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주위에서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는 시린 소리가 일 렁 인다.
시선을 내려 산을 타고 올라오는 공국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경갑조차 착용하지 않은 조잡한 무장 상태.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지 않은 듯, 허술한 경계태세까 지.
내가 보아왔던 공국군의 모습 그대로가 자리해있다.
허나 공국군 모두가 허약한 놈들 인 것은 아니다.
놈들의 가장 선두에 있는 놈을 주시했다.
익숙한 모습이다. 입고 있는 것은 질 좋은 중갑, 귀태가 흐르는 외모에, 남자인 주제에 계집마냥 길 게 기른 갈색 머리까지.
내가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삼십인장]
익숙하고도 증오스러운 놈의 이름.
그것이 내 시야 속 홀로그램으로 표시되어 있다.
으득, 이를 갈았다.
'지긋지긋한 새끼.'
녀석의 이름은 신물이 나도록 많이 봤었다. 그만큼 게임에서 자주 마주쳤던 놈이니.
한스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계자였으나, 결국 일가 가 모조리 죽고 공국이 멸망당해 내게 증오심을 품은, 게임 속 나의 대적자 같은 녀석.
놈은 게임 내내 이쪽을 괴롭혀 왔었다.
나는 악연으로 점철되어있던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삼십인장]
["녀석을 죽여라."]
처음 녀석과 조우했을 때.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천인장]
["여기서 또 만나는군, 한지훈. 이번에는 정말 죽여주지."]
나중에, 제국과 공국군이 본격적 으로 전쟁을 벌일 때.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군단장]
["…결국 우리 공국은 멸망하는 가. 허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한지훈!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내 목숨을, 영혼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공국이 멸망할 때.
[한스 요한바르첸][연합군 남부 사령관]
["막다른 길이로군… 이것이나 의 최후인가."]
놈을 마침내 사로잡아, 목을 칠 때.
지독한 놈이다.
놈은 자신의 세력이, 그리고 가 진 병력이 모조리 죽어 갈려나가도 매번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했다. 그리고 이전보다도 더욱 강대한 힘과 세력을 가진 채 내 앞에 나타나곤했다.
게임 초창기부터, 까마득한 극후 반까지.
항상 나를 가로막았다. 공국을 멸망시켰던 내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만큼 녀석의 복수는 집요하고 도, 성가셨다.
쯧. 혀를 찼다.
'…최대한 성장한 뒤에 놈을 만 났으면 했는데 .'
녀석과 마주하는 걸 피하고 싶었다. 너무나 성가시고 집요한 놈이었 으므로. 가진 능력을 키워, 단번에 죽여 버리려 했었다.
후환을 없애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계획은 파탄 나 버렸다. 지금, 놈은 내 앞에 자리해 있다.
어쩔 수 없다. 싸울 수밖에.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읊조렸다.
"민첩. 10포인트 상향."
포인트. 아끼고 싶었다.
하지만 네임드 유닛과 싸움이 목 전이다.
지금은 망설임 없이 포인트를 사용해야 할 때.
- 띠링!
['능력치 : 민첩'을 1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 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곧 변화를 느꼈다.
몸이 가뿐해지고, 발놀림이 경쾌 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람같이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이토록 단숨에 내 신체가 발전하다니.
하지만 아직 포인트는 남아있다. 재차 읊조렸다.
"근력. 5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근력'을 5포인트 상향 합니다]
[상향에는 5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다시금 내 신체가 변화했다.
들고 있는 검이 가벼워졌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경갑이, 마치 천 쪼가리처럼 느껴졌다.
민첩과 근력의 상승.
나는 보다 진보한 내 능력치를 확인했다.
[근력 13]
[민첩 16]
[내구 4]
[체력 7]
[마나 0]
모든 포인트를 근력과 민첩에 꼴 아 박았다.
근력이 13, 민첩이 16이라.
처음으로 두 자리 수의 능력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놈과 직접 싸워본 적 이 없으니 .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나는 주위에서 있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카일. 너는 병사 다섯을 데리고 우측 수풀에 몸을 숨겨라."
"… 후퇴하지는 않는 겁니까?"
"그게 가능하다 생각하나?"
카일은 아무래도 후퇴를 생각한 것 같았다.
하긴, 삼십의 적이다. 과거 여섯 으로 격파한 적이 있지만, 그때가 비정상적인 것이고. 이런 야지의 전투에서는 전력이 적은 측이 후퇴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니.
후퇴. 물론 하고 싶다.
허나 그렇게 할 순 없다.
"이곳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후퇴하고 싶어도, 체력이 안 돼. 싸워야 한다."
한스를 피하고 싶어 서둘렀던 내 결정은 실책이었다. 병사들은 무리 한강행군 때문에 지쳐있고, 그렇기에 곧장 후퇴한다 한들 금방 따라 잡힐 터.
교전해야 한다.
나는 시선을 재차 아래로 내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공국 놈들을 주시했다.
"아직 놈들은 우리가 있다는 걸 모른다. 일단 매복해, 이곳에 오는 순간 공격한다."
내지시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얼굴은 전투의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다.
하지만,
"믿습니다. 십인장님."
나를 신뢰하는 것일까. 녀석의 긴장된 안색과 달리, 눈동자에는 어떤 믿음의 감정이 일렁였다.
과거 척후조 퇴각전 때처럼 내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리라 바라는 것일 터.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이니.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나를 믿어라. 내지휘를 믿어라. 나의 전투능력을 믿어라."
그렇다면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 턱.
카일은 자신의 주먹을 심장에 가 져다 대 경례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녀석과 다섯의 병사가 매복지점을 찾아 천천히 이동했다. 소음이 일지 않게 조심하는 것일까. 그 움직임에는 신중함이 그득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주위의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우리도 매복한다."
주위 병사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 카일이 데려간 병사들은 저번 척후조 퇴각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신 뢰가 있었다.
허나 지금 내 주위에 있는 네 명의 병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번이 내 아래에서 경험 하는 첫 전투일 터. 아직 나를 신 뢰하지도, 그리고 생존을 확신하지 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교전에 들어간다 면, 여차할 때 도망치거나 전투를 포기할 수 있으니 .
사기를 끌어올려 놔야 한다.
"아르덴, 리버, 하비, 앤더슨."
녀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 며, 눈을 맞췄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것은 역시나 공포. 전투의 긴장이 아닌,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이다.
놈들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강하다."
정말로 , 나는 강하다. 일개 병사치고는 나름대로의 무력이 있으니 .
"내가 너희들을 살릴 것이다."
적어도 살리려고 노력해볼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를 믿어라. 내지시에 따라라. 나와 함께 싸워 라."
다시금 병사들과 눈동자를 맞췄다.
내 허세가 먹힌 것일까, 놈들의 두려움이 약간이나마 가라앉아있다.
피식 웃었다.
'이딴 짓거리는 게임에서도 해본 적 없었는데 .'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진행할 적.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마 우스를 휘적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유닛을 지정하고, 적을 참하고, 명령을 하달하고, 전투를 진행하고. 그 모든 행동이 마우스와 키보드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입을 열고 있다.
게임에서도 없던 행동, 사기 진 작이라.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더욱 가까워진 공국의 병력이 보인다. 여전히 놈들의 선두에 있는 것은 중갑을 입은 갈색머리의 청년.
한스 요한바르첸.
확실히 강적이다. 검술과 전술의 재능이 있으며, 성장에 대한 의지도 충만하다. 시나리오의 극 후반부까 지, 저 개자식은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 속 이야기.
녀석은 아직 성장하지 않았다. 지금은 게임의 초반부에 불과하니까.
현재의 녀석은 꽤 귀한 혈통을 가진 재능 있는 검사.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이 정도라면 할 만하다. 아니, 전혀 할 만하진 않지만,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매복해. 놈들이 우리를 통과할 때, 공격한다."
나와 병사들이 수풀 사이로 몸을 파묻었다.
적이 다가온다.
한스 요한바르첸.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계자.
그는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별 볼일 없는 임무다.'
정찰 겸 거점 장악. 고작 삼십여 명으로 진행하는 그저 그런 임무다. 과거 그가 수행했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의, 조잡한 임무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산의 정상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인다.
청아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산 정상의 모습.
저곳을 확보한다면, 임무를 완수 할 수 있다.
그는 한탄하듯 읊조렸?
"어서 내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한스의 얼굴에는 수심이 그득했다.
그는 본래 공국 천인장이었다. 무려 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고위장교의 자리. 스무 살을 갓 넘 긴 젊은이에게 몹시 과분한 직책이었다.
사실, 혈통 덕분에 얻었던 자리였다. 그의 아비가 다름 아닌 공국의 군주, 헤임스 요한바르첸 공작이 었으니 .
비록 그는 첩의 자식이었으나, 공작의 슬하에는 남자라곤 자신밖에 없던 상황. 덕분에 그는 후계자 로 인정받고, 천인장 직책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 천인장 자리를 얻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가 가진 재능이 범상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의 전투에서는 항상 이겼고, 검술 실력 또한 쟁쟁한 엘리트 장 교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뛰어난 혈통, 넘치는 재능.
언제나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 또한 과거의 이야기. 지금의 그는 공국군 삼십인장에 불과하다. 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던 고위 장교에서, 일개 소규모 부대의 지휘관급으로 추락한 것이다.
한스가 이를 까득 악물며 독백했다.
"너무 안일했다."
제국의 척후부대를 우습게 봤다.
고작 열 명의 병사들이었다. 놈 들은 한스가 미리 배치해둔 초계망을 은밀히 돌파했고, 더해 침공 정보까지 알아내 무사히 후퇴했다.
그리고 초계망이 뚫렸던 방면은 다름 아닌 한스의 담당구역.
변명할 수 없는 패배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올린다.
'만회해야 한다.'
한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공국군 삼십인장에 불과하지만, 곧 전공을 세워 다시금 아비의 눈에 들리라. 그래서 언젠가 아비의 자리를 물려받으리라.
그는 그리 결심하며 발을 놀렸다.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공국 병사들은 천천히, 산의 정상을 향해 접근해갔다.
제국 병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수풀 속에 숨어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바라보고 있는 홀로그램은 역시 나 전술창 홀로그램. 십인대 지휘술 스킬 덕분에 발현된 자그마한 미니 맵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접근하고 있어."
지도의 붉은 점이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경계는 전혀 하지 않는 것일까. 속도가 전혀 느리지 않다. 더해 병사들의 분포 또한 제멋대로 어지러이 흐트러져있는 상황.
저런 대형으로 이동한다면 기습에 취약할 텐데.
피식 웃었다.
"하긴. 공국 놈들이 좀 허접하긴 하지."
군대에 온갖 공을 기울이는 제국 과 달리, 공국의 군대는 조잡하다. 국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제국군은 대륙 남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흥 열강이었다. 그 들은 오랜 정복전쟁과 중앙집권화 덕분에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반면 공국은 작은 소국에 불과했다. 왕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덕분에 그 국력이 마냥 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제국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사실.
하물며 그들의 병사 대부분은 징 집병이었다.
잘 훈련받은 제국의 정규병, 그리고 농사와 생업에 종사하다 징집 영장에 끌려온 공국 징집병.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당장 훈련 기간과 축적된 전투경 험이 다르다. 같은 신병이라 한들 제국 병사가 훨씬 더 잘 싸우고, 더욱 오래 살아남았다.
1: 3의 교전비라. 힘들겠지만, 나름대로 할 만하다. 더해 이쪽이 기 습하는 입장이니. 어느 정도의 승산 은 있을 터.
하지만,
"…적 지휘관이 가장 큰 문제인데."
한스를 우습게 볼 수는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놈의 집념과 복 수에 대한 의지를.
물론 별다른 악연을 쌓지 않은 지금의 녀석은 그저 그런 도련님에 불과하다. 허나 놈의 아비를 죽이고, 공국을 멸망시킨다면.
녀석은 복수에 미친 악귀로 변해 버린다.
"이번 전투에서 녀석을 죽여야 해."
철그럭.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발 죽어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 염병할 게임 속에서 생 존하기 위해서.
그때, 문득.
-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다수의 발자국이 풀을 지르밟으 며 전진하는 소리.
시선을 내려 다시금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붉은색 점이 거의 지척에 다가왔다.
후우, 심호흡했다.
'아직이야.'
아직, 완전히 녀석의 대열이 매 복과 매복 사이에 자리하지 않았다.
입술을 씹으며 홀로그램을 노려 보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면. 완벽한 기습 타이밍이다.
손바닥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온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심장 의 뛰는 속도가 빨라진다.
'거의 다 왔어.'
붉은색 점이, 완전히 지척에 다 가왔다.
전투가 가깝다.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게 한스지?'
기습의 기회가 있을 때, 한스를 노리고 싶다. 그래야 죽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니.
하지만 고작 미니맵 만으로는 누 가 한스인지 판별할 수 없다.
놈을 가장 먼저 치고 싶은데.
훅, 후욱.
긴장에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바로 뛰어나갈 수 있게 하체를 긴장시켰다. 대퇴근이 팽창한다.
나의 전투감각이 날카롭게 벼려 졌다.
- 바스락!
바로 앞에서 소음이 일었다.
지금이다.
파앙!
나는 수풀 속에서 검을 내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