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나는 달렸다.
"후욱!"
가슴속 공기를 토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숨이 찼다. 폐가 터질 것 같다. 심장이 가혹한 운동에 격렬히 맥동 한다.
지금 나는 파트라헴 전진기지 인근 야산을 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체력을 높여야 해.'
나는 내 능력치를 상기했다.
[근력 13]
[민첩 16]
[내구 5]
[체력 7]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7pt 입니다.)
상당히 불균등한 능력치다.
근력과 민첩은 이제 두 자리 수에 이르렀다. 허나 내구, 체력, 마나는 제자리걸음.
워낙 올리기 힘든 마나는 차치하고, 내구와 체력이 문제다.
[내구 5]
[체력 7]
이전 능력치에 비해, 내구가 1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한스에게 얻 어맞아 능력치가 소폭 증가한 것 같다.
쯧, 혀를 찼다.
'이래서야 오래 싸울 수 없어.' 내구는 개인의 신체가 충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아픔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현실의 맷집이나 방어력 같은 느낌.
그리고 체력은 말 그대로 현실의 '체력'이다.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력'이나 '지구력'쯤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내 능력치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저 둘이다.
내구 그리고 체력.
둘 다 순간적인 전투 능력보다, 전투의 지속능력을 결정짓는 능력치다.
사실, 여태까지는 문제 되지 않았다.
접전이 있다 한들 십인대 규모의 작은 싸움뿐이었다. 교전은 순식간에 끝났고, 방어구 덕분에 낮은 내 구를 보완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아니다.
고개를 돌려, 주위 풍경을 바라 봤다.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증축된 전진기지 파트라헴의 모습.
기지 인근에 다수의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느새 높아진 성벽, 정비된 도로, 그리고 주위를 살피는 망루와 순찰중인 군인들까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보다 대규모로 확장되어가는 기지의 모습.
그것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전면전이 코앞이네."
곧 전쟁이 시작된다.
때로는 백 명, 때로는 수천수만 단위의 싸움에 휘말린다.
전투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당연 한 일.
근력과 민첩은 충분히 성장시켰다. 이제 단순히 적 병사 정도는 순식간에 처치할 수 있게 되었으니 . 앞으로는 체력과 내구를 키워야 한다.
"후욱!"
폐의 공기를 내뱉으며 달렸다. 땅을 박차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뛰어갔다. 몸에 흐르는 땀이 지면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그렇게 나는 하루 종일 질주했다.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체력 +1]
체력이 조금씩 늘기 시작한다.
"어서 오십시오. 마법단장님."
처억. 천인장 그레드가 경례했다.
과연 오랜 군 생활을 한 군인이 라는 것일까. 그의 경례에는 절도가 넘쳤다.
하지만 그런 그의 경례를 받은 이, 라브리에 마법단장 제피르는 표정을 찌푸렸다.
"참 군인이라는 족속은 이해가 안 되는군. 이 경례라는 것을 무슨 사명인양 하고 있어. 어딜 가기만 하면 경례, 경례, 경례… 지겹다 지 겨워."
"하지만 단장님, 군의 위계…."
"됐다. 위계 따지는 건 내 마탑 으로 족해. 밖에서는 좀 편하게 지 내고 싶다."
제피르. 그는 제국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라는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의 수장이었다.
회색에 간간히 붉은색으로 장식 되어있는 로브. 그 아래에 자리해있는 얼굴은 놀랍게도 중년에 불과했다. 보통 마법사가 초로의 노인인 것을 생각하면 몹시 놀라운 일.
허나 제피르의 젊은 얼굴은 오히려 그의 유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작 중년이라는 젊은 나이에, 노화 가 억제될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이니.
"즐거운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피르는 집무실의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검은색 궐련을 물더니, 화르륵.
손가락에서 불꽃을 만들어내 불을 붙였다.
"자, 서류 받게. 중앙에서 내려온 작전계획서다."
"…확정입니까?"
"그래. 기지증축계획부터 개전까 지. 모든 것이 정리된 확정계획서다. 거기 보면 황제 폐하의 직인까지 박혀있지."
그레드는 제피르의 말에서류를 살폈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제국 황제의 인장까지 박혀있다.
후욱-. 제피르가 연기를 내뿜었다. 잿빛 구름이 흩어져 연해진다.
"개전 시기는 공국 놈들이 쳐들 어오는 즉시."
궐련을 피며 제피르가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전쟁 계획과, 황제의 의중.
그레드가 경청했다.
"전쟁방침은 반격, 섬멸, 전진, 파괴. 목표는 공국 수도 점령과 공국가의 몰살, 그리고 공국령의 흡수다."
치이익. 제피르가 연초를 손가락 으로 비벼 껐다.
평범한 이라면 화상을 입었겠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피르는 불의 가호를 받은 고위 마법사였기 때문에.
화염과 열기는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
"10년 만의 전쟁이다."
제피르가 클클 웃었다. 그는 다 가오는 전쟁이 진정으로 기쁜 듯했다.
"하지만 아쉬워. 카렌 왕국이나 유목연합, 혹은 연방 자치령 같은, 좀 괜찮은 놈들과 전쟁을 했다면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을 터인 데. 하필이면 공국이라. 이래서야 전쟁을 한 달은 할 수 있겠나?"
"아마, 한 달 전에 종전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게 문제야. 오랜만의 전쟁이지만 그 상대가 그 약해빠진 공국 놈들이라니. 맥이 빠지는군."
그레드는 속으로 질려했다. 제피르가 전쟁광이란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실제는 그보다 더했다.
그는 진정으로 전쟁을 바라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 자네의 보고서 를 읽었다, 천인장."
문득 제피르가 시선을 돌려 집무실의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가 주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중앙의 테이블. 그 위에 을려져있는 지도다.
덜컹. 제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살폈다.
그가 손가락으로 어떤 부분을 가 리 켰다.
"확실히, 이 고지대 거점이 우리 마법사들이 주둔하기에 좋아 보이 는군. 여기라면 우리의 화력을 제대로 놈들의 옆구리에 투사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거점은 확보된 상태인가?"
"아직 입니다."
"그러면 비콘도 설치하지 못했겠 군."
제피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 를 주시하곤, 다시 물었다.
"무시하거나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거점이다. 확보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이주일 뒤, 거점 확보를 위해 한 개 백인대를 보낼 생각입니다."
"한 개 백인대라… 그 정도면 적 정 병력이군."
제피르는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공국 놈들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
정찰 정보가 확실하다면, 저거 점은 너무나 좋은 곳이다. 분명 제국과 공국, 양측에서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일 것이리라.
허나 마법사인 제피르에게는 상관없는 일.
"거점을 차지한다면 보고하게. 그렇다면 내 휘하 전투마법사를 보내 지."
거점을 차지하고 방어하는 것은 병사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는 고개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덜컹. 문이 닫히고, 천인장 그레 드는 한숨 쉬었다.
"좋아. 그럼…."
그는 흘깃, 시선을 옮겨 자신의 책상 위를 바라봤다. 책상 위에는 어떤 서류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거점 점령전 계획서. 시야에 유리한 고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군사 작전의 계획서였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지훈."
이 주 뒤에 있을 거점 점령전에는, 한지훈의 십인대 또한 편성에 들어간다.
그는 기대한다.
"이번에도 전공을 세워라."
한지훈이 다시금 전공을 세우기 를.
그레드는 여전히 평민 출신 장교 가, 자신의 아래에서 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임무가 끝난다면, 전쟁이 코앞이다.
* * *
시간이 흘러갔다. 이주일 동안, 나는 계속해 단련을 거듭했다.
아침에는 달리기, 오전에는 근력 운동, 저녁에는 검술 훈련.
나는 적당한 짬이 날 때마다 몸을 움직였고, 결국 나름대로의 성과 를 얻을 수 있었다.
[근력 14]
[민첩 16]
[내구 5]
[체력 9]
[마나 0]
근력은 1올랐고, 체력은 2올랐다. 민첩과 내구는 변화 없음.
나직이 중얼거렸다.
"역시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훈련 으로 올리기 힘들어져."
내 예상이 맞았다.
밑바닥일 때는 성장이 쉽다. 하지만 잠재력을 개발해나가면 나갈 수록, 성장 속도는 더뎌지게 된다. 능력치를 키우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니.
나는 남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남은 포인트는 17pt 입니다.)
17포인트.
포인트는 중요한 자원이다. 허투 루 쓸 수 없다. 가급적 아껴놓다가, 더 이상 훈련으로 성장이 힘들어질 때. 갈아 넣는 것이 효율적이리라.
사실, 마음 같아선 그냥 지금 당장 포인트를 써버리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이번 미션에서는 요긴하게 쓸 데가 있다. 필요 할 때 사용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주목!"
덜컹.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 중앙으로 향하더니, 스스로를 소개했다.
"갈랜 알디니다. 이번에 재편된 4번 백인대를 지휘할 백인장이지."
그가 말하는 동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역시나 알고 있는 이름이다.
덜컹, 덜컥. 회의실 안에 있는 열 명의 십인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백인장이 경례를 받자 십인장들이 다시 착석한다.
"자네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잘 알겠지."
그가 전면의 커다란 지도 앞에서서, 이쪽을 둘러보았다.
내가 앉아있는 이 방은 파트라헴 기지 지휘부 한 켠에 있는 브리핑 룸이었다.
오늘 아침, 갈랜 알디니가 휘하 십인장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호출했다.
이유야, 당연히.
'곧다음 미션이 있겠지. 여기로 부른 건 임무 전 브리핑을 위해서일 거고.'
이미 게임에서 겪어봤다. 이번에 무슨 미션이 있고, 어떤 이벤트가 일어날지.
이번에도 똑같을 거다.
나는 천천히, 갈랜의 얼굴을 주 시했다.
쯧, 혀를 찼다.
'게임에서 보다 더한데.'
각진 사각턱, 커다란 키, 오만한 눈동자.
녀석이 마음에 안 든다. 이미 게임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 므로.
재수 없는 새끼.
그가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천인장께서 우리 4번 백인대에 명령을 하달하셨다. 임무는 고지대 점령 및 방어. 목표지점은 이곳이다."
그가 지도의 한지점을 가리켰다. 익숙한 지형이었다.
내가 정찰했고, 한스와 전투했던 그곳.
갈랜이 시선을 돌려 이쪽을 주시 한다.
"한지훈. 자네는 이곳을 정찰했었 지."
"그렇습니다."
나는 갈랜의 대답에 답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갈랜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묘한 감정이 어 려 있었다.
혐오. 어쩌면 증오.
' 역시.'
게임과 똑같다. 이미 예상한 반응.
녀석의 말에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놈의 말이 이어진다.
"… 길잡이는 자네의 1번 척후조다. 2번 척후조는 추후 한지훈을 보조해 경계한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서류를 꺼내들었다. 그가 이어 설명을 시작한다.
"일단 우리 4번 백인대의 전력은 척후조가 2개 조, 전투조가 6개, 궁 병조가 2개다. 중장보병은 없다."
방금 전 녀석이 보였던 기색을 뒤로하고, 설명에 집중했다.
척후 2개조, 전투 6개조, 궁병 2개조. 이렇게 4번 백인대를 이룬다.
정석적인 구성이다. 중장보병이 없는 건 아쉽지만, 사실 중장보병은 군단급 군영에서나 볼법하다. 아마 제 3군단이 배치된다면 보게 되리라.
"진군 경로는…."
이후 본격적인 갈랜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이곳저곳 으로 향하고, 동선이 그어진다. 녀석은 열성적으로 무어라 말하지만.
나는 내심 한숨 쉴 수밖에 없었다.
'형편없네. 게임에서 봤던 그대로 야.'
예상대로라고 할까. 갈랜의 전술 적 능력은 너무나 허접했다.
뻔히 노출되어있는 곳에 군을 이 끄는가 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험 지로 돌아가기도했다. 더해 적의 정찰이나 습격에 대한 대책은 전무.
보는 내가 계속해 한숨을 푹푹 내쉴 정도로, 근본 없는 계획이다.
저게 사람새끼인가.
"… 이상이다. 출발은 내일 정오. 그때까지 조원들에게 전파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이상."
녀석의 브리핑이 끝났다. 그와 동시.
- 띠링!
[서브 퀘스트]
[고지대 거점을 확보하라.]
서브퀘스트가 생성되었다.
백인대 규모 전투. 하지만 지휘관이 노답이다.
이번에도 굴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