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90- >
090.
-엘리펀츠, 환희의 역전승! 야구는 9회 말 2아웃부터!
-기나긴 난타전에 종지부를 찍는 역전 쓰리런!
한국 시리즈 1차전을 가져감으로써 선수를 친 것은 엘리펀츠였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2점 뒤진 채로 끌려간 9회에 화끈한 역전 홈런을 날려버린 것이다.
역대 통계를 보면 1차전 승리팀이 우승반지를 낄 확률은 66% 이상이나 된다. 명백하게 유불리가 갈린 셈이었으나, 드래곤즈에게도 무의미한 패배만은 아니었다.
-최태웅은 진짜로 못 나온다!
-위협용으로 앉혀놨을 뿐이다!
빼앗긴 선취점을 9회까지 가지고 간 거라면 또 모를까. 주거니 받거니 난타전을 벌이다가 1점씩 뜯겨서 9회에 이르렀다.
유승혁 감독이 무슨 신이라도 돼서 9회 말에 역전타를 때릴 줄 알았겠는가. 그런 위기 상황에까지 최태웅이 나오지 않았다면 적어도 일부러 속임수를 쓰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물론, 속임수가 아니라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가벼운 부상이라서 1차전까지는 상태를 보고 이후부터 등판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적어도 최태웅의 부상 자체가 진짜였다는 사실은 확신하게 되었다. 이 확신은 드래곤즈 선수들의 자신감으로 변모했다.
-명품 난타전 뒤에 명품 벌떼 투수전.
-신들린 벌떼 야구. 맥을 끊는 수 싸움의 승리자는 이인호 감독.
-엘리펀츠 장군 뒤에 드래곤즈 멍군.
드래곤즈의 기용이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최태웅의 기용이 불확실하다고 판단한 상황에서도 투수 물량을 쏟아부은 것은 마찬가지니까. 단지 여기에 자신감이 더해지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견고함이 덧칠해졌다.
엘리펀츠가 유망주의 팔팔한 피지컬에 더해 단단한 멘탈적인 패기로 이루어진 팀이라면 드래곤즈는 피지컬과 노련함이 적당히 어우러진 팀이다. 거기에 그나마 부족했던 패기가 보태진 셈이니 엘리펀츠 선수들은 시합 내내 뭐가 부족한지도 모른 채 숨이 턱 막혀서 끌려 다녀야 했다.
-드래곤즈, 선발-셋업-마무리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호흡. 세 투수의 합작 영봉승.
-한국 시리즈 3차전. 드래곤즈의 철벽 같은 영봉승.
-절망적인 8회.
-한국 시리즈 4차전, 드래곤즈 승리.
-한국 시리즈 1대 3, 엘리펀츠 벼랑 끝.
-데스매치 난타전. 양팀 득점 총합 32.
-엘리펀츠, 한 이닝 최다 득점 타이 달성.
-투수진의 리타이어인가, 양팀 타선의 괴력인가?
-한국 시리즈 5차전, 엘리펀츠 진땀승.
-서기찬, 괴력의 8이닝 1실점 완벽투. 엘리펀츠를 구원하다.
-승부 원점. 3대 3. 우승반지의 향방은 한국 시리즈 7차전으로…….
시리즈가 접전이 되자 최태웅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등판 가능성도 불투명한 선수에게 신경을 쏟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최태웅은 관심받기 싫어서 더그아웃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앉았다. 아쉬워하는 팬이야 많았지만, 당장 7차전까지 온 마당에 언제까지 부상 중이라는 선수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야구 커뮤니티 등에서나 이럴 거면 최태웅을 왜 로스터에 넣었느냐는 불평이 꾸준히 올라올 뿐이었다.
‘내가 여기에 없는 편이 팀에 훨씬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타들어가는 마음으로 다리를 떠는 사이에 마침내 한국 시리즈 7차전이 시작되었다.
양팀 투수진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래도 선발진만큼은 손아귀에 힘이 남았으나, 불펜으로 넘어가자 기관총 같은 난타전으로 변모했다.
드래곤즈 투수들이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혹사하고 왔다고 하나, 단기전인 한국 시리즈의 마력 앞에서 그 정도 체력 차이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엘리펀츠는 투수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는 만큼 체력적인 부담을 별개로 짊어지고 있었다.
“투수 교체!”
“투수 교체!”
“교체!”
“교체!”
난타전은 서로 상대의 목젖에 칼날을 들이밀고 있는 듯이 처절한 진흙탕 싸움이 되었다.
1대 0, 2대 0, 2대 3, 3대 3, 4대 3에서 4대 6, 그리고 5대 6에서 6대 6으로.
양팀 중 어느 쪽의 우위도 꾸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좌투수가 3구를 던지고 내려가면, 우투수가 올라와서 7구를 던지고, 그다음에는 또다시 좌투수가 10구를 던졌다. 고작 초구에 단타 하나를 맞았을 뿐인데도, 타구의 구질에 따라서는 곧바로 교체되는 경우마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만큼 투수가 연달아 바뀌는데도 쉴 새 없이 안타를 쏟아내는 타자들이 신들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서기찬이. 되겠냐?”
“예. 불러만 주세요.”
“힘 좀 써줘야겠다. 불펜 바로 들어가라.”
투수를 그렇게 물 쓰듯 썼으니 남아나는 선수가 있을 리 없었다. 엘리펀츠뿐 아니라 드래곤즈도 이미 선발 투수진까지 끌어다 마운드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두 번만 막으면 된다. 두 번만. 정신 바짝 차리자. 우승반지가 코앞이다.”
엘리펀츠가 8대 7로 앞선 8회 초. 유승혁 감독은 기어이 6차전에서 8이닝을 던진 선발투수 서기찬까지 끄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점수를 뜯긴다면 그건 어쩌다 뜯긴 점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마운드를 지켜줄 댐에 구멍이 뚫린 셈이 된다. 타선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남은 두 이닝에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패배가 확정된다고 봐야 했다.
퍼억!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이야아아아!”
1점 차이인 상태에서 이런 후반은 카운트 하나하나에 희비가 갈린다. 유약하기로 소문난 데다가 손아귀에 힘도 안 돌아왔을 법한 서기찬이었으나 가을야구의 마력은 빗겨가지 않았다.
역대급 계약금을 따낸 유망주의 팔에서 뿜어지는 야구공은 그야말로 포탄과도 같았다. 앞선 이닝에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스트라이크 연발에 관중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왜 하필이면 지금이었던 거지?’
불처럼 뜨거운 그라운드를 노려보면서, 최태웅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이 분수에 걸맞지 않은 것을 누렸다는 것은 안다. 다른 선수들이 노력으로 획득한 것을 훔친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애초에 나한테 그런 힘이 생겼던 거란 말인가?
아니. 야구를 그만두라고 해도 좋다. 올 한해만 불태우고 영영 전설적인 반짝 스타로 이름을 남길 뿐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고작해야 며칠 차이가 아닌가.
기왕 나를 야구계로 떠밀 거였다면.
왜 저 자리까지 떠먹여준 다음에 쫓아내지 않는단 말인가. 한 시즌을 모조리 불태워야만 비로소 올라설 수 있는 저 최고의 자리를!
-마침내 이 순간이 왔습니다. 아웃 카운트 세 개! 세 명의 타자를 잡아내면 만년 하위권을 맴돌았던 엘리펀츠의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드물게 무득점으로 물러난 8회 말.
경기는 최후의 9회에 돌입했다. 유승혁 감독은 9회 말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반드시 이번 이닝에 끝내겠다는 각오로 야수들을 모두 수비 전문으로 교체했다.
따악! 따악! 따악!
“파울!”
“파울!”
“파울!”
엘리펀츠의 유망주들은 이번 시즌 내내 자신들의 실력이 충분히 프로에 통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자신들이 프로라는 이름에 걸맞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가슴에 아로새겼다.
퍼억! 따악! 퍼억! 따악!
“볼!”
“파울!”
“볼!”
“아웃!”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나, 가장 강대한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최후의 한 걸음을 딛기 직전이기 마련이다.
이것만큼은 이를 악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깨트릴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에는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어떤 알껍질 같은 것이다.
퍼억! 따악! 따악! 따악!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파울!”
“볼!”
“볼!”
“파울!”
“아웃!”
최후의 마침표를 앞에 두고 관중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낯으로 벌떡 일어섰다.
기이하고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대기를 찢어버릴 듯한 함성과 숨조차 쉴 수 없는 고요가 말도 안 되게 공존하고 있었다.
퍼억! 퍼억! 따악!
“스트라이크!”
“볼!”
“파울!”
부자연스러운 고요함이 서기찬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 자극은 투구하는 데만 집중해서 아무것도 못 보던 서기찬이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서기찬은 별안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잠결에 비척비척 걷다가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따악!
“……!”
“위험해!”
사실, 그렇게까지 위험한 타구는 아니었다. 코스가 정면이다 뿐이지, 일반적인 프로 투수라면 누구나 간단히 반응할 만한 공이었다.
하지만 서기찬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한순간 정말 아무것도 않고 서 있었다. 그런 서기찬에게 148그램의 질량이 직격했다.
“야, 서기찬!”
“정신 차려봐!”
경기장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머리에 공을 맞은 서기찬이 피를 뚝뚝 흘리며 그대로 엎어졌던 것이다.
기절한 정도까지야 아니지만 정신이 혼미한지 혼자서는 제대로 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아, 정말 엘리펀츠 올해에는 성적과 맞바꿔서 어떤 마가 끼었나요? 중요한 순간에 부상으로 이탈하는 선수가 시즌 중에서부터 너무 많은데요.
-그보다 지금 엘리펀츠는 보통 비상사태가 아닙니다. 쓸 수 있는 투수가 없거든요. 오죽하면 6차전에서 8이닝을 던진 선발투수를 올려보내기까지 했겠습니까.
-투수가 고갈된 건 사실 드래곤즈도 마찬가지라서요. 최악의 경우에 1실점쯤 하더라도 이번 이닝을 넘기면 9회 말 공격에 걸어볼 일말의 여지가 있기는 하거든요?
-이렇게 되면 야수를 올려야 하나요? 하지만 지금 드래곤즈의 타격감을 생각하면…….
-아니죠. 지금 엘리펀츠에 등록된 투수 자체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단순히 피만 뚝뚝 떨어지는 상황이라면 미친 척하고 근성을 발휘해보라 우기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서기찬의 속투는 불가능했다. 앰뷸런스까지 불러서 실려나가는 서기찬을 보면서 엘리펀츠 팬들은 초조하게 발만 동동 굴렀다.
“……태웅아.”
“……!”
최태웅도 바보 멍청이가 아닌지라 서기찬이 고꾸라지자마자 이 장면을 떠올렸다. 그저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과 실제로 닥쳐온 것이 하늘과 땅만큼 다를 뿐이다.
하얗게 질린 최태웅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감독님, 저는…….”
“빨리 결정해라.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핀트가 맞지 않는 듯, 혹은 자신이 할 말에 한참 앞서서 대답을 하는 듯. 유승혁 감독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병원 결과도 그렇고, 솔직히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네가 팀에 공헌한 게 있고, 올 한 해만 야구하고 말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버려뒀을 뿐이지.”
“…….”
“다만, 지금 이대로라면 어떤 결과가 되더라도 두고두고 너한테 회한이 되지 않을까 싶다. 1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던진 게 어떤 경기를 위해서인지 너도 알고 있을 테니까. 이건 앞으로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업적을 쌓든 덮어씌울 수 없는 거다.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될 테니까.”
“…….”
“9회 투아웃이다. 이 한 명을 막느냐 못 막느냐에 따라서 올해 결실이 누구한테 갈지 정해진다. 그게 열매가 하필 네 앞에 떨어졌어. 꼭 이 세상에 야구의 신이 있어서 안배라도 해놓은 것 같지 않으냐?”
알아볼 수 있는 부상이기만 했어도 유승혁 감독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의향을 물어볼 리가 없다. 아니, 그 이전에 로스터를 낭비하면서까지 더그아웃에 앉혀놓았을 리가 없다.
위임된 선택권은 강제적인 명령보다도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바로 어제까지의 최태웅이었다면 망설임 따위 없었을 것이다. 빨라봐야 130km/h 남짓한 똥볼. 저토록 숭고한 프로의 승부에 그따위가, 온갖 치트로 허위 영광을 독식한 기생충이 발 들이는 것은 뭐라고 할 수 없는 모독이었다.
그럼에도 어째선지 던질 수 없다는 한 마디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 지금까지의 나는 가짜였다. 치트였고, 사기꾼이었다.
숭고한 승부의 장에 뛰어든 미꾸라지 한 마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엇에도 때타지 않은, 저 치열한 혈투를 보고 흥분한 평범한 한 명의 야구팬이기도 하지 않은가.
정말로 유승혁 감독의 말대로였다.
쓰레기나 다름없는 공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그 공으로 수많은 타자를 농락해왔다.
그야 물론 얻어맞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고작 한 명이 아닌가. 고작 아웃 카운트 하나가 아닌가.
설마 그까짓 것도 잡아내지 못하겠는가?
마치 야구의 신이 안배해준 듯한 판인데?
“감독님. 저는…….”
심장에서부터 쥐어짜내듯, 최태웅은 괴로운 목소리를 냈다.
***
-아아! 투수가 교체되는 건 당연한 겁니다만, 과연 누가 저 계륵 같은 마운드를 이어받을까 생각했는데…… 최태웅 선수! 최태웅 선수가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터벅터벅 걸어 올라오는 최태웅의 모습에 경기장은 태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함성에 휩싸였다.
방어율 0.23의 대마왕. 실점하는 장면을 연상하는 것조차 모독으로 받아들여 마땅한 지옥의 수문장이 오랜 침묵을 깨고 마침내 부활했던 것이다!
“설마설마 했는데…….”
“기어이 안 보고 끝나질 않는구만…….”
“저 새끼, 부상은 멀쩡한 거야?”
하지만 신앙과도 같은 환호를 보내는 팬들과 달리. 드래곤즈의 분위기는 조금 현실적인 느낌으로 팽팽하게 조여져 있었다.
최태웅의 등판. 그래, 가장 두려워했던 경우의 수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부상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지금도 평범하게 등판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니면 야수라도 올라와서 던져야 하는 판국에 억지로 떠밀려 올라온 자리였다.
제아무리 공룡이라도…… 덮어놓고 두려움에 떨 까닭이 있을까?
‘미치겠네. 어떻게 이렇게 손이 떨리지?’
생소한 경험에 최태웅이 어금니를 빠드득 깨물었다.
한국 시리즈라는 무게감일까? 평범하게 초능력이 없어지고 맨몸뚱이만 남은 아마추어의 추레한 열등감과 공포심 때문일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급격하게 후회가 되었다. 내가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몇 분 전의 자신의 강냉이를 털어버리고 싶었다. 잠깐만 정신줄을 놓으면 글러브를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야.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고작해야 아웃 카운트 하나.
이 팔에서 뿜어져 나가는 최고 130km/h의 공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초능력은 이 공을 어디로 던져야 상대를 농락할 수 있을지 리드해줄 뿐. 실제로 타자에게서 아웃 카운트를 뽑아내는 야구공의 물리력은 이 팔이 쏘아내는 것이었다.
메이저리그에도 더 느린 공으로 아웃 카운트 잡는 투수가 많은데 뭘. 초등학생이 던진 캐치볼도 무조건 안타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냥 던지면 되는 거다.
퍼억!
“볼!”
하지만 야구가 멘탈 스포츠라는 말은 이 자리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났다.
상대 타자의 약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기억을 더듬어서라도 평소의 패턴을 흉내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포수가 펄쩍 일어나서 잡아야 할 정도의 폭투로 대답을 해주었다.
퍼억!
“볼!”
“…….”
연이은 폭투성 볼에 흥분했던 관중석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역시 부상인가?
-하기야, 올라올 만한 상황이라서 올라온 게 아니라 정말로 투수가 단 한 명도 더 없어서 올라온 거니까.
-이거 긁어 부스럼만 만드는 거 아니야? 저 정도면 차라리 투수 짬밥 있는 야수가 올라와서 던지는 게 낫지 않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 아닌 살갗에 직접 스며드는 듯했다.
‘제기랄. 뭐하는 거야, 최태웅! 일단 스트라이크존에 꽂아넣어야 할…….’
분출할 데 없는 울화로 가슴만 쾅쾅 두드리던 최태웅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지금까지 자신은 포수에게 사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구질이라고 해봐야 거의 느린 직구뿐이니 포수가 그때그때 보고 잡아도 되었고, 볼 배합은 자신이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특이한 작전을 펼칠 때에도 자신이 포수에게 사인을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포수가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복잡한 작전 따위는 아니었다. 몸쪽 낮은 코스, 대다수의 투수에게 그러하듯이 평범하게 리드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
평소의 최태웅이라면 난처했을 것이다.
볼 배합이라면 내가 하는 게 무조건 정답인데. 저 코스로 던지면 무조건 내가 배합한 것보다 불리한데, 그렇다고 선배인 포수하고 기 싸움을 하기도 어렵고.
어떤 판단에서 갑자기 포수가 안 하던 사인을 보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마술처럼, 그 사인을 보는 순간 속이 뻥 뚫린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퍼억!
“스트라이크!”
최태웅의 상태를 보려고 신중하게 집중하던 타자가 움찔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무릎 위 날카로운 코스에 느린 직구가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젠장. 감 찾아가는 건가? 차라리 빠른 승부를…….’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기막히게 맥을 끊어놓는 볼 배합이 최태웅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거기에는 노린 코스에 공을 꽂아넣는 정밀기계 같은 제구력이 전제조건으로 필요하다. 각 전력분석팀은 최태웅의 ‘일부러 던지는 느린 공’이 제구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이미 내린 바 있었다.
그래도 그건 컨디션이 일반 이상일 때의 이야기. 두 개의 폭투가 포석일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영원히 답은 나오지 않는다.
따악!
“빠졌다!”
승부는 4구째에 곧바로 일어났다.
속이 터질 정도로 빗맞아서 그렇지, 건드리는 걸 생각한다면 어려운 공은 아니다.
완벽하게 사각을 노리는 컨트롤이 돌아오기 전에 휘두르자는 판단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뛰어, 뛰어! 갈 수 있어!”
“홈! 홈! 홈으로!”
단타 하나 정도만 각오하고 있던 최태웅으로서는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날카로운 타구 코스였다.
이미 나가 있던 주자는 얼굴빛이 완전히 시꺼매져서 악에 받친 질주를 하고 있었다.
“씨발!! 무조건 잡아!!!”
“……!”
그때. 벼락같이 튀어나온 이규태가 담장까지 굴러가려는 공을 몸으로 틀어막았다.
마치 트램폴린이라도 탄 것처럼, 배부터 추락한 그의 몸뚱이가 튕기듯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는다. 활 같이 기다랗게 휘어진 팔이 그대로 휘둘러져 고함치는 포수의 미트로 날아갔다.
“죽어라아아앗!”
“……!”
진부한 표현이지만, 빨랫줄이나 레이저 같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지금껏 수많은 캐치볼을 해온 동료 선수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폭력적인 궤적을 그린 공이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콰아아앙!
위태로운 타이밍이었지만 포수는 한 치도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여차하면 몸으로 부딪쳐서 상대를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무게 중심마저 3루 쪽으로 향한 채 엄청난 충돌을 일으키고 튕겨져 나갔다.
홈 플레이트에는 스치지도 못한 주자가 구역질에 가까운 신음을 하며 바닥에 뒹굴었다. 보호 장비가 있어서 그나마 나을 테지만 포수도 바닥에 쓰러져서는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심판을 향해 시위하듯이 오른손 미트를 내밀어 보인다. 단단하게 붙들려 있는 야구공을 보고서 심판이 주먹을 뻗었다.
“아웃!”
“……!”
“이야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악!”
“……!”
“……!”
워낙 거대한 절망감에 빠졌던지라, 최태웅은 누군가가 달려들어 팔다리를 붙잡았을 때에야 사태를 이해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나올 일 없는 경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풍부한 상상력이 있어서 자신이 헹가래를 받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엘리펀츠! 엘리펀츠!”
“이야아아아아!”
“……!”
한참을 공중에서 시달리고 땅에 발을 디딘 후에야 최태웅은 어안이 벙벙한 감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정신이 돌아왔다는 말이지 당장의 상황을 머리가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묻고 말았다.
“우승한 거예요? 우리? 지금?”
“그래, 이 새꺄! 자기가 던져놓고도 모르냐?”
“정말로…….”
농담이 아닌가? 꿈도 아니고?
지금도 없어진 초능력이 돌아오거나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나와 함께 괴물 같은 배터리로 날뛰던 환각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내 팔로, 여느 야구선수와 똑같은 리드를 받아서 던진 공, 내 팀 야수의 수비로 잡아낸 공.
한국 시리즈 우승이라는 마침표를 온전히 나와 팀의 힘으로만…….
“원래 야구라는 게 그런 거야, 새꺄.”
어느 틈엔가 옆으로 다가온 유승혁 감독이 자신의 머리를 북북 헤집었다.
“야구가 팀 플레이라고 해서 남한테 의지하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너처럼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것도 아니야. 자기 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거, 그게 팀 플레이다. 지금 네가 배운 거.”
“…….”
최태웅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쳐다본 방향에는 지난 1년 동안 자신의 공을 꾸준히 받아온 포수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마운드 위에서 포수의 존재를 의식해본 적이 얼마 없었지. 자신에게는 신이 선물한 듯한, 배터리로 짝을 이루면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주는 마법과도 같은 표적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탓에 자신은 아직까지 야구를 하지 않았다.
괴물과 배터리를 이루는 것에 취해, 진정한 팀 플레이를 겪어보지 못했다.
첫 걸음조차 떼어보지 못한 것이다.
“야구가 이렇게 재밌는 거였네요……. 꼭 압도적으로 이기는 게 아니더라도…….”
“그러면 재미도 없는데 이 고생 해가면서 하고 있냐?”
“글쎄요. 잘 모르니까 이제부터 다시 해볼까 싶어요.”
“뭔 개소리야?”
유승혁 감독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최태웅을 힐끗 바라보았다.
최태웅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내년에도 잘 부탁드린다고요.”
< 괴물 배터리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