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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17화 (17/390)

17화.

척후조를 움직여 계속해 산을 타고 올랐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 보니, 본대가 약간 멀어진 곳에서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다.

본대의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갈랜.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살려주지 않을 거다."

과거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를 했을 적.

나는 갈랜을 여러 번이나 살려줬었다.

사실, 살린 이유는 별것 없었다.

아군이었으니까. 내 상관이었으니까.

다소 짜증나는 NPC이긴 하지만, 위기에서 건져낸다면 점수를 많이 얻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구하 기 위해 움직였었다.

허나 나중에는 후회했었다. 놈의 개짓거리가 점차 심해졌으므로.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적 천인대가 이 근처에 자리해 있다. 놈들의 동향을 파악하라.]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돌격! 돌격하라, 한지훈! 놈들의 전열로 뛰어들어 시선을 끌어라!]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아군이 퇴각해야 한다! 한지훈, 네놈의 척후조가 시간을 벌어라! 놈들의 발을 묶어두란 말이야!]

때로는 척후로, 때로는 돌격대로, 때로는 주력이 퇴각하기 위한 미끼 로.

제멋대로 이용당했었다.

그야말로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했었다. 놈의 말도 안 되는 명령 때문에 게임오버 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었다.

그저 게임이었으니까.

아무렇게나 막 퍼주는 NPC가 있는가 하면 짜증나는 NPC도 있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여겨 마우스를 놀려 댔었다.

당시에는 어째서 그리 지랄 맞게 행동했는지. 그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직접 놈의 언사를 온전히 경험한 지금, 나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갈랜은 평민을 혐오한다.'

지독한 귀족주의자.

놈은 오직 귀족만이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으며, 평민은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게임에서 그리 나를 굴렸 던 것이다. 평민 주제에 전공을 세우는, 꼴 뵈기 싫은 병사를 치워 없애버리려고.

"그래봤자 남작에 불과하지만."

픽 웃으며 고개를 앞으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꼴값 떤다는 감상밖에 안 떠오른다. 작위 중 가장 아래인 남작에 불과한 놈이 평민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

뭐. 지금 와서 생각해봤자 쓸데 없는 일이다.

어차피 놈은 곧 죽을 테니.

"십인장님. 정상입니다."

앞서 가던 카일이 그리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오르막이 끝나고, 산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나는 조원들에게 다시금 강조했다.

"내가 한 말. 잊지 마라."

"백인장 근처에 가지 말란 것 말씀입니까?"

"그래."

카일을 비롯한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 번이나 강조했기에, 그들은 결코 백인장 근처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좋아! 드디어 도착이군."

갈랜이 이끄는 백인대 주력이 정상에 도착했다.

오랜 행군 끝에 도착해서 기쁜 것일까. 아니면 어서 임무를 완수하고 싶은 의욕에 찬 것일까.

놈은 아무런 방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본래라면 거점 정찰을 지시해야 할 터인데도.

"… 자."

나는 시선을 돌려, 내 휘하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우리는 외곽 숲속에 몸을 숨긴다."

"몸을 숨긴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사들 중 몇몇이 물어왔다. 하기야 궁금할 것이다. 목표 거점에 도착했으니 , 이제 주위를 장악해야 할 이때. 난데없이 매복지시라니.

"일단 움직여. 설명은 좀 있다 해주지."

이후 우리는 거점 인근 숲속에 매복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눈길이 잘 안 가면서도,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와 병사들이 막 몸을 숨겼을 때였다.

"십인장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카일이 나무에 등을 기대며 그리 불평했다.

"정상 거점을 차지했습니다. 이제 여기를 완전히 정복하고 비콘만 설치하면 우리 임무는 모두 끝나는 것 아닙니까? 백인장 근처에 접근 하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여태껏 명확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기에, 많이 답답한 듯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병사들을 바라보니 그들 또한 눈가를 찌푸리 고 있었다. 어째서 영문 모를 명령을 내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이유를 알려주지."

슬슬 알려줘도 될 때다. 이쯤이 면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을 터이 니.

"네.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어서 알려주십시오."

내 말에, 병사들이 다시금 이쪽을 주시한다.

녀석들의 얼굴에 자리해있는 감정이 바뀌었다. 불만에서 호기심으로.

시커먼 사내자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퍽 웃겨, 나 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설명을 시작했다.

"갈랜 알디니. 놈은 치명적인 실수를 몇 가지나 저질렀다."

병사들이 집중해 내 말을 경청한다.

나는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먼저 첫 번째. 놈은 적 척후병 이 있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행군 중 봤던 척후조. 생각해보면 명백히 이상했다.

하필이면 거점으로 가는 길목에 놈들이 있었다. 평소 적 척후들은 기지 근처를 탐색하는 것이 고작일 터인데 말이다.

물론 수상한 건 놈들의 위치뿐만 이 아니었다.

"더해 공국 척후 놈들은 아무런 짐이 없었다. 완전히 맨몸이었어.

공국군 주둔지에서 왔다면 분명 식량을 가지고 있어야 했었는데 ."

저 멀리, 공국군 기지에서 정찰 나왔다면 식량이 든 커다란 배낭을 지고 있어야 할 터인데. 녀석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치 바로 인근 지역에서 온 것 마냥.

이는 단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거점은 이미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다."

공국 놈들은 이미 거점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군 중 발견했던 척후 조는, 거점으로 접근하는 제국군을 관측하기 위한 공국측 초계병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인장 갈랜은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

"거점이 이미 장악되었다니요?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적병이 안 보입니다."

"안 보일 수밖에. 계속 들어 봐 라."

나는 검지에 이어 중지까지 피고는 계속해 말했다.

"두 번째. 녀석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공국측 척후병을 놓쳐버렸다."

척후조는 반드시 죽여 버려야 하는 적이다. 놈들이 살아 돌아간다면 아군의 움직임이 그대로 새어나가 므로.

허나 갈랜은 적 척후조를 완전 섬멸할 수 있었는데도 놓아줘 버렸다. 오직 내게 책임을 전가하고 모 욕하기 위해서.

"덕분에 공국 놈들은 우리 움직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즉 아군 백인대 규모 병력이 고지대 거점으로 향한다는 것을 놈들이 미리 알게 된 거다."

"… 설마."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점점 굳어 진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점차 깨달아가는 것 같다.

약지를 펴며 이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놈은 정찰 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제국 백인대는 대부분 2, 2, 6구성을 취했다.

척후조 2개 십인대. 궁병조 2개 십인대. 전투조 6개 십인대.

당연히 우리 백인대 또한 같은 구성을 따랐고, 스무 명의 척후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척후병의 주요 임무는 다름 아닌 정찰.

허나 갈랜은 척후병을 제대로 운 용하지 못했다.

"놈은 척후조를 정찰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길잡이로만 운용했다."

멍청한 짓이었다. 전투에서 정보 의 중요성을 간과하다니.

갈랜은 임무를 시작한 이후 내내, 척후조에게 정찰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길안내만을 맡기고 태평하게 군을 움직였을 뿐.

"만약, 거점에 진입하기 전 정찰을 명령했다면… 괜찮았겠지만. 녀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려하시는 겁니까?"

병사들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주 시한다.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려 거점 중앙을 바라봤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백인장 갈랜.

녀석은 병사들에게 비콘을 설치 하라 지시하고 있다.

"간단하다. 이거점은 이미 공국 놈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우리의 접근을 눈치챘고, 심지어 이쪽은 거점 정찰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병사들이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검의 그립을 잡으며 이어 말했다.

"공국 놈들은 이미 매복해있다. 곧 기습이 있겠지."

"기습이라니! 그럼 백인장에게서 떨어져 있으란 건…."

"그래. 공국 놈들이 기습한다면 가장 계급이 높은 갈랜을 먼저 노 릴 거다. 지휘관은 언제나 제 1목 표이니까."

슬쩍, 시선을 돌려 거점의 갈랜을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탁 트인 공간에서 비콘 설치를 진행하고 있다.

"위험한 놈 근처에 있으면 안 되 잖아."

내가 그리 말하는 즉시.

- 피잉!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화살 세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핑, 피잉, 쉬익. 파공성이 어지러이 울려댔다.

수십여 발의 화살 궤적. 그것들 이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중앙에 무방비하게 서 있던 지휘관 갈랜이었다.

"크악!"

갈랜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왼팔에 화살이 박혔다.

퍽, 콰직. 푹.

화살이 계속해 날아와 갈랜과 그 주위에 쇄도한다. 녀석의 정강이에, 무릎에, 옆구리에. 날카로운 화살촉 이 파고들어 갔다.

갈랜이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경갑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그 의 머리와 가슴팍을 보호해줄 뿐이었다. 다수의 화살이 갈랜에게 적중했다.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공국 군은 갈랜이 몸을 가릴 수 없는 공 터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시작했다.

"매복! 매복이다! 당장 전열을… 허억!"

백인장 옆에 있던 차석이 소리치던 와중, 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공국군의 화살이 그의 모가지를 꿰뚫었으므로.

목이 꿰뚫린 차석이 나자빠졌다. 화살이 계속해 날아온다. 병사들이 화살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도망 치는 이들 중 상당수가 화살에 맞 아 쓰러진다.

나는 그 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기습당하니까 어떻게 하지 를 못하네."

너무나 무방비한 상태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기습당했다.

제아무리 강군인 제국군이라 한 들, 이렇게 무방비한 상황에서 기습 당했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일 이다.

나는 검을 쥔 채 갈랜을 바라봤다.

"커허, 커어어…!"

녀석은 신음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화살이 팔다리에 박혀있고 옆구리에도 깊이 파고들어있다.

꽤나 중상. 아직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어가고 있다.

녀석을 가만히 놔둔다면 곧 죽을 목숨이리라.

"모두 주목!"

나는 주위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척후 조 대원들이 나를 주시한다.

"백인장은 중상을 입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백인장은 곳곳에 화살을 맞아 바닥을 기고 있다. 정상적인 지휘를 바랄 수 없다.

"차석은 죽어버렸다."

백인장 옆에서 있던 차석은 화살에 맞아 목이 꿰뚫려 즉사했다.

"카일, 대답해라. 백인장과 차석이 모두 지휘 능력을 상실했을 때, 백인대 지휘권은 누구에게 계승되지'?"

"백인장과 차석 둘 다 지휘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가장 앞 번호 조 의 십인장이…."

"그렇지."

나는 1번 척후조의 십인장이다.

백인장과 차석이 없는 지금, 가장 최선임 병사.

"내가 백인대 지휘권을 계승하겠다."

-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 술'을 상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킬을 상향하시겠습니까?]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수락/거절]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백인대 지휘권을 계승받아, 스킬을 상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내.

나직이 대답한다.

"수락."

직후, 정보가 내 뇌리에 몰아치 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백인대를 장악할 수 있는지. 어찌 움직여야 보다 효율적 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지.

승리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하는 지.

다양한 지식이 머릿속을 가득 메 워갔다.

내가 그 정보를 모조리 받아들였을 때,

- 띠링!

다시금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이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로 상향 되었습니다!]

['전술창' 의 등급이 올라갑니다!]

['부대원 정보' 가 해금되었습니다!]

"좋아."

검을 들어올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 탁 트인 거점을 바라봤다.

공국 놈들의 활 공격이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동시 수풀의 음영 진 곳에서 하나둘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 전열을 갖추고 있다.

활 공격이 끝나고. 돌진을 준비 하는 모습.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백인대 지휘술 활성화."

- 띠링!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이 활성화됩니다.]

상향된 스킬을 발현시켰다.

이제 공국 놈들을 쳐부수는 것만 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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