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85- >
085.
경기 후반에 동점이라지만, 생각해보면 무사 1루쯤은 투수에게 너무나 흔해 빠진 상황이었다. 그리 처절한 위기라고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퍼억! 퍼억!
“스트라이크!”
“세이프!”
“아웃!”
“아웃!”
“볼!”
마지막 타자를 잡아내는 순간, 관중석에서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후속 타자의 땅볼이 보내기 번트 효과를 냈으나 스코어링 포지션이 뭐 어떠냐고 말하듯 나머지를 깔끔하게 제압한 것이다.
‘저 와중에도 끝끝내 똥볼이네. 미친 새끼…….’
돌부처 같은 냉정함인지, 실력에 대한 자신감인지. 최태웅은 새삼스럽게 강속구를 뿌리려고 들지도 않았다. 무사 1루나 불안한 수비 따위는 자기 피칭 스타일을 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저기, 음, 태웅아. 아까는 그…… 미안했다.”
공수교대를 하는 사이. 최태웅에게 다가간 손철민이 약간 쭈뼛거리며 말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싶어서 잠시 기가 막혔을 뿐. 불안한 수비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마운드를 지킨 것은 자신에게도 고마운 일이다. 용서받고 자시고 할 일은 아니지만, 마음의 짐을 좀 덜어두고 싶어서 건넨 사과였다.
그래도 자기가 선배인데. 속내가 어떻건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예? 뭐가요?”
“아니, 아까 괜히 별 것도 아닌 거 빠트릴 뻔해서…….”
처음에는 단순히 모른 체 하는 줄 알았다가 말문이 턱 막혔다. 이온음료를 마시다가 돌아보는 최태웅의 눈빛이 정말로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혹시 실책 하셨었어요? 저는 못 봤는데…… 에이, 뭐 어때요. 잘 막았으면 됐지. 신경 쓰지 마세요.”
“…….”
해맑기까지 한 목소리로 툭 내뱉고서, 최태웅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덩그러니 남겨진 손철민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얼떨떨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건 멘탈 차원의 문제가 아닌데…… 뭐야, 저놈은?’
미묘하게 깨질 듯 말 듯한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경기는 마침내 0대 0인 채로 연장전에까지 돌입했다.
10회 초가 되자 관중석이 술렁였다. 이번에도 과연 최태웅이 올라올까, 하는 설레임과 불안감 때문이었다.
투구수로만 따지자면 9회까지 정확하게 80개. 모든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퍼펙트 잡아냈다고 가정했을 때보다도 적은 갯수였다. 지금까지의 소화능력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더 던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투수의 컨디션은 단순히 투구수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하이에나즈의 타자들은 모두 세 타석 이상 최태웅의 공을 보았다. 완급만 바꿔서 던지는 단조로운 100~120km/h대의 공을 프로 타자들이 네 바퀴째에도 못 쳐낸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데뷔 첫 선발 등판이라는 점도 있다. 9회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는데 타자들이 1점도 못 내서 승리투수가 못 되었다는 스트레스도 작지는 않을 터.
한편으로는 투구수에 여유가 있으니 계속 던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정규 이닝을 0점으로 지켜낸 투수가 연장전까지 철저하게 책임지는 모습은 야구의 혹독한 로망 중 하나다. 후반으로 갈수록 투수가 불리할 뿐이지만, 왠지 최태웅은 보통과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진짜 괜찮겠냐? 객기 부리는 거 아니고?”
“당연히 괜찮죠. 공도 80개밖에 안 던졌는데, 구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내려가기에는 아깝잖아요.”
“너 말고 던질 사람 없는 것도 아니야. 무리할 필요 없어. 이건 너 하나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팀 걱정이기도 해. 연장까지 굴리다가 지면 팀 사기 아작난다.”
“그건 지금 투수교체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요.”
최태웅은 정곡을 찔렀다.
“지면 사기 박살나는 건 어차피 다 똑같잖아요. 그러면 실속이라도 챙겨야죠. 저쪽은 지금까지만 해도 투수 세 명 썼으니까. 저 혼자 퉁치면 이득이죠.”
“실속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그리고 만약에 진다고 해도, 9회까지 틀어막고 연장전에서 지는 건데. 설마 저 까는 사람 있겠어요?”
“새끼가,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여러모로 아니꼬왔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교체한 투수가 결승점을 빼앗긴다면, 야수뿐 아니라 듬직한 마무리까지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릴지 몰랐다.
-아아, 투구수에 여유가 있어서 가능성이 적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정규이닝을 무실점으로 지킨 최태웅 선수가 10회 초의 마운드에도 올라옵니다!
-유승혁 감독과 제법 오래 이야기를 한 걸로 봐서 이건 최태웅 선수의 의지라고 봐야겠죠. 자신감이면서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투구수는 오히려 여유로운 편이니까, 자기가 시작한 경기는 자기가 끝내보겠다,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한편으로 그건 신인인 최태웅 선수가 벤치에서 벌써 그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겠죠. 보통 신인에게 저렇게 길게 의견을 묻지 않거든요. 웬만큼 인정받고 있어도 ‘더 던질래 말래?’ 하고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정도죠.
-하이에나즈 선수들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 않을까 싶네요. 상위타선이 네 번째 타석에 들어가는 거니까요. 최태웅 선수를 공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닝이 되는 셈입니다.
-예. 너무 노골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면 그 부담감에 오히려 발목을 잡히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말이 유리한 거지, 최태웅 선수의 투구수는 아직 여유롭습니다. 더욱이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데도 오늘 투구는 전반적으로 슬로우볼 위주였거든요. 투구수 이상의 체력을 비축해두고 있다는 말이죠. 결코 만만한 투수가 아닙니다.
익숙함으로 인해서 흐름을 타거나. 이런 상황에서도 못 치면 망신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부담감으로 위축되거나. 양날의 검 같은 줄타기에서 기선을 잡은 것은 최태웅 쪽이었다.
초구부터 시속 100km짜리를 대뜸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꽂아넣었던 것이다.
“나왔다, 똥배짱!”
“이 새끼가! 한복판 신경 쓰라니까!”
제구를 인정받은 투수의 한복판 투구는 심리적으로 효과적인 도박수다. 어쩌다가 실투한 건지도 모른다는 안이한 기대감을 도저히 버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랬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도 신경을 거스르기는 마찬가지다.
따악!
“세이프!”
마무리는 지금까지 던진 공 중에서 가장 느린 게 아닐까 싶은 50km/h의 슬로우볼. 3유 간의 빠른 땅볼이 그대로 내야를 빠져나갔다. 실책이라기보다는 시프트 미스. 웬만하면 잡을 수 있었지만, 안타가 되어도 썩 이상하지는 않은 타구였다.
“또라이 새끼…… 진짜로 안중에도 없는 거였네.”
글러브로 입가를 가리기 전. 미묘하게 히죽거리는 표정을 목격한 손철민은 느닷없이 맥이 다 빠졌다. 수비를 걱정했다면 저런 공은 죽었다 깨어나도 던질 수 없다. 저렇게밖에 못 던지는 것도 아니고, 탈삼진 능력을 가진 투수인 만큼 더더욱 그렇다. 변명 같지만 최태웅의 피칭 스타일은 내야수에게 부담이 될 때도 많다. 어찌어찌 막아내고야 있지만 위협적인 타구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저 자식, 결과에는 관심 자체가 없는 거 아니야?’
손철민으로서는 그런 식으로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아웃을 잡아내는 편이 좋지만, 아니면 아닌 대로 괜찮다. 조금 더 흥미진진한 상황에서 던지게 되었을 뿐. 결과적으로 주자가 베이스를 밟아도, 잡아낼 수 있을 법한 타구였다면 “‘나는’ 이겼다” 라며 정신승리를 하는 것 같았다.
“저런 새끼한테 내가 미안하다 소리를 했으니…….”
후속 타자들은 모조리 150km/h짜리 결정구에 걸려 나자빠졌다. 100km/h 남짓한 똥볼만 수십 개씩 보다가 투 스트라이크에 불쑥 저만한 강속구가 들어오는 것이다. 미리 말해줬어도 과연 속도감각을 전환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치가 떨리는 오프 스피드였다.
“어?”
“미친 거 아냐? 저 새끼 계속 나와?”
“바꿀 만한 놈이 없지 않나? 연장 갈지도 모르는 거 생각하면?”
“쌍놈아! 또 말아먹을 거 같으면 연봉 뱉어!”
손철민이 또다시 타석에 올라가자 폭우 같은 아우성이 쏟아졌다. 5타석 무안타. 이 정도 말아먹는 거야 있을 법한 일이지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중요한 것은 임팩트였다. 화제의 신인이 선발 데뷔에서 이미 10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경기. 수비에서 저지른 실수까지 생각하면 거기에다 완전히 폭탄 테러를 한 셈이니, 누군가 흥분해서 물병 하나쯤 던진대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라고 씨. 내가 알 게 뭐야 저딴 변태 새끼.”
“시발. 내가 알 게 뭐야. 저딴 새끼.”
손철민은 아무에게도 안 들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구시렁거렸다.
팀이야 잘나가든 말든, 자기 성적만 관리하면 그만이라는 독고다이 마인드야 드물지도 않다. 약한 타선 때문에 승수보다 평균자책점을 신경 쓰는 에이스는 비난보다도 위로의 대상일 정도다. 그래도 웬만큼 인성이 썩지 않고서야 공공연하게 그리 떠벌리고 다니는 놈은 없다. 하물며 내세울 짬도 없는 까마득한 신인인 다음에야. 배려했다기보다는 눈치를 본 거지만……
내가 여태 저런 놈을 신경 써서 쭈뼛거렸다니.
이거 어이가 없어서 원.
따악!
“어? 어어어!”
신경질적으로 뻗어나간 손철민의 방망이가 뚝 떨어지는 커브를 귀신 같이 포착해서 후려쳤다. 뜨악한 표정의 투수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포수마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마스크를 팽개쳤다.
“파울!”
“아아아아!”
뜬금없이 여러 사람을 철렁하게 만든 타구는 미묘한 곡선을 그리며 폴대 옆으로 빗겨 나갔다. 가슴을 쓸어내린 포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손철민을 곁눈질했다.
‘찍어서 쳤나? 타이밍이 제대로였는데.’
그가 보기에 손철민은 중요한 순간에 결과를 내지 못해 초조해 하는 신인의 전형이었다. 못 치는 공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입지가 애매하다 보니 과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험공부가 안 되면 머리를 식혀야 하는데, 당장 내일이 시험이다 보니 책상을 떠나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해야 할까.
그 벽을 못 넘어서 가라앉는 유망주도 많고, 어떤 심경의 변화 하나로 느닷없이 각성하는 선수도 많다.
결국 적응의 문제이기도 해서 경험과 자신감이 생기면 해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나, 한동안은 날로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부웅!
“스트라이크!”
2구째.
얼굴에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파워 스윙에 포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에 스치지도 않는 맹탕 스윙이었으나 기세가 어지간했는지 투수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홈런 아니면 삼진을 당하겠다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타격.
그야 뭐 이만큼 못 쳤으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시도해볼 법도 하고, 실제로 이런 스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훨씬 드물지만……
‘뭔가 느낌이 다른데. 찜찜해.’
괜히 입 안이 텁텁했지만, 자포자기하고 하나만 노리는 놈에게 시도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
확률적으로는 항상 투수가 타자보다 유리하니까, 타자가 노린 공이 지금 던진 공이 아니기를 바랄 뿐……
따악!
“우와아아아아!”
“……!”
나쁜 예감은 왜 이리도 빗나가는 법이 없나.
왠지 신경질적인 느낌마저 나는 스윙에 148km/h의 직구가 정통으로 얻어터졌다. 2루수의 머리 위를 휙 지나간 라인 드라이브성 타구가 펜스까지 빠르게 굴러갔다.
“뛰어, 뛰어!”
“그렇지! 드디어 밥값하는구나!”
“1점만 내자! 1점…… 어어어?”
“이런 미친!”
공을 쫓거나 빈자리를 메우느라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외야수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2루 베이스를 여유 있게 밟은 손철민이 느닷없이 3루까지 질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3루! 3루!”
“……!”
주루코치의 스톱 사인마저도 무시한 폭주.
원 바운드로 펜스에 부딪칠 만큼 빠른 타구였던지라 3루는 안중에도 없었던 중견수가 황급히 공을 뿌렸다. 어차피 3루까지는 갈 수도 없는 타이밍이기에, 그러니까 당연히 주자도 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반응이 늦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반 박자의 딜레이. 중견수의 송구가 충분한 타이밍에 3루로 날았으나…….
“어? 어어어!”
여유가 있어도 마음이 조급했는지, 송구는 3루수의 머리를 훌쩍 넘기며 날아왔다.
가만히 서서는 못 받는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판단한 3루수가 과감하게 풀쩍 뛰었다.
퍼억!
“……!”
묵직하게 출렁이는 글러브 포켓의 감촉.
기막힌 캐치에 흥분할 겨를도 없이 3루수가 글러브 낀 손을 휘둘렀다. 어느덧 코앞까지 육박해온 손철민이 베이스로 몸을 날려왔던 것이다.
“……세이프!”
“우와아아아아!”
“이야아!”
쩌렁쩌렁한 함성이 그라운드를 휘감았다.
무사 3루.
무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주루가 느닷없이 상대 목젖에 칼날을 들이미는 일격으로 변한 것이다.
“심판!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눈깔을 확 뽑아버릴라!”
성격 급한 관중 몇몇이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으르렁댔다. 육안으로는 단정하기 어려운 간발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하이에나즈 감독이 판정에 항의하고자 더그아웃을 나왔고, 유승혁 감독도 뒤따라 걸어 나왔다.
“너는 저 판정에 모가지 달렸다. 도대체 뭘 믿고 뛴 거냐?”
심판진의 카메라 판독을 기다리는 사이. 하이에나즈의 3루수가 다소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게 아웃으로 판정되면 폭주로 최후의 찬스를 말아먹은 희대의 역적이 된다. 아무리 선수 사정이 어려운 엘리펀츠라도 입지가 불안해질 만한 사고다.
반대로 이게 세이프라서 결승점의 발판이 된다면 앞선 실수까지 모조리 씹어 먹을 수 있겠지만…….
“죽으면 죽는 거죠. 어차피 안타는 됐으니까요.”
“……뭐?”
“3루에서 죽어도 2루타까지는 확정이니까 들이대 본 거라고요.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니고.”
얘가 언제부터 이런 성격이었나, 싶을 정도로 뻔뻔한 말투에 3루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얌마, 죽으면 당연히 피해지. 너네 신인 저만큼 던졌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불쌍이요?”
손철민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돼지가 달걀을 낳았다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승리투수 하고 싶으면 지가 알아서 더 던지겠죠. 내 앞가림하기도 바쁩니다.”
그때, 카메라 판독에 들어갔던 주심이 팔을 번쩍 들면서 돌아왔다.
합의 판정은 세이프.
10회 말의 0대 0.
이 살얼음 같은 상황에 무사 3루라는 최고의 밥상이 차려지는 순간이었다.
***
-엘리펀츠 10회의 사투 끝에 0대 1 극적인 승리.
-최태웅, 선발 데뷔전 완봉승!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7번째 쾌거!
-슬며시 다시 떠오르는 대기록의 공포. 최태웅, 무실점 기록은 언제까지?
-10이닝 완봉승. 현대야구에서 그것은 왜 더 위대한 업적인가?
고작 일주일의 준비 기간. 단조로운 구종. 일천하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경험.
그래도 여차하면 어련히 알아서 강속구를 꺼내 들겠느냐는 생각에 큰 걱정도 없었다. 상당한 호투를 보일 수 있다고도 여겼으나, 달리 말하면 또 이만한 대형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모르는 거다. 필승카드로 취급하기에는 아직 등판 샘플이 모자라. 무슨 말인지 알지?”
“저놈이 로테이션 한 자리 떡 틀어막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오다가다 주운 공돈이지, 매주 들어오는 주급으로 여기면 안 돼. 쪽팔리지도 않냐?”
“날로 먹은 1승은 기억에서 바로 지워라. 우리는 아직도 꼴찌가 사정거리에 있는 팀이야.”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을 주는 에이스.
그런 존재가 팀에 가져다주는 안정감은 엄청난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유승혁조차도 기대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감독의 입장 상 그럴 수가 없었다.
초특급 신인의 활약을 처음부터 계산에 넣어서는 팀을 꾸릴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기급 선수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엘리펀츠에 그만큼 근성이 썩은 선수는 없었다.
베테랑 투수들은 자기들이 소화할 이닝이 줄어드는 것을 순수하게 기뻐했다. 내야수들이 ‘어려운 타구가 많이 온다’라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농담으로 투덜거리는 수준. 타자로서는 잘 던지는 투수의 존재를 꺼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계산에 없었다고 해도, 최태웅이라는 이닝 이터가 로테이션 한 축을 든든하게 채우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안정감은 시너지를 가져왔고, 여기에서 뜻밖에 날카로운 송곳 몇 개가 주머니를 뚫고 나왔다. 기복이 줄어들길 바라며 꿋꿋하게 출장시키던 손철민의 스타일이 돌변한 것이다.
대다수의 유격수와 마찬가지로, 그도 수비에 중점을 둔 선수였다. 나중에 타격이 좋아진다고 해도 기대하는 역할은 테이블 세터인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체격도 평균을 가까스로 채우는 녀석이 삼진 아니면 장타라는 식으로 깡스윙을 해대니.
보통 같으면 황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수가 있다며 제동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따악!
“어? 어어!”
“넘어간다! 넘어간다!”
“……!”
경기장에 퍼지는 함성을 들으면서 유승혁 감독은 눈만 끔뻑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독답게 무게를 잡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약간 어안이 벙벙해서였다.
“이러면 이거 4경기 연속 홈런 아닌가?”
“그러게요.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야구 이론에는 아직도 미지인 부분이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들 하는데,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뻥뻥 장타 날리는 선수의 스타일을 지적하기도 어려웠다.
얼마 전 같으면 그래도 멀리까지 내다봐서 스타일의 유지를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모험을 해볼 여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송곳이 더 있었다.
-아, 정말 엘리펀츠 팬들에게 올해는 순위를 떠나서 잊지 못할 시즌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어요.
-전반기를 꼴찌로 마무리한 팀이 1위로 마감한 적도 야구 역사에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올해 엘리펀츠 순위는 극단적이죠. 특히나 최근 한 달 동안은 이틀 이상 순위가 고정된 적이 없거든요.
-마땅한 대체카드도 없는 상황에서 주축 선수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완전히 비상이 났었죠. 모두가 걱정한 대로 한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가 싶더니, 뻥 뚫린 자리들이 어어어? 하는 사이에 꾸역꾸역 메워지기 시작했거든요.
-베테랑이 이탈한 자리를 유망주들이 차지하는 것. 유승혁 감독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입니다. 리빌딩과 순위 싸움을 동시에 해내는 팀의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요새 활약하는 손철민 선수나 이규태 선수나, 잠재력은 진작 인정받고 있었거든요. 다만, 모든 유망주가 그렇듯이 적응이 문제죠. 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어떻게든 활약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으면 공을 차분하게 볼 수 없게 되거든요.
-오늘 선발로 등판하는 서기찬 선수도 분명히 기대되는 약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계약금 5억 원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프로의 세계로 발을 들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했던 비운의 유망주죠.
-하지만 이번에 최태웅 선수의 활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자극을 받았던 걸까요? 최근에 수 싸움을 가미하면서 경기 초반에 깜짝 호투하는 경우가 생겼는데요. 이닝이 길어질수록 힘을 잃는 경향은 있지만, 과연 이것이 새로운 잠재력 폭발의 전조인지 기대해보시는 것도 한 재미가 될 것 같습니다.
마운드를 꾹꾹 밟는 서기찬의 모습에 라이거즈의 타자들은 신경을 바짝 조였다.
고교 시절에 깽판급의 구위를 보이다가 프로에서 가로막힌 유망주. 흔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프로 타자의 입장에서도 이런 유망주를 상대하는 것이 편한 일은 아니었다.
최강의 마구는 강속구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볼 배합이 뻔해도, 일정 부분은 새파란 놈과 피지컬 싸움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요새는 볼 배합도 변했다고……. 투수가 아니라 포수 영향인가?’
분석팀에서 전해준 자료를 보면 백업 포수가 선발로 나오는 일도 종종 생겼다. 체력 관리 차원에서 포수를 번갈아 서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 경우는 평소에 호흡을 많이 맞춰봤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우웅!
-스윙 삼진! 이걸로 오늘 탈삼진 3개째! 마지막 타자를 공 3개로 정리합니다!
-아아, 요새 뭔가 피칭에 대해서 감을 잡은 느낌이 있었지만 이건 정말 생각 이상의 호투인데요. 이번 이닝도 굉장히 효율적인 투구수였죠? 짠물 투구수로 유명한 최태웅 선수한테 뭔가 전수받기라도 한 걸까요?
-제가 보기에는 투구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붙어 보입니다. 사실 서기찬 선수는 완전한 정통파도, 완전한 기교파도 아니거든요. 중도를 유지해야 하는데 데뷔전에서 난타당한 여파가 굉장히 오래갔던 거죠. 자신감이 없으니까 이걸 해보고, 그게 얻어맞으니까 저걸 해보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기는 감각을 잃어버리기도 했고요.
-뭘 던져야 할지 모르겠으면 아예 한복판에 가장 빠른 공을 던져봐라, 그런 소리도 있죠. 그만큼 선수의 정신력이 플레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날, 라이거즈는 서기찬의 호투에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다.
5회까지는 아예 퍼펙트. 6회 투아웃에 불규칙 바운드성 타구로 내야안타를 건져낸 것이 유일한 출루였다.
“저번에 간 봤을 때랑 너무 다른데?”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휙휙 바뀌냐?”
차라리 아무런 데이터도 없는 신인 투수였다면 좀 나았으리라. 이미 대강 견적을 내고 있던 투수가 뜻밖의 호투를 하자, 라이거즈는 흐름이 꼬여서 끙끙거렸다. 그나마 승부가 성립되는 것은 라이거즈 선발투수의 공이 모처럼 긁힌 덕분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해서 7회까지 10피안타 2볼넷. 팽팽한 균형은커녕 가까스로 산소호흡기만 붙여두고 있는 상태에 불과했다.
8회에 투수가 교체되자, 그나마 가늘게 유지하고 있던 균형마저 무너졌다.
-스트레이트 볼넷! 수없이 주자를 내보내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2루를 사수하던 라이거즈! 마침내 주자에게 3루 베이스를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2사 만루에 하위타선이지만 최근 일주일 동안 불방망이를 자랑하던 이규태 선수입니다. 다만 오늘은 세 타석 동안 안타가 없는데요. 반대로 말하자면 슬슬 하나쯤 쳐줄 때가 됐다는 거기도 하거든요.
-잠재력을 터뜨리기 시작한 유망주 입장에서는 이런 찬스 하나하나가 고비입니다. 여기서 한 방을 때려야 자신감을 일시적인 폭발이 아니라 명백한 실력으로 만드는 거거든요.
베테랑 선배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과 동기급 선수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은 다르다. 동기급 선수라면 학생 시절에 고만고만하게 겨루던 라이벌. 자신은 제자리걸음인데 라이벌만 각성해서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박탈감은 상당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전염된 것처럼 실력이 강제로 끌어올려지는 타입도 있었다.
찬스를 앞에 둔 이규태의 표정에도 그저 잔잔한 전의가 흐를 뿐이었다.
반드시 때려야 한다는 압박감도, 이 찬스를 어떻게든 떠먹겠다는 투지도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배팅머신의 공을 상대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를 뿐이었다.
따악!
“파울!”
투 아웃에 투 스트라이크.
일방적인 카운트에서 초조감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라이거즈의 포수 쪽이었다.
카운트나 경기 흐름과는 별개의 불안감. 얼마든지 데리고 놀 수 있는 유망주라고 생각했건만. 좀처럼 노림수에 넘어오는 기색을 안 보였던 것이다.
‘원래 배드볼에 방망이 잘 내는 녀석이었는데 요새 잘 참는단 말이야. 그래도 카운트에 여유도 있으니까 좀 빼볼까. 버릇이 그렇게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사인은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몰린 상황에서라면 무심코 옛날 버릇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메랑처럼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는 변화구에 이규태의 어깨가 움찔했다. 포수는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방망이를 보면서 내심 쾌재했으나…….
따악!
-쳤습니다! 1루 라인 방향! 안이냐 바깥이냐!
묵직한 타격음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리 잘해도 엉덩이가 빠진 채로 톡 건드리는 게 고작일 최상급 무브먼트. 그런 궤적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이규태가 스텝까지 해가며 넉넉하게 팔을 뻗어 휘두른 것이다.
“이야아아아!”
“페어! 페어!”
“……!”
라인 아슬아슬한 타구에 전율하는 관중들과 달리. 주자들은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조차 없었다.
투아웃에 만루. 방망이에 공이 닿는 순간부터 전력질주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세이프!”
“세이프!”
“와아아아!”
번개처럼 달려온 우익수가 빨랫줄 송구를 했으나 싹쓸이를 면하는 게 고작이었다.
2대 0.
까짓 거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놓고도 뒤집힐 수 있는 점수 차이였으나, 느닷없이 각성한 서기찬의 마운드는 높았다.
9회까지 산발 3안타.
기어이 데뷔 첫 완봉승을 달성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