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87- >
087.
19승 무패.
평균자책점 0.25.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어디 야구 게임 캐릭터의 성적이 아니냐는 말부터 꺼내볼 만한 숫자다. 아니, 이건 게임에서도 웬만해서는 치트키를 써야 달성이 가능한 영역이었다.
흔히 에이스급 선발투수에게는 가을야구 징크스가 있다. 수십 경기 동안 언터처블한 활약을 보이다가도 가을에는 힘없이 허물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생긴 말이다.
정규 시즌에는 상대해야 하는 투수가 한둘이 아니므로 누군가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해도 집중하기 어려우나, 가을야구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심지어는 언제쯤 등판할지 예측마저 할 수 있으니, 타자들이 특정 선발투수에 딱 맞춘 타격감각을 준비해서 오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거기에 에이스급 선발투수라면 시즌 내내 역투해서 체력이 가장 떨어진 시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런 관점에서 바라봐도 최태웅에 대해서는 마땅히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체력적인 문제라면 우선 논외. 소화한 이닝은 리그를 통틀어 가장 많지만 결코 지금까지 혹사한 적이 없었다. 17경기를 완투하도록 투구수 100개를 넘긴 적이 두 번밖에 없다고 하면 어떤가. 그 지랄 같은 땅볼 유도로 7이닝 정도만 소화해낸다고 해도 웨일즈 입장에서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뾰족한 대응책이 없는 것이, 저 호투의 메커니즘 자체가 아직까지도 불가사의의 영역에 있었다.
아직 다승왕이 확정되기 전. 다승 1위를 보유한 라이거즈에서 최태웅의 맹렬한 다승 1위 추격을 가로막겠다고 포스트 시즌급으로 준비해서 나선 적이 있었다.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 라이거즈가 패배했지만 최태웅으로부터 데뷔 이래 최다 투구수와 최다 실점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기가 막힌 것은 그래 봤자 9이닝 2실점에 109에 불과했다는 것.
평균자책점 2점대의 투수를 초특급으로 치는 이유는 야구에서는 3점 이상 점수가 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고의 실적이라고 할만한 것도 최태웅을 공략했다고 표현할 영역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웨일즈는 최태웅 하나에 그렇게까지 집중력을 할애할 수가 없었다. 한국시리즈에 도전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상대 투수가 아직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최태웅은 버린다고요?”
“그래. 최태웅전 버리고 위닝 시리즈 가져가면 그 시점에서 게임 끝난 거니까.”
“만약에 나머지 두 게임에서 한 게임이라도 지면요? 그러면 진짜 진흙탕 돼서 팔콘즈만 좋은 일 시켜주게 될 것 같은데요?”
“그런 식으로 가정하면 끝이 없지. 최태웅이한테 임지혁이 내고 깨지면? 나머지 두 게임에서 수습할 가능성이 더 줄어든다. 아니면, 최태웅이 깨볼래?”
“…….”
간판 에이스 없이 야수들만 모아놓은 자리이기에 가능한 신랄한 표현이었다.
베테랑인 선수들에게는 다소 모욕적일 수도 있는 말이지만, 웨일즈의 캡틴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평균자책점 0.25의 투수.
이건 상대가 신인이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전의가 갈가리 찢겨나가는 숫자였던 것이다.
자포자기라면 자포자기,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전략을 들고서 웨일즈는 3연전에 돌입했다.
팬들도 이번 3연전에 양 팀의 향방이 달려 있다는 사실쯤은 당연히 알았다. 사실상의 2위 결정전답게 관중석은 경기가 시작하기 2시간도 전부터 바글거렸다.
웬만큼 잔뼈 굵은 베테랑도 만원 관중 앞에서는 언제나 미미하게 긴장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오늘 경기에는 묵직한 덤까지 얹혀 있었다.
“되겠지? 20승?”
“20승 자체는 되겠지. 만약에 오늘 깨져도 잘 쥐어짜면 한 번 더 등판할 수 있잖아.”
“그것도 결과에 따라서 다른 거 아닌가? 가을야구 올라가면 최태웅이 첫 등판 맡아줘야 할 텐데 개인 기록 챙겨주게?”
“듣고 보니까 그러네.”
“야야야, 비싼 밥 먹고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고 자빠졌어. 세상에 할 걱정이 없어서 저 똥볼 걱정을 하냐?”
“오늘 20승 찍고, 푹 쉬고 챔피언쉽 등판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그런데 꼭 올해 찍을 필요가 있나? 솔직히 시즌 처음부터 뛴 것도 아니고, 불펜에서 던졌잖아. 노디시전 네 갠가 빼면 전승인데……. 그냥 내년부터 해도 되지 않아? 다승왕 걸린 것도 아니고.”
“지랄하고 있네. 기록은 찍을 수 있을 때 찍어놔야지. 올해 씹어먹은 게 무슨 보증이냐? 말아먹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년에도 저만큼 하리라는 보장 있어?”
20승이라는 숫자는 투수에게 있어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경기 숫자가 많은 미국에서도 리그 전체를 통튼 특급 에이스의 기준이며, 한국에서는 역대급 에이스를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불리한 조건으로 시작했으니 감안해야 한다고 말하는 팬도 많지만, 프로야구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몇 승이라는 숫자 뿐.
관중들이 희열을 기대하는 것도 당연했으나, 경기 양상은 첫 단추부터 뜻밖의 형태로 끼워졌다.
-높이 뜨는 공! 타이밍은 정확해 보였는데 힘에서 밀렸나요? 타구는 생각보다 뻗지 못하고 우익수가 거의 제자리에서 잡아냅니다. 원아웃.
-강구한 감독이 갑자기 마운드로 올라오는데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카메라에는 안 잡혔지만 투수가 벤치 쪽에 살짝 눈짓을 하기는…… 어어? 바꾸나요?
웅성웅성. 관중석이나 중계진은 물론이거니와, 엘리펀츠 더그아웃까지도 소란스러워졌다.
타자 한 명을 상대했으니, 1회라도 선수를 교체하는 거야 상대 벤치의 자유다. 하지만 야구를 하루 이틀 해온 것도 아닌데, 유승혁 감독이 이 찜찜한 분위기의 정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위장 선발?”
“뭐야? 어떻게 되는 거야?”
“진짜 치졸하게 나오네…….”
“야, 죽고 잡냐!”
웨일즈는 위닝 시리즈만 가져가도 사실상 가을야구 진출이 사실상 확정이었다. 스윕을 해내면 아예 확정이 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늘 선발투수가 방어율 0.25에 19승의 몬스터였다.
그렇다면 한 경기는 아예 버리고, 아껴둔 투수력을 두 경기에 집중해서 이긴다─ 그런 전략을 들고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단지, 싸움을 피해 도망친 셈인지라 팬들의 야유를 받을 뿐이다.
“어떻게 하죠, 감독님?”
아무리 배알이 꼴려도 규정은 규정이었다. 규칙을 위반한 게 아니라면 저것도 하나의 수로 보고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성질 뻗치는데, 우리도 태웅이 내리고 내일 다시 올려볼까?”
“……진짜로요?”
“당연히 해본 소리지, 인마.”
사실, 앞뒤 안 보고 생각한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우천취소로 선발투수의 등판이 하루 밀리는 경우는 종종 있다. 경기 날짜에 맞춰서 어깨를 준비하는 만큼 약간의 컨디션 저하가 예상되지만, 반대로 하루 더 쉬어서 팔팔해지는 투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은 돌아가는 걸 좀 봐야지. 에이스 빼돌린다고 내일이랑 모레 저놈들이 무조건 이긴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1회의 투수교체는 경기의 분위기를 무척이나 차갑게 만들었다.
올 시즌 최태웅에 비할 바야 아니지만, 김지혁도 오랫동안 리그를 떠받친 에이스 중 하나였다.
방어율 3점대 투수라도 어느 날에는 완봉할 수 있고, 방어율 0점대 투수도 어느 날에는 1실점을 하는 법. 방심할 수 없는 팽팽한 경기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 꼴이 났으니…….
-빠지나요? 빠지나요? 놓쳤습니다! 주자 올 세이프!
-멉니다! 중견수가 따라가는데요! 펜스에 맞고 떨어집니다! 2루까지 여유롭죠?
-쳤습니다! 외야로 멀리 뻗어 나가는 공! 일단 희생 플라이로는 넉넉한데요!
팽팽한 줄다리기를 각오했는데 상대가 갑자기 줄을 놓아버린 격이라, 엘리펀츠 선수들은 처음에 맥이 탁 풀려서 우왕좌왕했다.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젊은 선수들이라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주춤한 것은 2회까지만이었다.
3회가 되자 선수들은 화풀이라도 하듯이 무더기로 장타를 쏟아냈다. 이닝마다 몇 점씩 쓸어담으면서 5회에 이르러서는 10대 0이라는 두자릿수 점수 차이까지 달성했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체인지!”
경기가 이제 반환점을 돈 시점인데도 관중 몇몇은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5이닝 무실점을 하도록 최태웅의 투구수는 39개. 이기는 입장에서 봐도 도통 흥이 안 났던 것이다.
-아, 다음 이닝에는 투수를 교체하려는 모양입니다. 불펜이 가동하고 있네요.
-유승혁 감독 입장에서는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단입니다. 에이스 보호 차원이죠.
-이 정도 완봉 페이스라면 선수 커리어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계속 던지게 해줄 수도 있겠는데요. 한편으로는 말이 조금 우습지만, 최태웅 선수가 오늘 특별히 잘 긁히는 날인 것도 아니거든요.
-예. 뭐 그렇다고 공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투구수를 보면 거의 매 경기가 이 정도 페이스로 진행이 됐으니까요. 팀을 위해서 약간의 커리어쯤은 양보할 수도 있다, 이런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팬들은 완봉 페이스라며 안타까워했으나 딱히 불평하지는 않았다. 엘리펀츠가 포스트 시즌에 올라가면 오늘의 조기교체가 체력적인 재산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해설자의 말처럼 최태웅의 완봉 페이스는 아쉬워할 만큼 드문 일도 아니었다.
웨일즈는 이미 기울어버린 경기에서 14대 1로 가까스로 영봉패만을 면했다.
위장 선발책을 썼다고 해서 웨일즈가 이 경기를 일부러 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버리는 선발 카드를 냈는데도 이긴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으니까.
다만, 결과적으로 대량 실점을 한 뒤로는 공격에서도 수비에서도 무리하게 따라잡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다. 그랬다가 부상을 입거나 타격 감각이 흐트러지면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웨일즈의 위장 선발은 인터넷에서 논란의 도마에 올랐다. 노골적인 기만책이었으니 비난받는 것은 당연했으나, 웨일즈 팬 다수를 포함해 옹호하는 여론도 아주 적지만은 않았다.
-자꾸 더럽다 치사하다 그러는데, 뭐가 더럽고 치사한데? 선발투수 예고는 사실 서비스 차원의 합의제도일 뿐이다. 선발로 나온 투수가 타자 한 명 상대하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게 규정인데, 규정 이용한 게 뭐가 잘못인데?
-그리고 솔직히 12개 구단 중에 위장선발 한 번도 안 써본 팀 있냐?
-투수교체나 히트 앤 런 같은 것만 작전인 줄 아나? 선발 로테이션이나 타순 짜는 것도 작전의 일부다.
-웨일즈도 나름대로 리스크 지고 한 일이다. 더러운 방법으로 이긴 것도 아니고 1패 갖다 바친 거나 다름없다. 살 주고 뼈 취하려는 작전이 뭐가 잘못된 거냐?
-솔직히 다 필요 없고, 너네가 감독이면 에이스랑 최태웅이랑 붙이고 싶겠냐 ㅜㅜ
-……그건 그럼.
-시발, 그래도 졸렬한 건 졸렬한 거지. 엘리펀츠는 상대 선발 보고 선발 내냐? 어차피 동시에 발표하는 거잖아. 누가 첫판 버린 거 가지고 뭐라고 하냐?
-맞아. 버릴 생각이면 처음부터 버리는 카드를 선발로 발표하면 되지. 오늘 선발 최태웅 아니었으면 그대로 김지혁 가려는 생각이었던 거 아냐?
-작전 같은 소리 하네. 무서워서 깨갱거리고 도망친 거지.
-근데 윗분. 타팀 팬으로서 참견하자면 솔까 무섭긴 함;; ㅜㅜ
하지만 각종 야구 커뮤니티의 후끈한 분위기는 뜻밖에 몇 시간도 채 가지 않았다.
다음 날 선발투수를 발표하는 자정.
KBO 홈페이지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17일 엘리펀츠 선발투수 : 최태웅]
야구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위장 선발로 인한 관중 분위기와 3연전 향방에 대한 기사를 적던 야구 기자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과거에야 이틀 연속 선발쯤 마냥 희귀한 일도 아니었다. 심하게는 한국 시리즈 7경기에 모두 등판해서 4승 1패를 달성한 투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투수의 역할이 분업화 되고, 어깨가 소모품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현대 야구에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최강의 에이스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야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게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혹사라는 걸 아는 것이다.
“돌아버리겠네. 이렇게 나온다 이거야?”
웨일즈 감독은 목구멍이 꽉 메이는 심정이었다.
이틀 연속 등판이라면 그만큼 구위가 떨어지리라 기대할 수도 있으나, 최태웅은 애초에 구위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 아니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틀 연속 등판시킬 작정이었나?
그렇다면 위장 선발이라는 계책은 오히려 역효과였던 셈이 된다. 대량실점으로 최태웅을 조기교체할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이 시점에서 던져진 주사위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오후 3시 무렵이 되자, 경기장은 어제만큼이나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위장 선발에 기분을 잡친 사람도 많지만, 달리 말하자면 오늘내일 두 경기에 희비가 걸린 셈이다. 최태웅의 이틀 연속 선발등판이라는 화제도 톡톡히 관중몰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거 괜찮을까? 괜히 탈나는 거 아냐?”
“유승혁 감독도 너무하네. 신인이라고 이렇게 막 굴리나?”
“굴리긴 개뿔. 옛날에는 다 이렇게 던졌어.”
“허구헌 날 이런 식이면 몰라도, 한두 경기쯤은 괜찮아.”
“그리고 최태웅이가 이닝을 많이 먹어서 그렇지, 딱히 혹사한 것도 없잖아. 투구수를 생각해야지.”
“어제도 사실 40개도 안 던지긴 했지. 그 정도면 불펜 수준인데, 하루쯤 연투 못할 건 뭐야.”
“그나저나 김지혁 쫄보 새끼 존나 꼬시네. 얍실하게 맞대결 피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잖아.”
“그게 김지혁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겠냐. 감독이 시키면 선수는 그냥 까야지.”
“어제 그 지랄하고 오늘 밟히면 개웃기겠다.”
관중석에서 벤치까지는 먼 거리도 아니다.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지만, 김지혁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일부러 독기를 쌓는 것처럼 보여서 감독의 입 안이 텁텁해질 정도였다.
“미안하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럴 바에야 평범하게 붙는 게 모양새라도 좋았을 텐데…….”
“저한테 미안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저야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타자들 상대하는데. 야수 애들이 죽어나는 거죠.”
투수가 싸우는 대상은 상대 투수가 아니라 타선이라는 정론.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감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감독인 자신이 선수에게 도리어 위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 입장에서 생각하면 오히려 찬스입니다. 어제 40개 가까이 던졌으니까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빠졌겠죠. 올 시즌에 저놈이랑 선발 맞대결한 투수 중에서는 가장 유리한 조건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뭐 그렇기도 하다만…….”
“만약에 오늘 제가 이기면 무패 다승 1위한테 유일하게 생채기 내는 게 됩니다. 저놈이 잘 크면 잘 클수록 근사한 훈장 아닙니까?”
한국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도 20승을 달성한 투수는 몇 되지 않는다. 최태웅이 터뜨린 불꽃은 설령 내년에 바로 은퇴한다고 해도 반짝 스타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것이었다.
이미 최태웅을 요령과 운이 좋은 신인으로 취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와 맞붙을 때는 ‘져도 본전이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경력으로만 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최태웅과 맞붙게 된 김지혁의 심정이 사실은 딱 그러했다.
‘솔직히 말해서 엘리펀츠는 최태웅이 원맨팀이지. 딴놈들은 분위기에 취해서 팔딱거리는 것뿐이고.’
싸늘하게 코웃음을 치면서 김지혁이 마운드로 올라왔다.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선 야수들의 시선이 홈 플레이트 근처로 집중되었다.
‘지금이 무슨 80년대도 아니고……. 원맨팀이라는 건 칭찬이 아니고 욕이야!’
경기가 시작되자, 김지혁은 페이스 배분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강속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피지컬적으로야 전성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연령이었지만 다소 이례적인 패턴이었다. 최태웅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김지혁 또한 영리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타입의 투수였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볼!”
“볼!”
“스트라이크!”
“파울!”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기껏 분석한 투수가 갑자기 스타일을 바꾸면 타자로서는 당혹스럽기 마련이다. 기본기가 탄탄한 에이스는 벼락치기한 공으로도 어느 정도 위력은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이 좀 무겁지 않아? 저번하고 좀 다른데?”
“아주 작정하고 쏘던데. 공에 대가리 찍히는 줄 알았어.”
하지만 엘리펀츠의 선발 타선도 이제 투수의 벼락치기 변신에 갈피를 못 잡을 만큼 풋풋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어딘가에 부하가 걸리기 마련이다. 김지혁 같은 완급조절형 투수가 전력투구를 한다면, 어디에 부하가 걸리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파울!”
“파울!”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파울!”
“볼!”
“아웃!”
4회까지 양 팀 무득점. 하지만 대등한 전광판 숫자에 비해 팽팽한 승부라고는 볼 수 없었다. 김지혁이 여느 때보다 페이스가 높다는 점에 착안해 엘리펀츠 타자들이 악착 같이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는 전법은 적중해서 이닝당 평균 20구를 끌어냈다. 5회 초에 이르렀을 때는 구위가 떨어진 것이 제법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지금 몇 개째지?”
“방금 게 딱 99구.”
“왠지 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괜히 죽 쒀서 개주는 거 아니야?”
“이 타이밍에 바뀌면 괜히 헷갈리는데…….”
하지만 계획대로 투구수를 늘렸어도 선수들의 속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타격보다는 투구수를 늘리는데 치중했지만, 설마 5회 초까지 한 점도 못 뽑아내리라고는 생각 못했기 때문이다.
기껏 체력을 빼놓았는데 수확 직전에 교체된다면 타자로서는 아무래도 힘이 빠지기 마련이었다.
“뭐 어때. 그래도 저기 불펜은 씹어볼 만 하잖아. 아직 4회나 남기도 했고.”
“점수 뽑는 건 걱정이 안 되는데, 태웅이 점마가 버티려나? 어제오늘 연짱으로 100개 가까이 던지고 있는 거잖아.”
“우리가 올려보냈나? 일부러 헛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 팔자지 뭐. 승리투수 되고 싶으면 지가 알아서 막으라고 해.”
보통 같으면 남이 들을까 겁날 소리를 지껄이면서 야수들이 킬킬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최태웅은 이틀 연속 선발 등판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오더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늘 경기가 가을야구 진출을 사실상 좌우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당사자가 그러니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걱정해줘봐야 오지랖밖에 안 되는 것이다.
신인의 그런 태도를 아니꼽게 볼 법도 했으나, 올해 쌓은 실적이 모든 간섭을 차단했다. 최태웅 대신 다승 2위의 투수가 엘리펀츠에 있었다면, 가을야구 경쟁은 애초에 엄두도 못 냈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따악!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
야수들의 무관심 속에서 세 타자가 고꾸라지고, 약간 뜻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더그아웃 쪽이 잠잠해서 혹시나 싶었는데 김지혁이 그대로 6회 마운드까지 올라왔던 것이다.
에이스의 고집인가? 아니면 1이닝쯤은 더 먹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떤 생각인지 몰라도, 다 잡은 고기라고 생각하는 엘리펀츠 타자들 입장에서는 반길 일이었다.
마침 타순도 2번부터 시작하는 상위 타선. 강판하기 전에 어떻게든 과실을 따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김지혁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순간이었다.
빠악!
“……!”
느닷없이 면상으로 뻗어오는 궤도에 타자가 화들짝 놀라서 나자빠졌다.
결론부터 말하건대, 요란한 엉덩방아는 타자의 호들갑이었다. 완만하게 브레이킹 걸린 공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살짝 꺾여서 들어갔던 것이다. 볼이 되기는 했지만.
타자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으나 불평을 늘어놓기에는 애매한 분위기였다. 한참이나 선배인 투수가 미안하다며 가볍게 머리를 숙여왔기 때문이다.
“볼!”
“볼!”
데드볼이 나올 뻔해서 굳은 건지, 단순히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가는 건지. 앞선 이닝까지는 봐줄 만했던 영점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벤치에서는 공 하나를 더 지켜보라는 사인이 이미 나온 참이었다. 김지혁도 딱히 사인에 이의는 없었다. 그저 1점 뽑기도 전에 내려가지만 말라고 속으로 빌면서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퍼억!
“끅!”
그때, 더그아웃에 앉아 있던 선수들 몇몇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타자가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옆구리 갈비 몇 대쯤 박살났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공이 꽂힌 것이다.
“야야야, 괜찮아?”
“설 수 있어? 정확히 어딜 맞은 거야?”
“아오 씨, 똑바로 못하냐?”
그래도 등짝이면 엉덩이 다음 정도로 데미지가 적은 부위다. 타자는 바닥에 엎어져서 끙끙댔지만 다행히 큰 무리 없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투수가 머리를 꾸벅 숙인지라 분위기가 크게 흉흉해질 건 없었다. 짬 좀 되는 사람들이 싸늘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눈치를 주는 정도였다.
아직 경기 중반이고 교체할 만한 부상도 아니지만 유승혁 감독은 대주자를 내보냈다.
팽팽한 무득점 상황. 선취점이 사기에 큰 영향을 줄 국면이므로 승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 바꾸네.”
“지혁이 형, 손에 힘 빠진 거 같지 않냐? 영점이 완전히 나갔는데 왜 속투하지?”
“불펜에 무슨 문제 생겼나? 저 형이 힘 빠졌을 때 자기 고집으로 마운드에서 억지로 버티고 그러는 성격이 아닌데.”
다음이 장타력 있는 3번 타자인지라 보내기 번트 사인이 나오지는 않았다. 투수의 제구력도 명백히 흔들리는 상태. 융통성 있게 페이크를 섞어서 자극하는 편이 출루에 유리하리라는 판단이었지만.
퍼엉!
“……!”
이번에는 웨일즈 관중석 쪽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묵직하게 체중 실린 공이 홈 플레이트 앞에 처박혔다가 튀어올랐기 때문이다.
포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해서 능숙하게 블로킹하지 않았더라면, 주자에게 2루를 날로 헌납할 만한 폭투였다.
‘이거 느낌이 괜찮은데?’
‘제발 내려가지만 마라, 내려가지만 마라.’
포수의 블로킹이 절묘했던 걸 아쉬워하며 선수들이 눈에 힘을 주었다.
다만, 이번 이닝에 뭔가 일어날 것 같다며 주먹을 움켜쥔 것은 구경꾼들뿐이었다.
따악!
“천천히! 천천히! 잡았어!”
“2루부터!”
“아웃!”
“아웃!”
방망이에 공이 닿는 순간, 좌우에서 상반된 함성과 탄식이 터졌다. 잔뜩 움츠린 스윙에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느긋하게 굴러갔던 것이다. 어쩌면 승부의 갈림길이 될지도 모르는 시점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라 선수들은 한숨을 바로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풀죽어 들어오는 타자를 질책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이닝을 말아먹어도 기회는 아직 몇 번이나 남아 있으니까. 단지 벤치로 돌아온 타자가 남몰래 어금니를 빠드득 갈면서 으르렁거렸을 뿐이다.
“꼬우면 계급장 떼고 엥겨보라는 거야 뭐야. 더럽게 들이대네.”
주자 한 명이 더 나갔지만, 다음 타자가 초구를 포수 머리 위로 걷어올리면서 그 이닝은 별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득점 지원이 무산되었음에도 느긋하게 하품하며 마운드로 오르는 최태웅의 모습 같은 건 이제 일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간에 깊은 주름을 잡은 것은 다음 공수교대가 이루어졌을 때였다.
이미 투구수가 110개를 넘어간 김지혁이 여전히 마운드를 지켰던 것이다.
“저기 무슨 일 있나?”
“무슨 일?”
“아니, 지금 하는 게 그렇잖아. 에이스 맞대결이니 뭐니 해도 급이 다른데. 힘도 다 빠져 보이는구만 뭐 하러 오기 부리고 있어?”
뭔가 찜찜했으나 다른 팀의 투수 운용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팬들이 왜 저리 혹사하느냐며 웅성거렸지만 자주 있는 일도 아니라 정색하고 언성을 높이기도 애매했다.
퍼억! 퍼억!
“볼!”
“스트라이크!”
“볼!”
“볼!”
“아웃!”
여전히 텅텅 빈 웨일즈의 불펜을 보면서 유승혁은 의아했다.
어찌어찌 수 싸움을 해내고 있지만 김지혁의 구위는 명백하게 떨어져 있었다. 득점 지원도 없는 팽팽한 투수전 속에서 100개가 훌쩍 넘는 전력투구를 하다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연달아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으나 내용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코너 워크는커녕 높낮이나 좌우 통제도 못해서 가까스로 존에 꽂아 넣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 사이에도 몸에 스칠 뻔한 위험한 투구도…….
“으악!”
“……!”
그때, 또다시 사고가 터졌다.
아무리 구위가 떨어져도 130km/h 아래로는 내려갈 리 없는 패스트볼이 타자의 오른쪽 정강이를 직격했던 것이다.
우타자 입장에서는 맞는 일이 드물어서 굳이 보호 장비도 차지 않는 부위다. 낯빛이 시꺼매져서 웅크린 선수에게 달려 나가며 유승혁 감독이 눈을 부라렸다.
‘저 새끼가 설마…….’
이번에도 김지혁이 모자를 벗고 사과했으나 유승혁 감독은 이미 심증을 굳힌 상태였다.
투구수가 많아서 미처 못 알아차렸으나 오늘 김지혁의 투구는 평소보다 훨씬 완급 조절에 치중해 있었다. 구속도 미묘하게 평균 2~3km/h 정도는 떨어진 채였다.
그 정도야 선수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 정도면 심판이 브레이크 걸어줘야 되는 거 아냐?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완전히 힘 빠진 놈 아직까지 세워놓고! 애 잡으려고 그래!”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일부러 맞춘 것도 아니고, 제구 흔들리는 거 아까부터 같이 보셨잖아요. 머리에 맞았으면 실수라도 심판 권한으로 내릴 수 있지만…….”
“융통성은 뒀다 국 끓여먹나! 눈이 있으면 봐서 알 거 아니야! 분명히 지금 맛이 갔잖아, 투수가! 누구 하나 병신 되면 책임질래?”
“……!”
한동안 고성이 오갔지만, 기세로 찍어누를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구위와 제구가 무너진 거야 눈에 뻔히 보이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는 6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호투 중이다. 그런 투수를 상대 팀에서 내리라고 한다고 쉽게 그러겠습니다, 끄덕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서도 김지혁은 마운드를 지켰다. 덕분에 타석에 들어온 타자는 포수와 사인 교환하는 투수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봐야만 했다.
아무리 구위가 떨어졌어도, 야구공은 돌덩이나 다름없어서 수십 km/h 정도로만 날아와도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 위력이 있었다. 줏대 없이 들쭉날쭉하게 꽂히는 공을 보면서 태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퍼억!
“볼!”
“……!”
가뜩이나 굳어 있는 타자의 팔꿈치 옆으로 빠른 공이 휙 지나갔다. 가만히 있어도 비켜갈 코스에 보호 장비까지 찼다지만 여러모로 간담이 서늘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때쯤 돼서는 선수들도 표정이 딱딱해져 있었다.
제구가 흔들리는 척하면서 위협구를 던지는 상황이라면 프로야구를 하면서 생소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대개는 과격한 플레이나 상대 팀의 세레모니 등,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만한 상황에서의 보복 목적이다. 지금처럼 철저하게 위협구의 공포를 호투와 연결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런 건 그냥 치킨 레이스야! 데드볼을 무한대로 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계속 가면 불리해지는 건 결국 저쪽이야!”
“야구선수는 영원히 공하고 싸우는 거다. 공이 무서우면 야구 못한다는 거 다들 알잖아?”
코치들이 나서서 기합을 새로 넣으려고 했지만, 유승혁 감독은 이미 분위기가 한풀 꺾였다는 걸 직감했다. 일시적인 공포가 아니라, 지금껏 팀의 승률을 유지해오고 있던 근본적인 사기가 흔들리는 것이다.
100km/h 이상으로 날아오는 야구공은 사실 무시무시한 흉기다. 수천 번 타석에 들었던 타자도 몸쪽으로 오는 공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감을 무시하지만은 못한다. 이제야 비로소 포텐을 터뜨리고 야구에 대한 자신감을 정착시키려는 유망주들에게는 꽤 위협적인 브레이크인 것이다.
베테랑으로 대대적인 교체를 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유승혁 감독은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쪽 공에 대한 부담감은 사실 베테랑이 더욱 강할지도 모른다. 경험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나이가 먹으면 같은 부상을 입어도 치유기간이 훨씬 길어진다는 리스크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200개씩 던지게 하지는 않을 텐데……. 그냥 믿고 밀어붙여야 하나…….’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사실 마땅한 해결책도 없었다. 몸쪽 공에 대한 공포감은 수백 년 동안 모든 타자들이 싸워온 숙적이다. 그걸 자신이 뭐라고 앉은 자리에서 뚝딱 해치우겠는가.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예? 무슨 말씀이세요?”
“지랄하지 말고. 지금 이건 맞받아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분위기만 꼬인다. 알아들어?”
“…….”
그래도 나름대로 시즌 동안 겪었더니, 최태웅의 시큰둥한 표정 속에서 뚱한 심정이 읽어지는 유승혁 감독이었다.
말로만 저래놓고 마운드에서 사고를 칠지 모르지만, 그것까지는 감독의 손을 떠난 문제다. 경기에서 이만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선발투수에게 이 이상 윽박지를 수도 없는 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최태웅이 돌발행동을 선보이는 일은 없었다. 여느 때처럼 파렴치하게까지 느껴지는 유유한 투구로 타자 세 명을 짓밟고 벤치로 돌아왔을 뿐이다.
“더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웨일즈의 더그아웃에서는 은근한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