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유닛 1화.
게임을했다.
[블랙 오케스트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게임 이름을 말해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완벽히 묻힌. 듣보잡 게임.
플레이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자주 방문하던 검색엔진 대형배너에 광고가 떠올랐었다. 화려한 일러스트도 없이, 검은색 배경에 흰색 글씨로 '블랙 오케스트라'라 박혀있는 광고.
그에 흥미를 느껴 클릭했고, 게임을 받아 설치, 실행했다.
[환영합니다! 유저 한지훈.]
[시나리오를 준비합니다.]
[진영을 선택해 주세요.]
처음, 게임을 시작하고 느낀 것은 단순히 그래픽이 좋다는 감상이었다.
지형 묘사가 사실적이었으며, 사람은 진짜처럼 움직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은 그 어떤 게임보다도 자연스러웠다. 피어나는 먼지구름은 실제 전장을 방불케했다.
이때 이상한 걸 느꼈어야 했는데 .
게임은 판타지 세계관이었다. 마법사가 있고, 기사가 있으며, 엘프 니 드워프니 하는 타 종족이 있는 흔한 양산형 판타지 세계관.
세계관 속 여러 집단이 전투를 벌여 승리를 갈구한다.
나는 인간, 그중에서도 제국 진영을 선택했다.
[위대한 제국을 위해!]
게임에 진입해 전투를 수행했다.
게임 방법은 여타 다른 전략 게임들과 별다를 것 없었다. 마우스로 부대를 지정해 원하는 위치로 보내 지휘한다.
이렇게 지휘해 적 전력을 모조리 죽이거나 목적을 달성하면 승리. 아니면 패배.
[9번 십인대 부대원 목록]
[베르닝][중급 검병]
[마흐트][중급 검병]
[클리아스][중급 창병]
[게이트만][하급 검병]
[아르트][하급 창병]
하지만 이 게임은 너무나도 정교 하고, 불친절했다.
유닛마다 능력치가 달랐다. 같은 유닛이라도 어떤 유닛은 쉽게 죽었고, 어떤 유닛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유닛은 전투에서 살아남으면 살아남을수록 강해지고 계급이 올랐다.
[이동]
[공격]
[방어]
[경계]
[휴식]
…
명령커맨드가 다양했다. 공격, 방어, 경계, 휴식, 후퇴… 심지어 탈주병이나 포로를 처단하라는 명령 도 있었다.
물론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으면 그저 다름 게임보다 그래픽 더 좋고, 명령이 세세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유닛은 저마다 '의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르트][하급 창병]
[휴식 요청]
["더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수락/거절]
[베르닝][중급 검병]
[주검 수습 요청]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수락/거절]
[칼리아드][중급 검병]
[부상자 후송 요청]
["십인장님! 부상자를 후방으로 보내야 합니다."]
[수락/거절]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웃기는 건, 내 상급자까지 게임에 구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라스 리 바르티아][백인장]
[방어지시]
["역적 놈들은 이 길목을 타고 침입해 올 것이다. 길목을 사수하라. 절대, 물러서지 마라."]
[좌표 A31]
이렇게 말이다.
상명하복이란 건가. 상급자의 명령은 거절옵션 조차 없다. 명령이 하달되는 동시, 지도의 해당 좌표에 하이라이트 표시된다. 저리로 이동 해 방어명령을 수행하라는 것이겠지.
꽤나 마니악한 게임이다. 그래픽 은 쓸데없이 좋고, 전투는 극한으로 사실적이며, 유닛 하나하나가 개별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베르닝][중급 검병]
[후퇴 요청]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수락/거절]
[게이트만][하급 검병]
[후퇴 요청]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수락/거절]
전황이 불리할 때는 '후퇴 요청'을 해온다.
하지만 나는 거절을 누른다. 상급자인 백인장 NPC가 길목을 사수 하라 했으니까.
그에 병사들이 싸운다. 싸우다, 와해된다. 병사들이 죽어 대지에 나 자빠졌다. 붉은색 피가 흐른다.
챙, 챙, 퍼적, 콰직, 그리고 비명 과 단말마.
격렬한 소음이 작은 길목에서 울렸다. 효과음이 꽤나 사실적이다.
[게이트만][하급 검병]
[전사]
[베르닝][중급 검병]
[전사]
[클리아스][중급 창병]
[전사]
…
병사들이 쓰러질 때마다 안내창 이 튀어나온다. 전사, 전사, 전사, 전사, 부상, 중상, 전사, 전사… 곧 내 병력이 모두 죽었을 때.
[게임 오바]
검은색 화면이 떠오른다.
나는 다시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다른 맵이 로드 되고, 새로운 병사를 지휘했다.
* * *
[칼슨][4번 십인장]
[지원 요청]
["저희만으로는 이곳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원군을 투입해주십시 오!"]
[수락/거절]
거절. 너희는 버린 말이다. 그곳에서 실컷 어그로를 끌어줘야 주력 이 손쉽게 파고들 수 있다.
나는 거절 버튼을 눌렀다.
["…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가."]
병력이 전투에 진입. 적병의 무리가 쳐들어온다. 적의 주력이 제대로 양동에 걸린 모양. 수가 상당히 많다.
[4번 십인대]
[전멸]
열 명의 병사들이 적들에게 짓밟혀 죽는다. 모든 병사가 죽어 시야 가까맣게 물들었다. 나는 화면을 바꿔, 다른 방향에 있는 병력을 운 용했다.
4번 십인대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내 주력이 손쉽게 적의 거점으로 침투했다. 마을을 하나 점령했다. 그곳에 민간인들이 있었다.
[아르딘][1번 십인장]
[포로 처우 결정]
["마을에서 민간인 삼십여 명을 생포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처분 하시겠습니까?"]
[방치/후송/해방/제거]
포박해 방치하자니 찜찜하다. 후송하자니 그럴 짬이 없다. 해방은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제거 버튼을 눌렀다.
[아르딘][1번 십인장]
["… 알겠습니다."]
직후 병사들이 마을 광장에 모인 포로들을 향해 다가갔다. 내키지 않다는 묘사일까, 부하들의 움직임에 망설임이 가득하다.
하지만 명령에는 충실히 따라야 하는 법. 다시 한번 버튼을 눌러 재촉했다.
[제거]
곧 병사들이 검과 창을 내찔러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실 끊긴 인형처럼 바닥을 굴렀다. 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병사들의 검 끝에서 시뻘건 액체가 뚝 뚝 흘러내린다.
모든 민간인들이 죽은걸 확인한 뒤. 다음 명령을 지시.
[이동]
내 주력이 진군한다.
* * *
계속해 게임을했다.
처음에는 십인장이었다. 열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반복된 전투로 전공이 늘어갔고, 백인장으로 진급했다. 열 개의 십인대를 운용했다.
백인장 다음으로는 천인장. 천인장 다음으로는 군단장. 승리하면 승리할수록 내 캐릭터 계급이 올라갔고,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늘어갔다.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군단장 각하. 적의 도시를 완전 장악했습니다. 이 도시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도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더해 시민들이 적 세력에 합류하면 골치 아파진다.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몰살]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각하! 이 도시에는 수천의 민간 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죽이라는 말입니까?!"]
천인장쯤 되면 고급 장교다. 더 해 뒤에 붙어있는 성씨는 귀족혈통 이란 것일 터. 그렇기에 간간히 반발해오곤했다.
하지만 내 계급이 더 높다. 다시 한번 버튼을 누른다.
[몰살]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 당신은 악마야.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자식! 한지훈, 나는 네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
이렇게 아주 가끔, 명령에 불복 족하는 NPC가 있기도 하다. 그럴 때를 위한 커맨드가 여기 있다.
[즉결처형]
롬스턴이 병사의 창칼에 꿰뚫려 죽는다. 녀석의 후임이 지휘권을 계 승했다.
[헬리오 윈테[2번 천인장]
["…지휘권, 이양 받았습니다. 사령관 각하."]
[몰살]
["명령을, 수행, 하겠습니다…!"]
천인대 차석이 지휘권을 꿰차고 부대를 운용한다. 그들이 달려가 도시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도시가 화려하게 불타오른다.
오랜 시간 게임을했다.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계급이 올 랐으며, 다양한 이벤트가 나타났다.
[크라함][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동맹 제의]
["제국 북부군 최고사령관, 한지훈 각하. 저희 흑마법사를 귀하의 군대에 합류시키는 것은 어떻겠습 니까? 아아… 보수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체! 저희는 인간들의 시체와, 실험에 쓸 포로들만 있으면 됩니다. 백마법사 놈들이랑 달리 저희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시체만 공급해 주신다면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수락/거절]
바로 수락을 눌렀다.
흑마법사는 음침한 놈들이지만 강력하다. 더해 값싸다. 포로와 시체들만 공급해 준다면 놈들을 운용 할 수 있다. 백마법 전투마법사를 고용하는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을 생각한다면, 거의 거저인 수준.
[크라함][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크히히힛! 멋진 선택이십니다! 역시 '학살'! 듣던 그대로의 위인이 야! 우리를 받아들이다니!"]
어느새 칭호가 생성되어있었다.
[학살],[냉혈]
이 그것이었다. 그저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분 나빴다. 나는 다만 효율적으로 군대를 운용했을 뿐인데.
헌데 그런 내가 마음에 안 들었 던 것일까.
[갈람프 디 브리기테][황실 기사단장]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배신자, 한지훈! 황실에서 축출 명령이 내려왔다. 순순히 죽어라."]
[르왈로우 테일런스 엠프리아][근위군단장]
["한지훈을 단두대 위로 올려라. 놈은 제국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제국 황실에서 나를 제거하려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간 쌓아온 전략 센스와, 모아둔 막대한 병력이 있었다.
나는 가진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 용해 황제의 군대와 맞섰고, 여러 큰 회전 끝에 전멸시켰다. 그리고 제국 수도로 군대를 몰고 가,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제국 황제]
["… 한지훈, 너는 괴물이다. 권력에 미쳐버린 괴물!"]
[제거]
황제를 죽였다.
내 계급이 황제로 격상되었다.
이후 군대를 몰아 전 대륙을 쳐 부쉈다.
드워프의 대산맥, 엘프의 숲, 크 고작은 왕국과 공국까지. 다양한 국가를 파괴하고 짓밟았으며, 가로 막은 모든 적을 처치했다. 대지가 황폐화되고 시체가 끝없이 쌓여간다. 대량의 피가 흐르고 또 흘렀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도시, 대륙 북부 끝단 윈터아르비엔에 제국기를 꽂았을 때.
- 띠링!
[게임 클리어.]
게임이 끝났다.
[게임 클리어.]
[귀하의 점수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처치한 지성체의 수-]
[정복한 영토의 면적…]
[아군의 피해…]
[적의 피해…]
[얻은 포로…]
[얻은 재화…]
"… 끝인가?"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검은 모니터 화면에는 여러 문자 와 숫자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점수를 계산하는 것 같은 데, 꽤나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멍 하니 5분쯤 화면을 바라봤음에도 끝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점수를 보지도 않고 게임을 꺼버렸다. 이미 클리어한 게임에 미련은 없기에. 굳이 기다려가 면서 점수를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진짜 끝났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둥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자그마치 두 달이다. 두 달! 이 게임의 끝을 보기 위해 이번 학기 방학을 통째로 갈아 넣은 것이다.
블랙 오케스트라. 매니악 하지만, 그만큼 몰입도 있었다. 마치 내가 진짜 지휘관이 된 것처럼 군대를 움직였다. 전투가 이어지면 이어쩔 수록 상황은 복잡해졌고, 이벤트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게임을 클리어 하는 것은 꽤나 힘들었다. 이토록 긴 시간을 소모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며 몰입했고, 결국 게임을 완전히 클리어 해냈다.
"…재밌었지."
정말, 재밌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다시 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당장은 이미 클리어 한 게임에 미련은 없다. 나는 곧장 컴퓨터를 종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벌써 며칠 내내 잠을 자지 않고 게임에 몰두했다. 지금은 수면을 취 해야 할 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수마 가 덮쳐온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시나리오가 최고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시나리오가 채택되었습니다.]
잠결에, 어떤 환청을 들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