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퍼억!
내 검신이 공국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놈이 모가지에서 피를 뿜어 내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나자빠진다.
나는 검을 뽑아내고는 물었다.
"다 처치했나?"
"예. 모조리 죽였습니다."
내 질문에 카일이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폈다.
바닥에는 횃불이 나뒹굴고 있고, 시체가 어지러이 나자빠져있다.
자리해있는 시체의 수는 정확히 여덟. 모두 나와 척후조 병사들이 처치한 시체들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육십 명 정도 죽였네."
처음 전투 이후. 나와 병사들은 산의 등고선을 따라 이동. 거점으로 접근하는 적 조들을 하나둘 급습했다.
무려 일곱 번의 접전이 있었다.
스무 명의 병력을 운용해 육십에 달하는 적을 처치했다. 그것도 공국 측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말이다.
결코 낮은 수준의 전공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 허나 내 얼굴에는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번져 나왔다.
"위험한데."
시선을 돌려, 시야 한 켠에 자리 해있는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홀로그램에는 미니맵이 떠올라있다. 내 얼굴에 근심이 더욱 깊어진다.
'많이 밀렸다.'
미니맵에 자리해있는 붉은 점들 이 점차 산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물론 나와 척후조 병사들은 노력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놈들을 하나하나 처치했고 정상에 인접해있는 적 분견대를 각개격파했다.
그 덕분에 놈들의 진군속도를 상당히 지연시킬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놈들은 지금쯤 하나둘 정상 거점에 도달했을 것이다.
내가 가만히 고뇌하고 있는 그때였다.
"백인장님. 저걸 보십시오!"
2번 척후조 십인장 에시가 나를 불렀다. 녀석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나는 그곳을 주시했다.
"… 망할."
적이 진형을 바꾸고 있다.
시야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횃 불들이 어딘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산개했던 적 병력이 한군데로 병합 되어갔다.
아마 자신들을 각개격파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걸, 그리고 우리 측의 궁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터다.
그렇기에 저들은 산개했던 병사들을 다시 병합하고 있다.
"놈들이 뭉치면 지금처럼 하나하나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카일이 그리 물었다.
확실히 저들이 뭉치면 답이 없다. 이쪽의 수는 고작 스무 명. 반면 놈들의 수는 수백. 병력의 차이 가 크다. 전면으로 붙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잊으면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지연'이다. 전투가 아니다.
나는 미니맵을 보며 카일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산을 타고 놈들의 제 2부대를 쳐라. 녀석들을 각개격파 해. 여태껏 우리가 했던 것처럼."
놈들은 부대를 양쪽으로 나눠서 공략하고 있다.
북쪽은 놈들이 산개를 풀고 병합 되고 있지만, 동쪽은 아직 산개되어 있는 상태다. 척후조 병력이 그쪽으로 가 움직인다면, 지금처럼 지연시 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쪽은 어떡합니까? 놈 들이 집결해서 밀어닥치면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북쪽이 남아있다. 그에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내가 북쪽 놈들을 유인하겠다."
"… 백인장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카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린 피 묻은 검날을 바라 보며 이어 말했다.
"듣지 못했나? 유인이다. 녀석들 의 주의를 끌어 나를 ?아오게 한 다면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혼자서 수백의 병력을 유인하겠다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거점으로 가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병사들이 만류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금 거점으로 가방어전을 준비 한다 한들, 버티기 힘들다. 아군의 모든 전력은 고작해야 칠십여 명에 불과한 상황. 아무리 용을 써도 수백을 막기에는 무리다.
슬쩍 시선을 들어올려,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남은 시간 : 51: 47]
50분. 50분만 도망쳐 다니면 된다.
꽤 위험한 일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살아남을 자신이.
나는 내 능력치와 남은 포인트를 상기했다.
[근력 14]
[민첩 23]
[내구 5]
[체력 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40pt 입니다.)
40pt가 남아있다.
이걸 모조리 능력치에 갈아 넣는 다면. 승산이 있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
"체력. 10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체력'을 1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변화가 일었다.
몸속 뜨거운 혈기가 끓어 넘쳤다. 심장이 쿵쾅이고 근육이 맥동했다.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자심감이 올라왔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산소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기묘한 고양감.
허나 아직 내 강화는 끝나지 않았다.
"민첩. 30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민첩'을 3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3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내가 그리 읊조린 즉시.
몸에 변화가 일었다.
전신의 근육이 개변하기 시작했다.
더 빠르게, 더욱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변화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크으으윽!"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구에 저릿한 통증이 이었다. 마치 칼로 후비듯, 날카롭고도 강렬 한 통각. 그것이 안구에서 시작해 시신경을 따라, 두뇌를 헤집는 듯했다.
너무나 심후한 고통. 그에 나는 눈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였다.
- 띠링!
안내창이 떠오른다.
['능력치 : 민첩' 이 50을 돌파했습니다!]
[동체시력-리미터가 해제되었습니다!]
[반응속도-리미터가 해제되었습니다!]
지금 내 근육뿐만이 아닌, 안구 와 신경까지 강화되고 있다.
안구의 시신경부터 시작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두뇌. 그리고 전신에 퍼져있는 운동 신경망까지. 그 모든 것을 상향시키는 것이다.
더 빠르게 적을 인식하고, 더욱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인장님?"
병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 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휘몰아치던 고통이 가라앉아있다.
나는 천천히 머리로 가져갔던 손을 떼고 바로 섰다. 그리고는 내 몸을 훑었다.
군복을 입고 있어 내 근육을 관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신체가 개변되었다. 지금 내 몸 은 과거의 나보다도 훨씬 높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내 정보."
능력치를 확인했다.
- 띠링!
[한지훈][4번 백인장]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14]
[민첩 53]
[내구 5]
[체력 1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0pt 입니다.)
민첩이 53, 체력이 19가 되었다.
아주 불균등한 능력치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른 능력치는 많아봐 야 20에 근접할 정도인데, 오직 민 첩만이 무려 50을 돌파해버렸다.
방금 전보다 두 배에 달하는 민 첩 수치.
"하하."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가볍다. 아예 무게가 느껴 지지 않는 듯 아주 편안하다. 이 몸뚱이를 한계까지 가속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더해 온몸에서 기력이 끓어 넘쳤다. 언제까지나 달리고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막대한 능력치의 성장.
"카일."
"…예. 백인장님."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호출에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 는데, 아무래도 내 분위기가 변화한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녀석에게 말한다.
"지시했던 내용을 이행해라. 산의 동쪽 방면으로 가, 산개해있는 적 사냥."
카일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 어 둑한 야산을 바라봤다. 산 곳곳에 흩어져있던 횃불의 빛이 완전히 모 여 정렬되어있다.
공국군이 부대를 재규합했다. 곧 놈들은 이쪽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나는 놈들을 유인한다."
무려 수백이다. 제아무리 능력치 를 상향했다 한들, 혼자서 놈들을 제압하거나 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 능력치라면.
유인하며 시간을 끄는 것 정도 는, 가능할 것이다.
"가라, 카일."
"… 백인장님."
내 무모한 행동에 염려하는 것일 까. 녀석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처 발을 떼지 못하는 모습.
이쪽을 걱정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나는 재촉했다.
"어서 가라, 카일! 명령 불복종은 처형이다."
검을 들어올렸다. 지금 당장이라 도 휘두르려는 듯이.
하지만 카일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안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녀석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처형하진 않을 것이라는 걸.
놈은 잠시 이쪽을 주시하더니.
"명령을 받듭니다!"
처억.
절도 있게 경례하고는, 병사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북쪽을 바라봤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수십여 개의 횃불. 놈들이 마침내 움직이고 있다.
눈깔을 굴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44: 07]
약 45분. 그동안 바쁘게 도망쳐 야 한다.
파앙!
내 신형이 앞으로 향했다.
* * *
한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주위에는 약 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도열해, 산을 타 오르고 있다. 그들이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향한다.
한스가 나직이 읊조렸다.
"아직 제국군은 찾지 못했는가."
"예! 백인장님. 적의 모습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퇴각한 것 같습니다."
병사의 보고에 한스는 고개를 끄 덕였다.
'병력을 규합하니 적의 공격이 멎었다.'
사실, 이런 야전에서 병력을 뭉 치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 행동이다. 밤의 어두운 시야 속, 횃불의 빛은 위치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매복과 원거리 화살공격에 취약하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각개격파당하는 것은 안 될 일. 때문에 한스는 다시 병력을 추슬러, 백인대로 병합했다. 그러자 적의 공격이 멎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스와 휘하 공국군은 산을 타고 전진해갔다. 백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밤의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산의 정상으로 향해간다.
얼마나 갔을까.
"백인장님!"
한 병사가 소리 질러 한스를 찾 았다. 대열의 가장 선두에 있던 병사였다.
한스가 그 병사를 바라보고, 병사는 큰소리로 알려왔다.
"저길 보십시오! 제국군을 발견 했습니다!"
병사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에 한스는 시선을 옮겨 병사가 가리킨 곳을 주시했고.
"뭐 순간, 숨을 멎을 수밖에 없었다.
대열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위 위. 어떤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라고 알리는 것일 까. 청년은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청년이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렸 던 횃불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음영에 가려졌던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투구 밖으로 삐져나온 검은색 머리카락.
"설마…!"
익숙한 얼굴이었다.
청년이 가슴팍까지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투구 안쪽, 얼굴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뒤, 번들거리고 있는 암흑색 눈동자. 차갑게 가라앉 은 얼굴.
청년은 그가 알고 있는 이였다.
자신의 초계망을 돌파했던 병사, 그리고 거점에서는 자신을 제압했 던 병사.
번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 던, 검은머리 병사.
그가 저 바위 위에서 한스를 주 시한다.
한스가 크게 외쳤다.
"저놈을 쏴 죽여라!"
그의 외침과 동시.
화살 세례가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