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내 보고가 끝난 후. 천인장 그레 드는 상부에 보고해야겠다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집무실 밖으로 떠나기 전,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십인장 한지훈.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정말로 공국 놈들 이전면전을 걸어올 거란 이야기다."
그의 표정은 더없이 냉철하고도 진중했는데, 절로 등에 오한이 스쳤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일 터.
"자네 세대의 군인들은 전면전을 겪어본 적 없지. 하지만 나는 경험 해봤다."
시선을 내려 그의 정복 가슴팍에 달려있는 약장들을 살폈다.
여러 약장이 자랑스레 그의 가슴 팍에 달려있다. 저리 많은 약장을 받을 정도로, 그는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굴렀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면전 규모의 전장에 끌려 간 적도 있었겠지.
"그건 지옥이다. 국가와 국가가 서로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거다. 정말… 미친 짓이지."
이미 알고 있다. 경험해봤으니까.
물론 현실에서 경험해본 것은 아니다. 간접적으로, 그것도 게임에서 경험해본 것이니.
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제 한 동원해 적 세력을 처부순다. 막 대한 인간을 갈아 넣고, 자원을 끌어 모아, 군대를 양성해 적을 짓밟는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모든 걸 시도하는 전쟁. 지옥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서를 다시 써놔야겠군."
달칵.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먼저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덕분에 이 살풍 경한 집무실에는 나 혼자만이 남아 버렸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치료나 할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지휘소에서 나온 뒤, 나는 곧장 길을 걸어 치유소로 향했다.
천천히 걸으며 전진기지 파트라 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현대인이었던 내 눈으로 보자면, 그리 큰 규모의 마을은 아니었다.
전진기지라 하나 그래봤자 전투 병력 천여 명, 비전투 인원까지 포함해봐야 이천여 명이 살 만한 규모의 마을에 불과하다. 외곽을 따라 빙 둘러쳐진 성벽과 시야에 보이는 군인들의 모습만 아니라면, 그저 평 범한 중세 마을의 모습이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나는 이 도시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곧 증축하겠지."
내 척후 정보 덕분에, 제국이 공국의 전면전 의도를 읽어냈다. 그리고 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터.
증원을 보낼 것이다.
군단 단위에 달하는 대량의 병사들. 말을 타고 다니는 기병대. 오러를 다루는 기사. 그리고 강대한 마법으로 적진을 쓸어버리는 마법사 까지.
일개 병사부터 마법사라는 고위 병종까지, 많은 이들이 이 기지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곧 파트라헴은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군단급 본영 으로 탈바꿈하게 되리라.
"뭐. 그것도 몇 달 뒤의 이야기 이지만."
지금은 아직 천인대 규모의 작은 전진기지에 불과하다.
나는 천천히 걸어 진료소로 향했다.
덜컹.
진료소의 문을 열자 빼곡한 침상 이 보였다. 붕대를 감은 다수의 병사들이 침상에 누워있다.
개중에는 낯익은 녀석들도 있었다.
"십인장님. 보고는 끝내신 겁니까?"
덩치 큰 병사"카일이 호쾌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이 누 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몸은 좀 어떠냐."
"온몸이 욱신거립니다. 뭐, 그만큼 편하지만요. 덕분에 며칠 훈련도 빠지고 잘 쉴 겁니다."
"… 그래라."
카일의 익살스러운 태도에도 불 구하고, 나는 녀석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녀석 또한 격렬하게 싸웠다. 비록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사지 곳곳에 적의 창격과 검격으로 수많 은 자상이 아로새겨져 있을 터.
물론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 지만.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살폈다.
몸 이곳저곳에 날카로운 자상이 남아있다. 손을 가져다 대 상처를 건드리자 저릿한 통각이 신경을 자극했다.
' 망할.'
절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통각이 올라올 때마다, 절대 꿈 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 같다.
내가 그렇게 상처를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십인장님. 출세길이 열리신 것 같습니다."
카일이 뜬금없는 소리를 해왔다.
나는 이유가 뭐냐는 듯 녀석을 주시하고, 녀석은 이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전 천인대 차석이 와서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뭐라고 했는데 ?"
"십인장님께 포션을 사용하라 하더군요."
"뭐?"
이해가 가지 않아 절로 의문성이 튀어나왔다.
포션. 이 이상한 판타지 세상 속, 그중에서도 한층 더욱 판타지스러 운 물건.
흔히 알고 있는 그 포션이 맞다. 마시거나 상처 부위에 바르기만 해 도 순식간에 부상을 치유하는 , 이세 계의 무안단물 같은 그것.
물론 포션의 가격은 더럽게 비싸다. 군대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제국군에서도 기사나 백인장 이상의 중요 병종에게만 사용할 정도로.
그런 포션을 어째서 내게 쓴다는 것일까.
"십인장님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유일하게 적진에서 살아 돌아왔고, 더해 혼자서 적병 십 수명, 추가로 적 지휘관 까지 처치했습니다. 저희들이 기껏 해야 적병 한두 명을 눕힐 동안 말 입니다. 이 정도면 꽤 대단한 전공 아닙니까?"
팔에 감은 붕대가 불편한 것일 까. 카일은 자신의 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천인장 그레드도 저희처럼 병사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뭐, 십인장님을 더욱 마음에 들어 했다 이거겠지요. 그 귀한 포션을 일개 병사에게 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 건가.
내가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와중이었다.
"2번 척후십인장 한지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뒤를 돌아보니, 제국군 정 복에 하얀색 약장을 단 의무장교가 서 있었다.
척. 경례했다. 역시나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자네가 한지훈이군. 자, 받아 라."
의무장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는 분홍빛 액체가 넘 실거리고 있다.
"포션이다. 천인장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하사하라는군."
아무래도, 카일의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나는 포션을 받아 들이켰다.
그다지 맛있진 않았다.
치료소에서 나온 뒤. 나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기지 외곽에 배치되어있는 십인대 막사. 열 명이 함께 지내는 곳이었으나 안에는 나 혼자뿐 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지금 치료 소에 처박혀 있기 때문이다.
털썩. 자리해있는 침상에 몸을 누였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목제로 이루어진 허술한 천장이 보 인다.
그걸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내 정보."
- 띠링!
['유저 정보' 시스템이 활성화 되 었습니다!]
[유저 정보를 불러옵니다.]
안내창이 떠올랐다.
[한지훈][척후조 십인장]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Lv.1)]
[근력 4]
[민첩 2]
[내구 3]
[체력 3]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5pt 입니다.)
검술 스킬이 하급으로 올라있고, 남아있는 포인트는 15pt가 있다 한다.
안내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구냐. 넌."
저 안내창 너머, 나를 가지고 노는 존재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그저 게임을 했을 뿐이었다.
여러 적을 쳐부쉈고, 높은 점수 를 내기 위해 열중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게임 속 세상이라.
"얼탱이가 없네."
이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안내창을 쥐어주고, 기억과 행동에 보정을 가미해, 게임 속 세상에 내던져버리다니.
목적이 뭘까.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누구의 소행일까.
멍하니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쯧, 혀를 찼다.
"염병할."
기분이 좋지 않다.
내 운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기분이다.
나는 다음 안내창을 호출했다.
"퀘스트창."
- 띠링!
[퀘스트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서브 퀘스트] (아직 서브 퀘스트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퀘스트창이 떠오른다.
나는 퀘스트창의 위, '메인 퀘스 트' 부분을 눈여겨봤다.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시나리오라. 무슨 시나리오를 말하는 걸까.
마지막으로 현실에 있던 날, 잠 결에 들었던 환청을 떠올렸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시나리오가 최고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시나리오가 채택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분명 '시나리오'라고했다.
게임 속 내 기록을 그리 부르는 모양.
아무래도. 나를 이 세상 속에 던 져 넣은 빌어먹을 누군가는, 내가 게임 속 나처럼 행동했으면 하는 모양이다.
엿이나 먹으라지.
"몇 명이나 죽이라는 거야."
내가 블랙오케스트라에서 몇 명 이나 죽였을까.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정산이 끝나기도 전에 게임을 꺼버렸으니까.
하지만 결코 적을 리가 없다.
제국과 국경을 접한 공국을 시작 으로, 수많은 국가를 쳐부수고 파괴했다.
아니. 어디 인간들의 국가뿐이었 나.
나중에 제국이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때는, 이인종들마저 나 서 상대진영 연합군에 가담했다.
엘프, 드워프, 수인, 요정 , 그리고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자유 마탑들까지.
나는 그것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렸다.
"단순히 게임이었는데 ."
읊조리며 눈을 감았다.
그저 게임이었다. 모니터에 표시 되는 유닛은 사람이 아닌 폴리곤 덩어리였고, 그것의 죽음은 가상의 소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게임 속 세상에 내가 있다.
다시 눈을 떠 안내창을 시야에 담았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시나리오를 완성하라는 퀘스트창. 추측해본다.
"대륙을 정복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몇이나 죽여야 할까. 나는 가만히 안내창을 주시했다.
황궁의 알현실. 기다란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고, 사방이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화려한 공간.
그곳에 수십의 사람이 도열해 있었다.
도열해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지긋이 먹은, 호화로운 복색을 갖춰 입은 노인들이었다.
제국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중앙 의 귀족들.
"위대하신 황제 폐하! 급히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노인이 다급한 표정 으로 말했다.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알현실의 가장 상석, 화려한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있는 옥 좌였다.
옥좌에는 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청년의 외양은 너무나 고귀했다.
머리는 찬란한 황금색을 띄고 있다. 피부는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하 듯 새하얬으며, 금색으로 물들어있는 눈동자에는 장엄한 빛이 스며들 어 있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젊은 나이에 황위를 계승한 제국의 황제였다.
"… 말하라."
젊은 황제가 웅위한 목소리로 발 언을 허가했다. 그에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고한다.
"북부전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국측이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공국이라면."
"요한바르첸 공국이옵니다. 폐 하."
노인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 며, 이어 말했다.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공국은 제국 접경지역에 대량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다 합니다. 척후가 목격 한 규모만 군단급. 그리고…."
노인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고개를 들며 말한다.
"마법사 전력이 목격되었다 합니다."
"마법사!"
"그게 정말인가?!"
주위에서 있던 다른 귀족들이 당황했다.
그만큼 마법사의 목격은 중요한 일이었다.
사실, 군단급 병력의 이동은 나름대로 자주 있는 일이었다.
마물이 출몰하는 이 세상이다. 때문에 군대는 주기적으로 미개척지역의 마물을 소탕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벌였으며, 간간이 대규모 마물집단을 상대로 군단급 군대가 움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군대에 마법사가 등장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법사. 인간의 몸으로 마나를 운용해 이능을 발하는 존재.
그들은 막대한 운용비와 마나자 원을 소모할지언정, 회전에서는 절대의 화력을 발한다.
그리고 그 마법사가 적진에 자리 해있다니.
"공국 놈들. 제정신이 아니군. 전 면전을 준비하는 건가."
황제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알현실에 자리해있는 대신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에 고위 귀족들이 흠칫 어깨 를 움츠렸다.
황제가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한다.
"접경지역에 병력을 증원하라. 북부 제 3군단과 볼로냐 전투기사단을 배치하라. 그리고…."
그가 강조하듯, 말했다.
"제국 전투마법사를 급파해라. 공국 놈들을 쓸어버린다."
제국 북부에 전력이 집중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