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89화 (89/90)

< 괴물 배터리 -089- >

089.

-엘리펀츠, 웨일즈전 스윕. 포스트 시즌 진출 가능성을 놓고 역장군.

-1.5게임 차. 가을야구 진출권의 향방은 아직도 짙은 안개 속. 전장은 잔여 3경기의 간접대결로 옮겨 가…….

-각 전문가들 ‘포스트 시즌 진출, 엘리펀츠가 훨씬 유리’.

-혼을 불태운 연장 혈투. 그에 맞서는 괴력의 2경기 선발 연투.

-팔콘즈 감독, 최태웅이 이틀 연속 선발 등판한다는 소식에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연장 완투까지 해내는 바위 같은 투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유승혁 감독, ‘포스트 시즌에만 진출하면 한국시리즈 우승 맡아놓은 셈’.

웨일즈는 이틀 연속 패배에서 완전히 기세가 꺾여 기어이 스윕을 당했다. 1.5게임 앞서고 있던 순위는 두 번째 경기에서 역전되어 역으로 1.5게임을 쫓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혼전이라느니 매직 넘버니 떠드는 사람이 많았으나 현실적으로는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었다.

엘리펀츠가 1승만 챙겨도 웨일즈의 가능성은 전승밖에 남지 않는다. 무승부를 감안하면 경우의 수가 조금 늘어나지만 동률로는 부족하다. 동률일 경우에는 맞대결 성적이 뛰어난 팀이 상위로 진출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웨일즈가 엘리펀츠에 1승을 앞섰지만, 이번 3연전에서 입장이 뒤바뀌었다. 적어도 웨일즈가 자력으로 우승을 확정지을 방법은 이제 없었다. 모든 것은 엘리펀츠의 남은 성적에 달린 문제였다.

스포트라이트는 대부분 최태웅에게 집중되었다. 엘리펀츠가 이만큼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3연전에서 이틀 연속 선발 등판을 한 최태웅 덕분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 투수도 정규 이닝 동안 무실점을 했으니 보통은 엘리펀츠가 지는 경기다. 최태웅이 아니었다면 누가 마운드에서 한 경기 내내 무실점을 한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과 별개로 최태웅은 잔여 3경기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상대 팀에서는 유망주나 테스트하는 잔여 경기에서 에이스 카드를 꺼낼 일이 없다는 것이 하나. 그냥 평범한 선발투수 일정상 3연전에 얼굴 들이밀 일이 없다는 것이 둘. 가을야구 진출이 확정된다면 1선발 카드로 쓰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으니 이런 데서 소모할 수 없다는 점이 셋.

유승혁 감독은 처음에 파격적이게도 포스트 시즌 개막지로 먼저 가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있어도 좋다는 허가까지 내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최태웅이 정중하게 고사했다. 루키인 선발투수가 자기 등판 없다고 경기장에도 안 나오면 구설수에 오르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실상은 조금 달랐다.

‘역시 안 돼. 아무것도 안 보여.’

선발로 등판한 다음 날이라고 해서 공을 전혀 안 던지는 게 아니다. 하루쯤은 완전히 휴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캐치볼이라도 한다.

최태웅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초조하게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연습에서든 실전에서든 항상 홈 플레이트 위에 각인처럼 새겨져 있던 스트라이크존이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닥터 K’도 발동이 안 되고……. 진짜로 초능력이 없어진 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나마 당장 남에게 눈치채일 일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초능력이 있을 때나 없어진 지금이나 130km/h도 안 되는 똥볼을 남발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꼴랑 1이닝 던지는데도 초능력이 없어지자마자 그렇게 얻어 터졌는데……. 이 상태로 어떻게 토너먼트 마운드에 올라가라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민에 끙끙거리는 사이에 엘리펀츠는 잔여 3경기를 2승 1패로 마무리 지었다. 웨일즈도 잔여 3경기를 모두 쓸어담았다는 점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가을야구 진출을 자력으로 확정지은 것이다.

최태웅은 그 사이에 혼자서 머리를 감싸쥔 채 까맣게 속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부상을 입었다거나 하는 핑계라도 대야 했다. 적어도 팀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나. 특정 날짜에 맞춰서 선발 등판할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은 마냥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불의의 사고라면 어쩔 수 없어도, 예측이 가능하다면 팀이 대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보고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최태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막연한 두려움과 우유부단함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초능력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4년 가까이 함께 해온 파트너.

며칠 사이에 갑자기 다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고 추상적이고 희망적인 기대가 그로 하여금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게 발목 잡았다.

‘언젠가 이렇게 될지도 몰라서 함부로 프로 같은 생각을 안 했던 건데…….’

사흘 동안. 하루하루 숨쉴 때마다 피가 말라붙는 심정이었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닥쳤더니 오히려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는 비열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심정마저 들었던 것이다.

‘하루라도 더 야구하고 싶다고, 뒷일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속이 쓰리네.’

착잡하면서도 개운한 마음으로, 최태웅은 감독실의 문을 두드렸다.

***

-최태웅, 갑작스러운 등 통증 호소. 엘리펀츠의 가을야구 초비상?

-이틀 연속 등판의 악영향인가?

폭탄이 터졌다.

모든 야구 팬의 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시리즈 우승. 그 중간 길목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그 첫 경기 선발에서 최태웅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통 선발투수는 5일 이상의 간격으로 등판을 한다. 단기전에서는 아무래도 그 로테이션을 못 지키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승수에 여유가 생긴다면 에이스는 되도록 휴식을 보장해주고자 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1차전 선발이 최태웅이 아니더라도 썩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 혹사를 하고서도 3일밖에 쉬지 못했으니까. 페넌트 레이스와 포스트 시즌 사이의 휴식일을 생각하면 4일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하루쯤 휴식을 더 주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팬들이 알아서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한 인선도 아니다. 인터뷰는 불가피했고 거기서 유승혁 감독은 정식으로 최태웅의 부상을 발표했다.

“일시적인 근육통이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면 포스트 시즌에서의 기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태웅 선수는 올 시즌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엘리펀츠의 선발투수진 한 축을 책임질 인재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최태웅 선수의 상태를 우선할 것입니다.”

“그래도 로스터에 최태웅 선수의 이름 자체는 포함되었는데요. 등판 계획이 없다면 일부러 중요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게 둘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최태웅 선수의 출장 일정은 최태웅 선수의 상태에 따라 좌우될 것입니다.”

“병원 검사 결과에서는 뚜렷한 이상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혹시 상대 팀이 대응에 혼란을 겪게 하기 위한 책략은 아닌가요?”

“엘리펀츠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경기 외적인 요소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이상입니다.”

인터뷰 이후에 유승혁 감독은 상당한 비난에 휩싸였다. 팬들이 보기에는 성적 때문에 에이스를 혹사한 탓에 탈이 난 걸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변명할 만한 말이 없을 뿐더러 실제로 마냥 억울한 것도 아니었기에 유승혁 감독은 구차하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유승혁 감독이나 코칭스태프나 이해되지 않는 일은 하나 있었다.

“검사 결과는 이렇게 깨끗한데…….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는 겁니까?”

“이놈 혹시 꾀병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닌데……. 이놈이 자기한테 무슨 득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하겠어요?”

“누구 악감정 살 일 한 거 아니죠?”

“악감정 조금 살 게 있었어도 그렇다고 지금 이 타이밍에 꾀병 부리는 거면 저놈이 완전히 미친놈이죠.”

“저도 그냥 해본 말이긴 한데요. 꾀병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멀쩡하단 말이에요.”

“하기야,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나와서 연습하던 거 보면 공이 확 이상해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난감한 부분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던지던 공이나 어제오늘 보여준 공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됐어요. 인터뷰까지 벌써 다 하고 선발투수도 발표했는데 뭘 어쩌겠어요. 다 끝난 문제지.”

코칭스태프 입장에서야 청천벽력이겠어도 포스트 시즌 직전에 1선발이 등판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거야 희한한 일도 아니다. 스포츠 선수에게 부상은 정말 언제 어떤 식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천재지변인 것이다.

가장 든든한 카드를 못 쓰게 되었다는 점이 아쉽다는 말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문제지만. 하려고 들면 없는 사람인 셈 치고 새롭게 전략을 구상하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한 가지. 코칭스태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독의 결정이 하나 있었다.

“이러면 우리 투수가 딸릴지도 모르는데, 정말 최태웅이 로스터에 넣고 가실 겁니까?”

“맞습니다. 느즈막하게라도 좀 상태 돌아오면 모르겠는데……. 원인불명이라는 건 언제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잖습니까.”

단기전은 팀이 보유한 전력을 최대한 쥐어짜내야 하기 때문에 로스트 자리 하나가 너무나도 절실하다. 그걸 경기에 못 나갈 공산이 큰 선수한테 공짜로 앉혀주다니?

은퇴가 예정돼서 로스터에도 없는 선수가 더그아웃에 남아 있는 경우라면 있다. 규정상 로스터 외의 선수는 더그아웃에 들어올 수 없지만 예우 차원에서 심판이나 상대 팀에서나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심판 입장에서야 상대 팀에서 클레임을 걸면 쫓아낼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도 논란이 격해지는 이유 중 하나라서 유승혁 감독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렇다고 이미 제출한 로스터를 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뒤집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자네들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야.”

“감수요?”

“다들 느끼기는 하고 있을 거 아니야. 젊은 애들 사이에서 최태웅이 비중.”

“…….”

유승혁 감독이 애매하게 말한 것은 ‘이렇게만 얘기해도 다들 알아듣겠지’ 싶어서만이 아니었다.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구체적으로 표현이 될지가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정신적인 지주, 라며 간단하게 얼버무릴 수도 있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스타급 베테랑이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가져다주는 무형적인 역할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이놈이 야구 자체에 엄청난 천재라서 뭔가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피칭 이외의 부분에서는 오히려 아마추어만도 못한 부분이 있어서 종종 조언을 얻을 정도니까.

강력한 에이스는 팀원들에게 ‘지지 않는다’라는 자신감을 주기야 해도, 그건 마운드에 올라가 있을 때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최태웅이 근처에 있음으로 인해서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게 된다고 할까?

그러한 팀의 분위기는 분명히 최태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말로 딱 정리하지야 못해도 코칭스태프들은 모두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베테랑들은 별 영향이 없는 모양이지만 최태웅이 자리에 있음으로 인해서 젊은 선수들은 어떠한 종류의 마인드를 다잡는다. 단지, 그것이 로스터 한 자리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 그리고 유승혁 감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한편, 최태웅의 입장에서는 유승혁 감독의 그러한 조처가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확고부동한 1선발로 자리매김하면서 자신이 가지는 전력적인 비중을 모르는 바 아니다. 가장 중요한 단기전에서 빠지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울 지경인데 로스터에 포함이 되다니?

‘나를 말려 죽이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 다 내 업보니까 남한테 뭐라고 할 계제는 아니지만…….’

치트나 다름없는 수단으로 엄청난 영광을 가로챘다는 자각은 있다. 그 죄책감이 항상 가슴에 얹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큰 착각이었다.

당시에는 과실을 누리느라 바빠서 죄책감 따위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걸 잃어버린 뒤에야 기다렸다는 듯이 짓눌러오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무게일 것이다.

***

-전국의 야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마침내 기나긴 페넌트 레이스가 끝나고 모두가 고대하던 가을야구, 리그 챔피언십 1차전 개막일이 찾아왔습니다.

-올해 야구 팬들은 정말 흥겨운 한 해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만큼 마지막까지 어느 팀이 상위권으로 올라갈지 가늠할 수 있는 혼전과 역전의 연속이었거든요.

-각 팀의 순위 싸움도 그렇지만 선수 개개인의 기록도 대거 터져나오면서 수많은 스타들이 새롭게 꽃을 피웠지요.

-예. 대표적으로는 역대 세이브 신기록이 나왔고, 오랜만에 200안타의 대기록도 등장했지요. 또 한편으로는 50홈런 타자가 동시에 두 명이나 등장한 두 번째 시즌이 되기도 했습니다. 야구 팬으로서는 정말 즐길 거리가 많았죠.

-불펜이나 타자 쪽의 기록은 그런데, 선발투수 쪽의 기록은 쏟아졌다면 쏟아졌고 가물었다면 가물었죠.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한 선수가 다 해먹었거든요.

-대표적인 기록으로만 따져도 7년 만에 토종 20승 선발투수가 나왔고요. 평균자책점 0.23은 어후, 상상도 못할 역대 최고 기록이죠.

-그 외에는 선발투수 부문에서 4관왕. 모두 경쟁자가 없는 압도적인 1위였죠. 한 시즌 완봉 완투 기록도 갈아치웠고요. 이게 올해 데뷔한 신인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앞으로 도대체 뭐할 거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예요.

-그런 만큼 엘리펀츠 팬 분들의 아쉬움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합니다. 모두 소식을 들으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최태웅 선수가 등 부위에 통증을 호소했다고 하네요.

-포스트 시즌 첫 경기인 만큼 팀의 에이스가 포문을 열어주리라 생각했지만,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셨죠.

-하지만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팀 내 전력사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포스트 시즌 로스터에 최태웅 선수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죠.

-포스트 시즌에서는 평소보다도 로스터 한 자리 한 자리가 절실하거든요. 실제 전력이 못 되는 선수에게 이 자리를 남겨주는 일은 없다고 보셔도 좋습니다. 1차전은 아쉽게 되었지만 4차전, 5차전까지 가면 최태웅 선수가 마운드에 선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리고 워낙에 임팩트가 있다 보니까 최태웅 선수에게 초점이 많이 쏠린 상황인데요. 1차전 선발로 낙점된 서기찬 선수도 결코 만만치가 않습니다. 후반 엘리펀츠가 약진하는 원동력이 된 선수 중 하나니까요.

-바로 그렇습니다. 풀타임은 올 시즌이 처음이고 가을야구 경험도 없는데 이렇게 1차전 선발로 나왔다는 자체가 벤치의 신임도를 보여주는 거거든요.

포스트 시즌답게 관중석은 만원이었다.

최태웅은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반드시 더그아웃에 앉아 있으라는 지시가 나왔다. 당장 그라운드를 밟고 있지 않아도 벤치 멤버는 모두 함께 경기를 하는 거라는 뻔한 이야기였다.

‘완전히 고문이네.’

말소리까지야 안 들리지만, 관중들이 자신을 힐끗거리는 기척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실 상대팀이라면 모를까, 엘리펀츠 팬들이 자신을 비난할 일은 없다. 불과 한 시즌뿐이라고 해도 자신이 달성한 기록은 팀 내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자랑했으니까.

며칠 전만 해도 이런 시선에 내심 우쭐거렸는데. 지금은 다 쌓이고 쌓인 업이 돌아왔다는 생각에 바늘 수천 개로 위장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었다.

“플레이 볼!”

겉으로 보기에 선수들은 최태웅의 이탈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처음 밟는 가을야구 무대에 긴장한 기미야 있지만, 신경을 날카롭게 갈아주는 종류의 긴장감이다. 긴장감은 오히려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집중력으로 변해서 선수들의 등을 떠받쳤다.

따악! 따악! 퍼억! 퍼억!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야구는 원래 꼴찌인 팀이 1위인 팀을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스포츠 중 하나다. 이것은 상위 팀으로 올라갈수록 평준화되며, 가을야구에 진출할 팀이라면 당일의 컨디션이나 운에 승패 절반이 갈린다고 볼 수 있다.

팔콘즈는 하위권에서 급부상한 엘리펀츠와 다르게 오랫동안 왕좌를 지킨 전통의 강호. 그런 의미에서 단기 토너먼트전에만 존재하는 어떤 마성을 능숙하게 제어하고 있었으나, 엘리펀츠의 침착한 패기를 쉽사리 압도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까 저놈도 뭐가 많이 달라졌네.’

최태웅은 1회부터 140km/h 후반대가 퍽퍽 찍히는 서기찬의 투구를 보고 내심 감탄했다.

‘묵직하다는 게 저런 거구나. 팔 휘두를 때 덜컥하면서 힘 잡아먹는 게 전혀 없네. 매끄럽게 체중이 다 실려.’

한때 자신에게서 꽂혀서 무슨 노하우를 배워가겠답시고 설치는 통에 골치가 아팠는데. 괜히 창창한 선수 앞길에 똥 뿌리는 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이에 혼자 떨어져 나가더니 선발투수진의 한 축으로 쑥쑥 커버렸다.

솔직히 어떤 깨달음을 얻고 갔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느린 공으로도 얼마든지 아웃을 잡을 수 있으니, 빠른 공으로는 더욱 잘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걸까? 아니면 빠른 공으로도 상대의 허점을 찌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 간 걸까?

따악!

-빠집니다! 빠졌습니다!

서기찬이야 원래부터 역대급 계약금을 받고 들어온 유망주니까 그렇다 치고. 정말 괄목할 만하게 성장한 것은 내야진도 마찬가지였다.

수비가 잘하든 못하든 신경 쓰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다. 아무래도 땅볼을 많이 유도하는 편이라 내야진의 수비에 대해서는 종종 어떤 인상을 갖게 되기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그라운드 볼러인 자신의 뒤에 서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도 있었다. 유격수비가 한 번 구멍을 내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쪽도 어느 날부터인가 실책을 하고서도 사과하는 시늉을 하지 않게 되었다.

특별히 불쾌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신경 자체를 쓰지 않았으니까. 다만, 그 즈음부터 이건 좀 아니다 싶은 타구가 나왔을 때 반사적으로 기대하면서 돌아보는 일이 늘어난 것 같았다.

‘깡이 장난이 아니네. 리드를 저만큼이나 해? 뛰려는 거야 말려는 거야?’

무모하다고 표현할 플레이도 여럿이지만 맥을 끊는 느낌은 한 번도 없었다. 선수들의 표정만 봐도 견적이 나온다. 보통 같으면 할 리가 없는 주루를 반복하다 보니까 시늉만 해도 팔콘즈의 야수들은 깜짝깜짝 놀랐다. 허탕을 치면 허탕을 치는 대로, 그러다가 불쑥 도루라도 해버리면 완전히 허를 찔려서 가슴 철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이렇게 야구하고 있었구나…….’

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들하고 야구하고 있었다는 건가? 절대 오래되었을 리도 없는 기억인데 꿈꾸는 듯이 아득하게 실감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한국 시리즈 1차전! 팔콘즈 초토화! 정상을 향한 파죽지세의 코끼리 행진!

-에이스가 나올 자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에이스의 부재에도 흔들리지 않아…….

이변이 일어났다. 최태웅의 부상 소식이 알려진 시점에서 전문가들이 8할의 우세를 점쳤던 팔콘즈가 3연패로 탈락해버린 것이다.

야구만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스포츠도 없으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남부리그 왕좌를 지킨 팀과 만년 꼴찌 팀의 대결이다. 최태웅이라는 반칙 카드가 없어졌다면 이기더라도 혈투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3경기를 모두 5점 차이 이상으로 압도해버린 것이다.

시즌 중에도 여러 차례 맞붙었지만 팔콘즈와 5점 이상 차이를 벌린 적은 없었다. 유망주의 포텐이 일제히 터지는 식으로 상승세 팀의 전형을 보여준 엘리펀츠였지만 가을야구에서까지 이만한 저력을 지킬 줄은 몰랐기에 많은 야구인들이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충격에 빠진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북부 리그의 챔피언십 시리즈는 5차전을 꽉 채우는 전 경기 2점 차 이내의 치열한 사투가 되었다. 휴식일이 늘어난다는 점을 제외해도 엘리펀츠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호재밖에 남지 않았다.

“한국 시리즈에서는 좀 어떻겠냐? 꼭 1차전은 아니더라도, 아니, 꼭 선발이 아니더라도…….”

“……죄송합니다.”

팀의 압승은 최태웅의 가슴에서도 그나마 마음의 짐을 덜게 해주었다.

보통 에이스라면 경기에 못 나간다는 생각으로 엄청난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최태웅은 이미 마음속에서 프로의 세계와 선을 긋고 있었다.

화려하게 불태운 1년.

인생의 중요한 길목에서 헛꿈으로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청춘의 소중한 페이지에 장식할 무언가를 얻어간다고 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 길을 계속 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 번 이렇게 가슴이 놀라버렸으니, 초능력이 돌아온다고 해도 이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7대 8, 드래곤즈 극적인 역전 끝내기 홈런!

-피 말리는 사투 끝에 드래곤즈 한국 시리즈 진출!

-드래곤즈의 한국 시리즈 공략 최대 난제는?

-무패의 거성 최태웅! 한국 시리즈 등판 시점은 과연?

북부 리그의 챔피언이 결정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한 번 쏟아졌다.

사적으로 친분 쌓은 기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 오갈 때만 주의하면 최태웅이 귀찮아질 일은 없었다. 특급 에이스인 루키를 보호하는 차원에서인지 프런트 측에서 단단히 벽을 쳐준 것이다. 최태웅의 입장에서야 그런 배려를 받을수록 위가 쓰렸으나, 남이 알 리 없는 속사정이었다.

***

“뻥카라고 생각했던 거야. 웨일즈는.”

“뻥카요?”

“최태웅이 놈, 내보내지도 않을 거면서 벤치에 앉혀둔 거 말이야.”

제삼자의 입장에서야 흥미진진한 관전 포인트일지 모르나, 당사자에게는 식은땀 줄줄 흐르는 만장절벽이 따로 없다. 드래곤즈도 출장 여부조차 불확실한 최태웅에 대한 대책 논의가 최우선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최태웅이는 스타일상 거의 아무 타이밍에나 불쑥 기습적으로 등판시킬 수 있는 타입이야.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 나올까, 내일 나올까 끙끙 앓아야 돼. 꼭 선발로 마운드에 올라와야만 위협적인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러면 설마……. 불펜에서 뛰게 할 생각이라고 생각했다고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지. 보통 같으면 리스크도 큰 작전이지만, 레벨 차이가 너무 크잖아. 방어율 0.23이 뉘집 개 이름인가? 저만하면 자는 거 두들겨 깨워서 내보내도 통하는 원 포인트짜리 만능 소방수야.”

“…….”

가장 강력한 카드를 스스로 봉인하는 것도 분명히 전법 중 하나이기는 하다. 아직 최강 카드조차 끄집어내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상대는 마음이 쫓기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웨일즈의 패인에는 최태웅을 의식하느라 투수력을 충분히 쏟아내지 못한 부분도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

가장 뛰어난 투수를 일부러 아낀다.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실제로 최태웅이 등판 가능한 상태라면 웨일즈는 작전에 고스란히 넘어간 셈이 된다.

하지만 최태웅이 등판 가능한지 어떤지 여부는 첩보라도 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이에 대해서 드래곤즈가 꺼내놓은 대책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오늘 드래곤즈는 벌써 네 번째 투수 교체입니다. 망설임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칼 같이 냉철하다고 해야 할까요.

-단기전에서는 1점의 무게가 정규시즌 때와 비교도 안 되니까요. 안타 맞았다고 나와서 공 하나 던지고 교체되는 경우도 결코 드문 것이 아닙니다. 선수의 자존심을 우선할 상황이 절대로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드래곤즈의 리스크가 크지 않을까요? 넉넉한 점수 차이로 3연승을 한 엘리펀츠와 다르게 드래곤즈는 5차전까지 치뤘고, 휴식일도 적었거든요. 심지어 마지막 경기는 투수를 7명이나 꺼내는 혈전이었고요.

-체력적으로 보면 확실히 열세지만, 사실 한국 시리즈는 정신력으로 충당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거든요. 모든 힘을 쏟아내고 쓰러져도, 한국 시리즈만 끝나면 경기가 없으니까요. 일단 오늘 경기를 이겨야 내일이 있다는 사고방식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긴. 정규시즌에는 부상을 염려해서 피할 공도 한국 시리즈에서는 맞고 걸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경우가 많죠. 과연, 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기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유승혁도 문외한이 아니다. 투수 기용만 봐도 드래곤즈의 방침은 꿰뚫어볼 수 있었다.

저건 단순히 최태웅의 등판 가능성을 배제한 것만이 아니다. 일종의 떠보기이기도 했다.

최강 카드를 아껴서 상대도 전력을 쏟지 못하게 한다?

말이야 좋지. 그러다가 막을 수 있는 점수를 내줘서 지면 무슨 본말전도란 말인가.

즉, 드래곤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정말로 나올 수 없는 게 맞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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