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88- >
088.
위장 선발까지야 당연히 선수들과도 합의된 사항이다. 어제 등판이 가능하도록 몸을 만들어놨는데 언질 없이 오늘로 밀린다면 위장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최태웅과 맞대결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변수라면 변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다. 원래 오늘 등판하기로 한 엘리펀츠 선발투수가 호투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만, 100구가 훌쩍 넘어가는 투구는 작전과 완전히 무관했다.
“지금 그렇게 고집 부릴 일이 아니야. 지금 우리가 너 갈아넣어서 얻는 게 도대체 뭐냐?”
“선발투수가 이닝 더 소화하는데, 얻는 게 왜 없습니까? 최소한 저놈 올라와 있는 동안에는 제가 마킹해야 불펜 싸움이 되죠.”
“그거야 네가 최소한 쌤쌤으로 막아줬을 때 얘기고! 나는 무슨 동태 눈깔인 줄 알아!”
“막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저놈 내려가기 전까지는.”
머리야 정면을 향하고 있지만, 김지혁의 눈동자는 엘리펀츠 더그아웃 쪽을 지그시 쏘아보고 있었다.
어제의 위장 선발은 결국 ‘정면으로 붙으면 못 이기겠으니까 한 경기 버리자’라는 의미. 에이스로서 자존심이 상할 텐데도 팀을 위해서 굽힌 어제와는 썩 다른 반응이다. 일방적으로 찍어누를 짬밥도 아닌지라 강구한 감독은 난처할 따름이었다.
“불펜이라면 저쪽도 우리 못잖게 아꼈어. 한두 이닝 먼저 돌린다고 탈나지 않아.”
“한두 이닝 더 소화하고 못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기가 문제죠.”
“사기?”
“로테이션대로 나온 놈한테 털리는 거야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잖습니까. 아무리 올해 깽판을 쳤대도 기껏해야 루키 한 놈한테 이틀 연속으로 삥 뜯기는 거라고요. 이런 식으로 물러나면 두고두고 호구 잡힙니다.”
“엘리펀츠랑 오늘 빼면 한 게임 남았는데 호구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호구!”
“올 시즌만 하고 은퇴할 거 아니잖아요. FA로 빠지는 애들도 거의 없고, 올해 멤버 거의 그대로 내년도 갑니다. 위장까지 해놓고 손도 못 쓰면 가오 죽어요. 그 알껍질 하나 깨는 게 어떤 건지 아시잖아요?”
“…….”
제법 선을 넘은 태도였으나 감독은 언성을 높이지 못했다.
그도 한 팀의 감독이기 전에 승리욕을 지닌 사람이다. 비난까지 감수한 꼼수가 새파란 애송이 하나한테 짓밟힌 상황이 결코 마음에 들 수 없는 것이다.
“120구 넘었다. 여기서 더 객기 부리다가 털리면 어떤 소리 들을지 알지?”
“욕먹는 건 어제 위장한 시점에서 당연한 겁니다. 지금 내려가거나 끝끝내 지면 거기에 더해서 비웃음까지 당하는 거고요. 그런데 계속 던지면 이길 가능성도 있잖아요? 이기면 욕만 먹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새끼. 입만 살아가지고. 한 마디를 안 져요.”
“죄송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음 편한 결정은 아니었다. 지켜보는 선수들도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서 전의는 이미 뭉퉁뭉텅 깎여 나간 채였다.
그럼에도 그라운드를 밟고 설 수 있는 것은 가슴에 남은 일말의 독기 때문이었다.
“이미 싸지른 똥을 이제 와서 어쩌겠냐.”
“졌는데 욕까지 먹으면 분통 터져서 살겠냐. 깔끔하게 이기고 욕먹자!”
“씨발! 그래, 붙어 봐!”
***
엘리펀츠 선수단은 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최태웅이 아직 불펜에서 뛰고 있던 시기. 구원투수로 등판해서 1이닝을 깔끔하게 틀어막은 그가 다음 이닝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올라올 때, 상대팀의 표정이 딱 이랬던 것 같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의아함의 정도가 달랐다. 당시의 최태웅은 더 던지려면 얼마든지 던질 수도 있는 투구수와 체력을 가졌다.
하지만 김지혁은 지구력 면에서 수위에 드는 편도 아니고, 투구수도 이미 120개를 훌쩍 넘어간 상태였다.
퍼억! 퍼억! 따악!
“스트라이크 아웃!”
“볼!”
“아웃!”
그럼에도 김지혁이 쏘아내는 독기는 어린 유망주들을 윽박지르기에 충분했다.
몸쪽 위협구에 잘 대처하는 방법? 까짓 거 한 대 맞고 걸어 나가면 그만이라며 공포심을 무시하면 된다.
하지만 마음가짐을 좀 고쳐먹는다고 해결된다면 누구도 야구하느라 그 고생을 하지 않는다. 진짜로 몸에 맞고 나가려고 반쯤 일부러 들이대도, 백 수십 km/h짜리 공 이상이 주는 어떤 박력이 몸을 짓눌렀다.
“…….”
“이거 괜찮나?”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아웃 카운트 하나 잡힐 때마다 조마조마한 기쁨을 토하던 웨일즈 관중도 슬슬 오싹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하면서 비비적거리길 어느덧 9회.
179구라는 투구수를 제물로 바쳐서 기어이 정규이닝을 혼자 다 소화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도 0대 0.
시작할 때와 다를 바 없는 스코어에 사람들은 가슴이 꽉 메이는 기분이었다.
거기다가 쐐기까지 박듯, 최태웅이 터벅터벅 마운드로 걸어 올라온다.
웨일즈의 관중들은 머리에 묵직한 돌이 얹힌 것만 같아졌다.
-일단 엘리펀츠는 아직 투수를 교체할 의향이 없는 듯합니다. 불펜을 준비 중이기는 한데 가벼운 캐치볼을 하는 정도죠?
-예. 그렇다고 딱히 무리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게, 투구수가 이제 겨우 80개거든요. 눈에 보이는 구위야 늘 저런 식이었으니까 신경 쓸 게 아니고, 지금까지 뚜렷한 위기상황조차 없었어요. 적어도 이 경기만 놓고 보면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최태웅 선수는 바로 어제도 선발로 등판해서 5이닝을 소화했죠. 그 점을 감안하면 이제 슬슬 한계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이후로는 최태웅 선수는 한동안 휴식이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가을야구에 진출하든 못하든 말이죠.
-아마도 오늘 양 팀에서 선발투수를 길게 가져가는 건, 실리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인 요인이 크다고 봅니다. 올해 최태웅 선수는 말할 것도 없이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했고, 김지혁 선수도 리그를 대표하는 오랜 에이스거든요.
-맞습니다. 현대야구에서 에이스 간에 9이닝 완투 맞대결! 이런 경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사실 프라이드를 못 가지는 선수는 마운드에서 팀의 승패를 책임진다는 중압감을 못 견디거든요. 에이스라면 프라이드가 강할 수밖에 없어요. 절대로 자기가 먼저 내려가겠다고 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중계진이 보기 드문 끝장 투수전을 예찬했으나 우열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평범하게 대등한 승부만 되었어도 이틀 연속 등판인 최태웅에게 가산점이 들어갈 판국이다. 그런데 여느 때처럼 유유자적하게 타자를 낚아올리는 최태웅과 달리, 김지혁은 악바리 같이 잇몸으로 물어뜯고 있을 뿐이다. 피투성이가 된 맨 머리로 쇳덩어리를 후려치는 듯한 처절함에는 엘리펀츠를 응원하는 관중마저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고작해야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이 최태웅이라는 제왕의 군림에 익숙해지기에는 충분했다.
타자를 농락하듯 유유자적하게 세 타자를 고꾸라뜨리는 광경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몰두한 것은 웨일즈의 다음 선택이었다.
-정말로 올라왔습니다. 이러면 사실 웨일즈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다고 해도 타격이 클 텐데 말이죠.
-하지만 바로 이런 열정의 드라마가 스포츠 아니겠습니까? 프로로서는 사실 걸맞지 않은 태도일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팬들에게 로망을 선사해주는 것이 프로야구선수라는 직업이라고도 할 수 있죠.
-김지혁 선수가 거기까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오랜만에 지켜보는 근성의 시합입니다. 오늘 경기는 승패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마운드에 올라온 김지혁은 명백하게 지쳐 있었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것이, 피곤에 찐 노인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타석을 노려보는 눈빛의 독기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으나, 의지와 현실은 엄연히 달랐다.
따악! 따악! 따악!
“아웃!”
“스트라이크!”
“세이프!”
“아웃!”
“세이프!”
“세이프!”
아무리 몸쪽 공으로 윽박지른다고 해도. 상대가 가까스로 껍질을 깬 유망주라고 해도. 이렇게 몇 차례나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것에 휘둘릴 정도로 어수룩하지는 않다. 그랬다면 아직도 벤치와 선발을 왔다갔다하고 있었을 것이다.
‘진짜 눈뜨고는 못 보겠네.’
타석에 들어온 손철민의 얼굴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올해 최태웅이 저만한 임팩트를 선보였지만, 김지혁은 한국의 에이스 소리를 들은 바 있는 베테랑이다. 손철민이 아직 고교야구를 할 때부터 프로에서 활약한 영웅 중의 영웅이다. 그런 인물이 최태웅 같은 혜성과 맞붙어 꿈틀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지독한 연민과 짜증이 치밀었다.
물론, 짜증의 대상은 김지혁이 아니라 자신이다.
이제 어떤 팀의 에이스라도 너댓 타석에 한 번쯤은 때려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진작에 한 점이라도 냈으면 저 처절한 발버둥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뭔가 울컥했다.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제가 쉬게 해드리겠습니다!’
따악!
-어어? 어어어? 쳤습니다! 우측 담장! 우측 담장!
-넘어갔습니다! 만루 홈런!
“……!”
명치를 훅 찌르고 들어오는 일격에 경기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느닷없이 얻어맞은 뒤통수는 아니었다. 전조라면 이전 이닝부터 있었다.
완전히 제구가 무너졌다고 할 수야 없지만 한 타자에 하나씩은 꼬박꼬박 한복판 실투가 들어왔다. 타구도 결정적인 장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내야에서 처리해내지도 못했다.
이번 이닝만 해도 그걸 정확하게 캐치해낸 타자들이 베이스를 꽉 채웠다. 그 와중에도 앞선 세 타자는 단타로 처리했다는 점이 오히려 박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이건 정말 결정적이네요. 웨일즈 입장에서는 정말 거대한 장벽이 되는 쐐기점입니다.
-보통 투수가 정규이닝을 혼자 다 막았는데도 승리투수가 못 되었다면 운이 나빴다고 하는데, 이건 상대가 나빴다고 해야겠네요. 최태웅 선수에게 정규이닝 완봉은 결코 드문 게 아니었으니까요.
-누구도 김지혁 선수의 오늘 피칭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저 선수가 아니라면 누가 최태웅 선수를 상대로 이렇게 뜨겁고 치열한 근성을 보여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차라리 이제라도 얻어맞아서 후련하다, 같은 반응은 없었다.
분함을 짓씹으며 눈에 핏대까지 세웠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 이상은 감독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비로소 교체된 웨일즈의 구원투수는 남은 타자 한 명을 깔끔하게 틀어막았다.
“…….”
그리고, 최태웅이 다시금 뚜벅뚜벅 마운드를 향해 걸어 올라왔다.
일정상으로만 따진다면 최태웅이야말로 더욱 처절하게 혹사당한 셈이지만, 실제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똑같은 이닝을 소화해놓고서도 투구수는 김지혁의 절반에 가까웠으니까.
느릿느릿 마운드를 다지는 모습에 웨일즈 타자들은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마왕의 강림.
처음부터 선발투수였던 것도 아닌 주제에 200이닝 가까이 소화하며, 고작 5자책점을 기록한 역대 최강의 몬스터.
그런 악마에게서 이번 1이닝 동안에만 최소 4점을 뜯어내야 하는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
최태웅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처음에는 ‘내가 뭘 잘못 봤나?’ 정도로 눈을 끔뻑거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 순간엔가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최태웅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왜 스트라이크존이 안 보이는 거지?’
***
최태웅이 초등학교에서 야구를 한 기간이라고 해봐야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군대에서 야구공을 다시 잡고 지금까지는 4년 남짓한 세월.
요컨대, 야구 인생의 절반 이상을 초능력과 함께 했다는 말이다.
마운드에서 바라본 홈 플레이트에 스트라이크존이 보이는 경치는 이미 일상이었다.
그런 일상이 대뜸 무너진 꼴이라 최태웅은 머릿속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반사적으로 자문해봤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초능력이 생길 때는 별똥별에 소원이라도 빌었나? 방사능에 오염돼서 돌연변이가 되기라도 했나?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보이기 시작했던 환각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뿐인데 무슨 해답이 있단 말인가!
‘어, 어떡해야 되지? 그냥 던져야 하나?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연습 중이라도 눈앞이 캄캄할 지경인데 지금은 수천 관중의 앞이다. 어느 쪽이 가을야구에 진출할지를 가르는 사실상의 분수령. 정신적으로나 스코어적으로나 승패가 거의 갈렸다지만,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전의 한복판.
“플레이!”
“……!”
최태웅은 가슴이 철렁해서 더그아웃 쪽을 돌아보았다. 딱히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온 애원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구원투수가 몸을 풀고 있었으나 여전히 캐치볼 수준이었다. 등판에 대비한다기보다는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몸을 움직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벼운 운동이었다.
뗏목을 타고 망망대해까지 밀려온 듯한, 온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절망적인 막막함.
‘자신이 왜 이런 자리에 서 있게 되었지?’ 라는 생각에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면 좋을지였다.
‘이, 일단은 그냥 던져보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사람은 분위기를 타는 동물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미 마운드를 밟은 상태에서 대뜸 내려가겠다는 건 어색했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체력이 떨어졌다면 진작에 바꿔달라고 하면 됐을 게 아닌가.
게다가 이런 생각에는 지금까지 누려온 초능력 특성도 단단히 한몫 했다.
‘매의 눈’은 그저 타자의 약점이 되는 코스를 실시간으로 보여줄 뿐이다. 환각이 보이지 않아도 그 순간 그 코스가 약점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기 공이 프로 수준이 아니더라도 당장 얻어터지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퍼억! 퍼억! 퍼억!
“볼!”
“볼!”
“스트라이크!”
얇디얇은 카드로 탑을 쌓는 것처럼, 최태웅의 오른팔이 신중하게 공을 쏘아냈다.
미트에 공이 퍽퍽 꽂힐 때마다 마른침이 저절로 삼켜진다. 오늘이야말로 프로에서 처음으로 정직한 투구를 한 날이거늘. 마치 속임수를 쓰고서 상대에게 들키지는 않았을까 조마조마하게 눈치를 살피는 기분이었다.
따악!
“아웃!”
외야로 까마득히 솟구치는 타구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행히도 요란한 소리만큼 멀리 뻗지 않아서 외야수가 낚아챘으나, 관자놀이에 이미 배어난 땀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라 솥뚜껑 앞에서 침착하지 못한 것이다.
따악! 따악! 따악!
“세이프!”
“볼!”
“아웃!”
“세이프!”
“……!”
하지만 방금 같은 우연은 꾸준하게 꼬리를 물어주지 않았다.
강속구 투수야 가끔 실투해도 반드시 장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예상치 못한 찬스볼에 타자가 허를 찔리는 것도 있지만, 단순히 보고 대응하는 데만도 상당한 피지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반쯤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130km/h 남짓한 똥볼이 단타나마 뻥뻥 연달아 맞아나가는 일은.
“선배님. 방금 제 공 어땠습니까?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주자가 두 명이나 나간 탓에 엘리펀츠 더그아웃에도 움직임이 생겼다. 포수가 잠시 마운드로 걸어 올라오는 사이에 준비 중이던 구원투수가 본격적으로 연습투구를 시작한 것이다.
4점 차이에 2사 1, 2루. 절체절명의 위기랄 것까지야 없지만, 경계할 필요쯤은 충분히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최태웅의 목소리가 쭈뼛쭈뼛 기어 들어가는 것도 당연했으나, 실제로는 켕기는 구석이 있어서일 뿐이었다.
“어, 이상하던데.”
“지, 진짜로요?”
“……새삼스럽게 뭘 그래? 언제 하루라도 안 이상했던 적이 있는 것처럼.”
“아…….”
듬직한 1선발이 맞아 나가기 시작했어도 엘리펀츠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투수가 한 경기에서 안타 너댓 개쯤 얻어맞는 것은 당연하다 못해 호투의 영역이다. 최태웅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연속 안타를 얻어맞은 적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제 5이닝 던진 후에 곧바로 선발 등판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지금 당장 내려가도 기립박수를 받아 마땅할 지경이다.
“가식 떨지 마. 어디서 섬세한 척이야? 그냥 꼴리는 대로 던져. 한 방 얻어터져도 꼴랑 3점이잖아. 그때 가서 바꾸면 되지 뭐.”
“…….”
어떤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최태웅은 결국 입 밖에 소리가 되도록 내어놓지 못했다.
감정대로라면 부상 같은 핑계를 대서라도 당장 마운드에서 도망쳐야 했다. 팀의 가을야구 진출을 크게 좌우하는 이 경기는 초능력도 없는 자신 따위가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마운드 아래로 도저히 다리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고집이라기보다는 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쳐봐야 궁여지책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할 만한 일말의 이성도 남아 있었다.
‘여기서 내려가면 뭐가 달라지지?’
자신은 이미 초능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치트에 힘입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부정이건 뭐건 이 일은 돌이킬 수가 없다.
부상 핑계 따위로 은퇴해버리기라도 할까? 시즌 방어율 0.25를 찍은 20승의 몬스터가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데 대뜸 은퇴하면 그 파장은 어떠할 것인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 ‘어떻게든’이 뭔지를 알 수 없어서 문제지만, 그 막연한 우격다짐의 미련이 최태웅의 발을 억지로 마운드에 쑤셔 박고 있었다.
퍼억! 퍼억! 따악!
“볼!”
“스트라이크!”
“파울!”
한편, 상대 타자들은 이번 이닝에 들어서 나타난 최태웅의 이변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볼의 비중이 조금 늘어난 정도가 아니다. 구위는 거의 변화가 없지만, 속을 꿰뚫어볼 것처럼 맥을 찌르는 절묘함이 어디로 사라졌다.
보통의 투수라면 정신줄이 완전히 나가서 포수가 잡지도 못하는 폭투를 연발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그것은 타석에서 맞상대해야 하는 타자들로서는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앞선 타자들은 상대가 특유의 독심술 피칭을 해올 거라 생각하다가 오히려 엉뚱하게 쉬운 공에 당했지만. 그렇게 해서 차곡차곡 누적된 포석은 분명히 이번 타자에게까지 전해졌다.
‘문제는 타이밍……. 이래서 투 스트라이크까지 안 오려고 휘두른 건데!’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쏘아대는 최태웅의 위력구는 유명하다. 타자들로서는 마음에 안 드는 공이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초구 2구를 때릴 수밖에 없게 하는 악마의 결정구.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워낙 널리 알려져 있으니 지금 같은 순간에는 오히려 허를 찔러오려고 들지 모른다. 당연한 흐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집으면서 뒤통수 때리는 것이 최태웅 피칭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통계를 무시할 수만도 없다. 현실적으로 95% 이상이나 위력구를 던졌는데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다른 공을 던지리라는 데 어떻게 걸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상대가 타자로 하여금 ‘왜’ ‘하필’ ‘지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도록 만드는 괴물이라고 해도!
‘될대로 돼라!’
부우웅!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통계에 대한 믿음.
공이 쏘아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뻗었으나, 나머지 경우의 수라고 해서 완전히 내다버린 것도 아니었다.
스윙이 이루어지는 콤마 수초.
오랫동안 단련된 프로야구선수의 감각은 지금 날아오는 공이 바로 ‘하필’ ‘지금’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캐치해냈다.
‘버텨라, 허리!’
억지로 힘을 준 허리가 우격다짐으로 스윙 속도를 늦춘다. 벼락치기에 가깝지만 최태웅의 구질은 지겹게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해두었다.
이만큼 느린 공이라면 S급이라 찬사받는 체인지업. 투 스트라이크에 던지는 빈도는 드물지만, 한 번 낚이면 스치듯 건드린 사람조차 없는 마구였지만…….
‘이번에는 걸렸다! 여기!’
허리의 힘을 조절하면서, 뻗어나가려고 발버둥치던 방망이를 풀어놓는다.
조금은 느린 박자. 어쩌면 그 탓에 타이밍은 빗나갈지도 모르지만, 코스만큼은 완벽하게 간파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으나…….
부우웅!
“……!”
“스트라이크 아웃!”
스치지도 못할 정도로 타이밍이 어긋났다는 건가? 그렇게나 템포를 잡아당겼는데도?
허무하게 파공성을 낸 직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포수의 미트가 멈춰 있는 자리를 본 타자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예 안 떨어졌다고?’
아주 조금 높게 쏠린 중간 스트라이크. 아슬아슬한 코스도 아닌 만큼 포수의 프레이밍일 확률은 희박하다. 자신이 눈으로 포착한 위치에서 거의 직구 궤적으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생각을 길게 하면 할수록 뒤통수네. 젠장.”
결국은 허의 허를 찔린 셈이라, 울화통 터지는 심정에 혀를 차지 않을 수가 없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니까 통계에 따라서 강속구를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머릿속 한구석에 변수를 생각해둔 덕분에 다소 느린 공에도 대응했는데 체인지업조차 아니었다니.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도 똥볼을 던지는 경우는 5%도 안 되었잖아.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딱!
최태웅을 상대할 때마다 무수히 반복하던 울분이었으니, 새삼스럽다고 할 만한 건 아니다. 결국은 체념할 수밖에 없어서 한숨만 푹 쉬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텔레파시에 필적하는 치열한 심리전의 결과였든. 알 게 뭐냐고 막 던진 공에 자신이 혼자 생각이 많아서 제 발로 낚여준 것이든. 상대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통쾌함에 빠져 있어야 할 텐데…….
“저놈은 완봉해놓고 왜 표정이 저따위야?”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한 것처럼, 기록을 세우고도 심드렁한 모습이야 종종 봤지만. 저렇게 똥씹은 얼굴을 하는 건 본 적이 없기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