 테다! 빌어 처 먹을 쥐새끼-!"
정말 단단히 빡친 것 같다.
나는 몸을 내뺐다.
자리를 박차 산길을 비스듬하게 달렸다. 위로 향하지는 않고 등고선을 따라 이동하듯 수평 서쪽 방향 으로.
내가 도망치자 악에 받친 것일 까. 한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포효한다.
"저놈을 당장 죽여 버려라! 화살을 쏴라! 놈을 몰아붙여라!"
뒤늦게 병사들이 한스의 뒤를 따 라온다. 화살 여러 발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 쉬익!
화살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하지만 헛수고다.
- 퍽! 퍼벅!
내가 방금 전 지나친 나무에 화살이 박혔다.
산악전에서, 그것도 이토록 나무 가 빽빽한 숲에서 활은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 나는 나무 사이를 누 비듯 움직였고, 그 덕분에 화살은 쏘는 족족 수풀에 떨어지거나 나무에 박혀댔다.
"놈을 몰아라! 반드시, 저 염병할 놈을 죽여 버려!"
성공적으로 어그로를 끈 것 같다.
나는 한스와 병사를 매달고 서쪽 으로, 서쪽으로 달려 나갔다.
* * *
한스는 거센 숨을 내쉬며 달렸다.
철그럭, 철컥. 그가 발을 내딛어 지면을 박찰 때마다 중후한 전신갑 주의 소음이 울렸다.
'죽여 버린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전방의 인영, 검은 머리의 병사를 주시했다.
분노가 진하게 일어난 얼굴.
한스의 광기 어린 시선이 적의 뒷모습을 ?는다.
"놈을 포위해! 3번, 4번 십인대! 뒤돌아서 놈의 퇴로를 막아!"
격노한 그는 병사들을 지휘해, 제국 병사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최우선 목표는 다름 아닌 비콘의 제거.
허나 한스는 목표를 도외시한 채, 저 병사를 ?고 있다.
지극히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그 스스로도 미련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병력을 돌려, 거점으로 향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리라.
그러나 한스는 저 병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병사.
이름난 기사도, 강대한 마법사도 아닌, 그저 하찮은 평민에 불과한 이다.
허나 저 평민 병사 때문에 한스는 여러 굴욕을 맛봤다.
초계망을 돌파당해 천인장에서 십인장으로 강등되었다.
빈사 상태에 이르러 목숨을 잃을 뻔했다.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
- 꼴값 떨지 말고 다 덤벼. 전처럼 목을 다시 베어 줄 테니까.
더해 방금 전 겪었던 모욕까지.
무려 백여 명의 병사 앞에서 적 병사에게 모욕당했다. 저놈을 죽이 지 못한다면 그의 자존심에 그리고 가문의 위신에 상처가 나리라.
게다가 그는 아직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놈을 죽이고 바로 거점으로 향 한다면, 비콘을 파괴할 수 있을 것 이다.'
한스 휘하의 병력은 많다. 그리고 지금의 전투양상으로 볼 때, 제국측의 병력은 적은 상황.
아직 승산이 남아있다. 저 병사를 죽이고 곧장 거점으로 향한다면, 복수와 임무 달성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으리라.
적어도 그는 그리 여겼다.
때문에 한스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검은 머리 병사를 ?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새끼 같은 놈!"
놈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잡힐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녀석 이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놈 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치며 움직였다.
고작해야 일개 병사.
하지만 녀석의 움직임은 일개 병사의 것이 아니다. 과거 거점에서 마주했을 때보다도 명백히 성장해 있다.
그럼에도 한스는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퇴로를 막아! 화살을 쏴!"
한스의 이글거리는 눈이 제국 병사의 뒤를 ?았다.
그의 가슴속 맹렬한 복수심이 타오른다.
?피잉!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그에 자세를 낮춰, 고개를 숙였다. 화살 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 바닥에 꽂힌다.
"놈을 몰아넣어라!"
"거의 다 포위했다! 빠르게 움직여!"
꽤나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군의 목소리는 아니다. 나를 추격하는 공국 병사들의 목소리.
후욱, 뜨거운 숨을 토하며 다리 를 움직였다.
"유인이 너무 잘됐는데 ."
지금 나는 녀석들을 유인하고 있다.
한스를 도발한 뒤. 아슬아슬하게 녀석들을 피해 움직였다. 화살이 투 구와 경갑을 스쳐지나갔고, 병사들 이 나를 포위하듯 압박해온다.
모두 의도한 움직임이었다.
지금의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놈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 막대한 민첩과 체력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
하지만 나는 일부러, 잡힐 듯 말 듯.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 추적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도망쳤을까.
"놈을 몰아넣었다!"
"진열 갖춰! 빠져나가게 하지 마!"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공국 병사들이 내 주위를 둘러싼 듯했다.
그리고 직후.
바스락.
숲의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치 며, 병사들이 등장했다.
놈들이 창칼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잡았다!"
"이 약삭빠른 놈. 더 이상 도망 치지 못할 거다."
녀석들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기색이 떠올라있다. 아무래도 완전히 포위했다 여긴 모양.
하지만 놈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내가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철컥, 스르릉.
녀석들이 창과 검을 들어 올려 이쪽을 겨눴다. 빙글 원을 그리듯 공간을 좁혀온다.
빈틈없는 포위.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평범한 병사라면 꼼짝없이 죽었 으리라.
하지만 나는 평범한 병사가 아니다.
눈동자를 굴려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3: 46]
시간을 뻐길 만큼은 뻐겼다. 더 이상 놈들을 유인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인 즉.
"이제 굼벵이처럼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파앙!
지면을 박차 전방으로 도약했다. 보다 강화된 나의 신체가 움직임을 가속시켰다. 마치 바람을 가르듯, 내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쇄도한다.
"뭣…?!"
공국 병사 놈들이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태껏 이렇게 빠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내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 했으리라.
순식간에 창병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검을 수평으로 휘둘 렀다.
서걱.
반월 모양의 검광이 번뜩였다.
"커, 헉…!"
놈의 목을 베었다. 녀석의 모가 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액체가 지면에 후드득 떨어진다.
하지만 아직 내 검날은 멈추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녀석을 지나쳐 검의 가속을 유지한 채 다음 적을 노렸다.
파앙!
터져 나오는 파공성. 어둑한 시야 속에서 반짝이는 검광. 시퍼런 검광이 위에서 아래로, 기다란 궤적을 그린다.
"끄으으으!"
다음 적의 발목을 베었다. 녀석 이 신음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이제 놈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가벼워.'
몸이 가볍다. 원하는 동작이 스 스럼없이 나온다.
일개 병사 따위 몇 명이든 해치 울수 있을 것만 같다.
"망할! 막아라! 놈을 막아!"
병사 여럿이 달려들었다. 이쪽으로 향하는 검날과 창격. 시퍼런 날 붙이들이 나를 노리고 쇄도해온다.
그 모든 것들을 수월하게 회피했다. 고개를 숙여 목을 노리는 검날을 피했고, 검신을 세워 허리를 노 리는 창격을 흘려보냈다.
직후 반격했다.
파앙!
아래에서 쏘아진 내 검날이, 적 병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정확히는 골반의 바로 위에.
검날이 엉덩이뼈를 긁고, 장기를 난자하는 감각이 손잡이를 타고 느껴졌다. 날을 비틀어 후벼 팠다. 놈 이 고통에 찬 비명을 터트린다.
"꺼져."
퍽. 발로 휘청거리는 놈을 차 쓰러뜨렸다. 녀석은 지면에 쓰러져 경련한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춤.
나를 포위하고 있던 공국 병사들. 놈들이 하나둘 뒷걸음질 쳐, 물 러서고 있다.
?善?湧?얼굴에는 경악과 공포 가 가득했다.
하기야, 순식간에 세 명의 적을 죽이고 무력화시켰다. 그것도 포위 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덤비는 병사가 죽는 것이 확실할 터이니. 무섭겠지.
"머저리 놈들."
나직이 읊조리고는, 검을 휘둘렀다.
부웅.
검날에 뭍은 핏물이 지면에 흩뿌 려진다. 나는 검을 굳게 쥔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병사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물러난다.
그리고 그때였다.
"놈."
병사들 사이를 헤치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반드시."
한스 요한바르첸.
놈이 드디어 내 앞에 섰다.
스르릉.
녀석이 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병사들보다 훨씬 화려한 장검이 놈 의 손에 쥐어 들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법한 모습.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도망 안 가냐?"
"도망? 개소리!"
내 말이 도발로 들렸던 것일까. 한스가 더욱 악에 받친 얼굴을 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네놈 같은 일개 병사에게 도망 치라고? 그런 수치를 내가 감당 할 것 같으냐."
저벅.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서 늘한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이번에는 기필코,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저벅.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놈의 날카로운 검날이 바로 세워진다.
그에 나는 이죽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나 말고, 마법사 말이야."
"마법사…? 설마?!"
한스가 경악하고, 나는 시선을 내려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0: 00]
"타임 오버다. 개자식아."
내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
번쩍!
푸르른 빛이 어둑했던 하늘을 환 하게 밝혔다.
드디어 마법사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