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나는 조원들을 이끌고 조심스레 공국 척후조에게 접근했다.
본대의 모습을 살피느냐 여념이 없는 것일까. 아직 우리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직이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무기 준비해."
내지시에,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창을 들어올렸다. 나 또한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하는 날 선 발검음은 들리지 않았다. 적이 눈치챌까 조심해 뽑아들었으므로.
"병력을 나눠 움직인다. 카일, 데 이드, 그리고 람펠과 아르덴. 너희 들은 저기 놈들의 퇴로지점으로 가 매복해있어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녀석들을 급습한다."
"명령을 따릅니다."
바스락, 바스락, 부스럭.
네 명의 병사들이 천천히 매복지 점으로 향했다.
나는 그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곤, 주위 병사들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내가 먼저 돌진하겠다. 나머지는 뒤따라 와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공국 병사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열 명으로 이루어진 공국 척후 조. 놈들 전부를 처치하는 건 힘들 겠지만, 적어도 지휘관 놈이라도 잡아야 한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녀석들을 살폈고, 곧.
"찾았다."
적의 지휘관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공국 병사들과 달리, 간소 하게나마 경갑을 갖춰 입은 놈. 녀석의 투구에는 십인장 마크가 확실히 그려져 있다.
저놈이 대가리다. 저놈부터 죽여 야 한다.
지휘관은 공격의 제 1목표이므 로.
"후우."
심호흡하고, 검을 쥐었다.
지휘관이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
이제 급습을 준비할 차례.
최적의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놈들의 긴장이 사라지고, 불의의 습격에 곧장 대처하지 못하는 순간.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하니.
숨죽여 공국 병사들을 관찰했다.
놈들이 바라보는 방향, 보폭, 시야, 동선. 그것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곧, 최적의 순간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고 있을 때. 경계가 옅어지고 긴장이 풀린 순간.
바로 지금이다.
"가자!"
파악!
나는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잘한 나뭇가지와 풀을 지르밟으며, 도약한다.
내가 노리는 것은 적 지휘관.
"뭐.4"
방금 전 점찍어놨던 사냥감이다.
지휘관이라곤 하나, 경험이 일천 한 것일까. 놈은 내 급습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저 정도라면 쉽게 죽일 수 있다.
파앙!
도약력을 살려 검을 휘둘렀다. 한껏 가속된 검날이 반월 모양의 검광을 그리며 녀석에게 짓쳐들었다.
서걱. 미약한 절삭음. 그와 함께 붉은색 핏줄기가 놈의 목에서 치솟 았다.
"꺽…."
공국 십인장은 핏물이 울컥이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더니, 힘없이 쓰 러 졌다.
순식간이었다.
"지휘관 처치."
놈 또한 나와 똑같은 십인장 계 급을 지녔으나, 경지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녀석은 일격에 죽 어 버렸다.
쿠응!
진각을 밟으며 검날을 회전. 바로 옆에 있던 다른 공국 병사를 향 해내뻗었다.
푸욱! 내 검신이 적병의 복부를 꿰뚫었다. 녀석의 입에서 피가 울컥 치솟는다.
단숨에 두 명을 처치하고는, 크 게 외쳤다.
"다 죽여 버려!"
그와 동시, 숨어있던 제국 병사들이 하나둘 급습해 공국 병사들과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적 병사 여럿이 쓰러져갔다.
성공적인 급습.
나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적의 반 절가량을 처치할 수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당장 몸을 빼…!"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녀석들은 잽싸게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하지만,
"카일! 그쪽으로 도망친다! 막 아!"
놈들이 도망치려 한 방향에는, 이미 내 병사들이 매복해 있다.
퇴로에 자리 잡고 있던 내부하 들이 도망치는 공국군을 쳤다. 소수 의 적병이 추가로 제거된다.
적 두셋이 창칼에 꿰뚫려, 피를 흘리며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병사들이 창칼을 내려 박아 놈들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버린다.
허나 완전히 놈들을 전멸시킬 순 없었다.
"젠장! 두 명 놓쳤습니다!"
카일이 분하다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의 검날에 들러붙어있던 핏물이 후드득,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십인장님! 어떻게 합니까? 추격 합니까?!"
녀석이 내게 물어왔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도망가는 공국 병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산을 탄 경험이 나름대로 있는 것일까. 살아남은 두 명의 적병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수풀을 헤치고,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타고 올랐다.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니. 추격해봤자 잡을 수 없을 거다."
놓친 적 둘 모두 아무런 방어구나 배낭을 착용하지 않았다. 더해 들고 있던 창과 검마저 버렸으니 , 몸이 가벼울 터.
체력과 민첩이 어지간히 높지 않다면 잡긴 힘들 것이다.
백여 명의 본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포기하는 것 이 현명한 일.
"포기해라.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
"… 망할!"
카일이 아쉬움에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나 또한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이를 갈았다.
"갈랜 알디니. 빌어 처먹을 개자 식."
놈은 전투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 입했다. 때문에 완벽하게 전멸시킬 수 있던 적 척후조가 살아 돌아가 게 되었다.
아마 놈들은 우리 주력의 움직임을 보고할 거다. 앞으로의 전투에 방비할 것은 분명할 터.
전투가 더욱 힘들어 질 것이리라.
"본대로 돌아간다. 다들 이동 준비해."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적 지휘관의 투구를 주워들었다.
척후조가 복귀한다.
"…적 척후조 여덟을 제거했고, 두 명을 놓쳤습니다. 여기 적 십인 장의 투구입니다."
나는 병사들을 데리고 본대로 귀 환. 갈랜에게 보고하며 적 지휘관의 투구를 내밀었다.
갈랜이 투구를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두 명이나 놓친 건가. 1번 척후 조장 한지훈. 귀관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나 보군."
그가 피 묻은 투구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휙, 내던졌다.
탱그랑! 철제 투구가 지면을 구 른다.
"분명 명령하지 않았나? 적 척후 조를 전멸시키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
"헌데. 꼴에 지휘관을 처치했다고 투구는 들고 왔군. 네놈 같은 평민 놈은 원래 이렇게 염치가 없는 건가?"
놈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걸.
그러나 속에서 분노가 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빌어먹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확실하 게 공국 척후조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갈랜은 내 제안을 받아들 이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문책하고 있다.
"쓸모없는 놈. 하긴, 평민이니 어 쩔 수 없었겠지. 제대로 된 군사 교육도 안 받은 놈이니. 아니. 애초교육이란 걸 받아본 경험 자체가 없겠지. 네놈, 글은 읽을 줄 아나?"
녀석이 계속 비아냥거린다. 나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네깟 버러지가 아무리 발악하든 비천한 신분을 뒤집지는 못한다. 네 어미가, 네 아비가, 계속 보잘것없는 평민으로 살았던 것처럼."
제 말에 제가 심취한 것일까. 갈 랜의 언사는 점차 그 수위를 높여, 어느덧 패륜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모욕당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므로.
가슴속에, 조금씩 분노가 싹튼다.
나는 마침내 결정했다.
'역시 죽여야겠어.'
일단 녀석이 행동하는 꼬라지를 두고 보려했다. 상관 살해를 시도 하는 건 나에게도 나름의 위험이 존재했으므로. 정 방해된다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여겼었다.
허나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갈랜의 태도는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다. 아무리 전공을 세우고 몇 번이나 목숨을 구원해준들.'
놈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저 갈색 눈동자 뒤로는 짙은 오 만과 일그러진 우월의식이 잠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게임 속에서도 그랬다.
나는 항상 녀석을 구해줬었다. 놈의 허술한 명령을 억지로 수행해 임무를 기적적으로 완수해냈고, 녀석의 목숨이 위험했을 때마다 기꺼 이 구출해줬었다.
하지만 갈랜의 저 태도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결국 놈을 포기해버렸었지.
'그래. 죽여버리자. 게임 속처럼.' 달라진 것은 없다.
녀석은 게임 속에서 나에게 죽었 었고, 이곳에서도 내게 죽을 뿐이다. 다만 그 시기가 심히 앞당겨 졌을 뿐.
죄악감은 없다. 장기적으로 해가 될 장애물을 미리 치워버리는 것뿐 이니.
그리고 내가 그렇게 결정하는 그 순간.
나는 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네놈 평민들은 그저 우리 귀족 의 말에 복종하면 된다. 너희들은 본래 그러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신기하게도 분노가 점점 가라앉 아갔다. 분명 놈은 계속해 내게 모 욕적인 언사를 쏟아붓고 있음에도 말이다.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금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만한 눈동자, 일그러진 입술, 놈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비 열한 웃음이 떠올라있다. 이렇게 나 를 대놓고 멸시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나지 않는다.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때 문득.
' 아.'
갈랜의 모욕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는 이유.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은 얼마 못 가죽을 목숨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모욕을 듣 는다 한들, 아무렇지도 않았다 송장이 주절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재미없군. 길이나 안내해라."
내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자 흥 이 식은 것일까. 갈랜이 고개를 돌려 후열로 돌아갔다.
나 또한 뒤돌아 척후조로 돌아갔다. 조원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고작 두 명 놓쳤다 고 그런 모욕이라니요. 너무한 것 아닙니까?"
병사들이 갈랜의 험담을 주절주 절 떠들었다. 방금 전 험한 꼴을 당하고 온 내 기분을, 나름대로 풀 어주려 하는 것이리라.
씩,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미 내 척후조원들과는 충분한 유대 를 쌓았다.
"자! 모두 주목."
목소리를 높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병사들이 말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한다.
나는 천천히, 조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고는. 그들에게 지시했다.
"정상 거점에 진입하면, 절대로 백인장 근처로 가지 마라."
"… 어째서 입니까?"
다소 뜬금없는 지시.
그에 카일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어왔다.
이미 시나리오를 겪었던 나는 앞 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갈랜이 어떤 일을 당할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허나 곧이곧대로 알려줄 수는 없다. 내 계획이 비틀려버릴 수도 있으니 .
잠시 고민하고는, 대답했다.
"지금은 설명할 수 없군. 아무튼, 백인장에게 접근하지 마라."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어거지로 밀어붙일 수는 있다.
내 말에 병사들이 석연찮은 얼굴 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 사선을 함께 거쳐 온 그들은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이렇게 말해두면 일단 따를 것이다.
'뭐. 궁금해 하는 것 같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지시할 때 합당한 이유를 밝혔었다.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괜찮다. 병사들은 반나절 뒤, 내가 그리 지시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므로.
"좋아. 그럼 이제 갈까."
고개를 들어 올려 전방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다른 산들보다도 한층 높은 산이 보인다.
우리가 확보해야 할 고지대다.
저 산의 꼭대기, 목표 거점에 도착한다면.
갈랜은 죽는다.
"내가 앞장서겠다. 주위 경계하고, 잘 따라와."
백인대가 진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