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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15화 (15/390)

15화.

다음날 정오.

4번 백인대가 기지를 나서 진군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과거 내가 갔던 고지대 거점.

백여 명의 제국군이 대열을 가지 런히 해 진군한다. 그 선두에는 나와, 내가 지휘하는 척후조가 자리해 있다.

문득, 옆에서 같이 행군하던 카일이 말했다.

"백 명 규모 작전이라. 이런 적은 처음이군요."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사실 척후조는 열 명 이상 규모 로 몰려다닐 일이 거의 없었다. 주 임무가 다름 아닌 척후와 탐색이었 기에. 대규모 인원으로 움직일 필요 가 없었으니 .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는 아니었다.

"길잡이라…."

나는 슬쩍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갈랜을 비롯한 나머지 병력 이 뒤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 임무에서, 우리 척후조는 행군의 길잡이 역을 맡았다. 앞서서 움직여 정찰하고 본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백 명이나 있으니 , 든든 하군요. 열 명이서 다닐 때랑은 전혀 다른 기분입니다."

"그렇지. 이 정도면 소규모 적과 조우한다 한들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으니 ."

머릿수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려 백 명의 병력이 함께 이동하는 상황. 항상 날카롭게 긴장하며 움직이던 척후조 병사들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와 카일이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걸어갔다.

얼마나 행군했을까. 문득,

"… 십인장님."

척후조의 다른 병사, 아르덴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나를 불렀다.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녀석을 바라보고, 녀석은 어딘가로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저길 보십시오."

아르덴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보였다.

멀리 떨어진 수풀 속, 어렴풋이 빛나는 무언가.

"… 설마."

나는 눈을 찌푸려가며 해당 지점을 노려봤다. 그러자 가까스로 발견 할 수 있었다.

수풀 사이에 숨어있는 공국군 병사들. 그들은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창과 검을 들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아르덴이 봤던 것은, 놈들이 들 고 있는 창의 반사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열 명 규모의 공국 병사들입니다. 창병 일곱, 검 병 셋. 모두 방어구는 입지 않았습니다."

"적 척후조인가."

대견해 아르덴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찾았다. 저걸 용케도 찾다니, 잘 보이지도 않았을 터인데."

"제가 눈이 좀 좋습니다."

내 칭찬에 아르덴이 히죽 웃었다.

아르덴은 제국 서부 대평원 출신 이라고 한다. 끝없는 지평선이 자리 해있는 그곳 출신 사람들은 대부분 눈이 좋았다. 척후병으로선 좋은 자 질이다.

"모두 정지!"

나는 붉은 천이 묶여있는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미리 정해둔 정지 신호였다.

그에 대열이 정지하고, 후열에 있던 갈랜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지 신호를 보냈더군. 척후조 장, 무슨 일이지?"

"적 척후조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방금 전, 아르덴 이 짚었던 부분을 가리켰다. 수풀 속 번들거리는 반사광이 보인다.

갈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 척후조인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일까. 갈랜은 턱을 괴고 생각을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의 고민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눈깔을 뒤룩뒤룩 굴려가 며 계속 고민하는 꼴이 이 갑작스 러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듯했다.

우유부단하고도 무능한 녀석. 살짝 도와줄까.

"백인장님. 놈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놈들이 이쪽의 진군 정보를 본대에 전달한다면, 적들이 방비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을 지 어보이며, 백인장에게 의견을 밝혔다.

"저희 1번 척후조와 2번 척후조 가 들키지 않게 놈들의 뒤로 돌아 가 매복하겠습니다."

슬쩍, 눈동자를 돌려 시야의 구석을 바라봤다.

이미 전투지휘술 스킬을 발동시 켜놨기에, 미니맵이 떠올라있다.

"본대가 전진한다면 녀석들은 후 퇴할 것이고, 그때 놈들의 퇴로에 매복해있는 저희 척후조가 덮친다 면 수월하게 놈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미니맵을 보는 순간 떠오른다.

어디로 가서 매복해야 할지. 아 군 주력의 접근에 적 척후조가 어디로 퇴각할지. 어떤 지점에서 덮쳐 야 최대의 공적을 얻을 수 있을지.

내 제안을 따른다면 손쉽게 적 척후조를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갈랜은.

"건방지군."

"… 백인장님?"

노골적으로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윽박질렀다.

"한지훈! 네놈이 전공을 몇 번 세운 걸 알고 있다. 공국의 전쟁의 도를 알아낸 것도 자네의 척후조라 고 했지. 하지만,"

저벅, 갈랜이 발걸음을 옮겨 내 게 성큼 걸어왔다. 녀석의 커다란 키가 더욱 가까워진다.

"하지만 네놈은 병사다. 나는 사 관이고."

그가 손가락으로 꾹, 내 가슴팍을 찔렀다. 정확히는 가슴팍에 매달 려있는 십인장 계급장을.

"군사 교육조차 받지 않은 애송이가, 어디서 내게 제안이지?"

갑작스러운 행동. 그에 대한 내 감상은 실로 단출했다.

'뭐지? 미친놈인가.'

제국군은 상하체계가 엄하다. 허 나 그것은 명령하고 수행하는 것에 한해서였지, 오히려 하급자의 의견 상신은 장려하고 있다.

헌데 갈랜은 내 제안이 아니, 제안했다는 행위 그 자체가 마음에 안 든 듯했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것 마냥 말이다.

"자네는 군사학교라도 나온 건가? 아니면 귀족작위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놈이 내 계급장을 계속해 찔러댔다. 마치 너는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기분이 더럽다.

"병사면 병사답게, 평민이면 평민 답게 명령을 따라라. 다시 주제넘게 제안한다면, 그때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신분제 사회라는 것인가.'

잊고 있었다. 이 세상은 신분제 사회다. 평민과 귀족, 지배자와 피 지배자가 나뉘어있는.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내던 상급자는 천인장 그레드가 고작이었다. 그는 병사 출신인 자라 격 없이 휘하 를 대했고, 그렇기에 이 세상이 신분제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었다.

"천인장이 평민이니, 이런 멍청한 놈이 활개치고 다니는군."

하지만 눈앞의 백인장은 귀족 출신이었다.

기껏해야 남작위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귀족은 귀족. 그리고 갈랜 은 귀족들 중에서도 권위 의식이 특히 강한 편이었다.

"좋아. 명령이다."

그는 공국 척후조가 있는 방향을 똑바로 가리켰다.

"척후조장 한지훈. 너희 1번 척 후조가 단독으로 공국 놈들을 제거 해라."

"… 무슨 말씀이십니까."

"못 들었나? 지금 당장 가서, 공국 척후 놈들을 찾아 전멸시키라는 거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물론 나는 강하다. 더해 내 휘하 병사들 또한 전투경험 풍부한 베테 랑이 다수. 약해빠진 공국 척후조따 위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놈들이 물러서지 않고 싸울 때의 이야기.

"불가능합니다. 분명 놈들은 도주 할 겁니다."

척후조의 제 1목표는 정보의 수집과 전달이다. 놈들은 우리가 접근 하는 것을 알아채는 즉시, 온 힘을 다해 도망칠 것이 분명할 터.

"놈들을 추격한다 한들. 모조리 전멸시킬 수 없습니다."

만전의 상태일 때라면 몰라도, 우리 또한 행군하며 체력을 소모했다.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봤자 놓칠 것이 뻔한 일.

"명령을 재고해주십시오."

갈랜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 또한 지지 않고 놈을 마주봤다. 그러자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놈의 눈동자 속에 자리해있는 것은 경멸. 평민에 대한 멸시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병사."

이제 녀석은 내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가서 죽이라고."

"하지만."

"명령 불복종인가?"

스룽. 녀석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소음이 인다.

"작전 중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 형이다. 내 명령을 듣지 않을 건가? 아니면 설마, 그 '평민' 천인장 이라도 믿고 있는 건가?"

이제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내가 말한 작전안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 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싫은 것이다.

평민 주제에 전공을 세운 내가 , 평민 출신 천인장 그레드의 비호를 받는 내가 .

'염병할 놈.'

이를 악물며, 경례했다.

"…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쯧."

철컥. 녀석이 검을 검집 안에 수납했다.

"가서 공국 척후조를 죽여라."

갈랜은 그리 말하고는 본대 방향 으로 걸어갔다.

나는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가닥이 보이는 것 같은데."

사실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갈랜을 어떻게 처리할지.

놈은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쓰레기다. 허나 그럼에도 내 상관이며, 아군이었다. 그렇기에 결정을 미루 고 있었다.

놈을 죽여 없애버릴지. 혹은 안 보이는 곳으로 처박아 버릴지.

하지만 방금 전 놈의 태도를 마주하고는, 반쯤 결정이 기울었다.

'역시 죽여야 하나.'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어차피 기회는 아직 멀었으니까.'

짜증나고 무능한 놈이기는 하다 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죽여버리는 건 곤란하다. 프래깅의 시도는 조심 해야 하니. 만약 적발된다면 오히려 이쪽이 위험해질 것이다.

고개를 가로젓고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자! 모두 준비해. 공국 척후조를 처치하러 간다."

병사들이 하나둘 움직인다.

"… 평민 주제에."

갈랜은 한지훈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다.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동자. 들었던 특징과 똑같다.

그는 재차 혀를 차며, 읊조렸다.

"저딴 놈이 백인장이라. 말도 안 되지."

갈랜은 며칠 전 배속 당시, 다른 백인장들에게 주워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 한지훈?

- 천인장님은 그 병사를 백인장 까지 키울 심산이라는군.

- 병사가 백인장이라니. 힘든 일 아닌가?

- 전공이 있다. 공국의 대규모 공세를 알아차렸으니 .

- 더해 병사치고는 검술에 조예 가 있다는군. 저번에 훈련하는 것을 보았는데, 꽤나 검을 잘 다뤘다. 우리 백인장급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 혼자서 죽인 적병이 벌써 수십이라지.

- 그리고 곧 공국과의 전쟁이 있다. 전공을 세울 기회는 많아.

- 하긴, 그레드 님도 전쟁 중 사 관이 되었지 않았나?

불쾌한 이야기였다.

고작해야 병사. 일개 평민에 불과한 이가, 자신처럼 백인장 계급을 달 수도 있다니.

"망할. 이 기지에 배속된 것부터 가 마음에 안 들어. 평민 아래에서 복무해야 한다니."

사실 갈랜은 지독한 귀족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상관은 다름 아닌 평민 출신 사관, 천인장 그레드.

남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이, 평민 출신 장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에게 있어 더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한지훈…."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본다. 한지훈은 어느새 저 멀리 멀어져 있다.

녀석을 주시하며 갈랜은 중얼거렸다.

"기회만 생기면 쳐내버려야지."

지금은 곤란하다. 자신이 속한 백인대의 길 안내를 해야 하니.

하지만 거점에 도착하고, 한지훈 의 이용가치가 사라진다면.

그는 한지훈을 어떻게든 희생시 킬 생각이다. 녀석이 눈가에 계속 거슬렸으므로.

갈랜이 질척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없애버릴 기회는 많아."

한지훈이 자신의 휘하 병사가 된 이상, 그를 제거할 법한 방법은 너무나 많았다.

위험지역에 밀어 넣거나, 혹은 녀석의 척후조를 미끼로 쓰거나, 아니면 무모한 돌격을 지시해도 된다.

명령권을 쥐고 있는 이상. 한지훈은 자신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작전 중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형이니.

그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놈이 죽는다면, 그레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래."

갈랜이 한지훈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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