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84화 (84/90)

그림으로 그린 듯한 6-4-3 병살타. 너무나도 깔끔한 수비에 손철민은 1루로 달려갈 의욕조차 잃을 뻔했다.

경기장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해진 것도 잠시였다. 한 박자 뒤에, 울분마저 느껴지는 험악한 욕지거리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 새끼야! 똑바로 못 하냐!”

“돈 받아 처먹었냐? 스파이야? 엉!”

손철민은 폭포수 같은 욕설에 주눅이 들기보다도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중력이 사라져서 위아래도 안 되는 기분이었다.

“…….”

그러던 손철민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마운드에 오르는 최태웅의 얼굴을 보았을 때였다.

심드렁하고 무표정한 얼굴.

흔히 말하는 강철 멘탈이나 여유 같은 것과는 또 달랐다. 그건 야수들의 실수 따위 안중에도 없다고 말하는 듯이 완벽한 무관심이었다.

따악! 따악! 퍼억!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무심한 분위기는 단순한 시늉이 아니었다. 최태웅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후속 이닝을 든든하게 틀어막았다.

단타 하나가 나오기야 했으나, 이쯤은 확률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굳이 말하자면 두 자릿수 이상의 이닝을 노히트로 막았던 지금까지가 이상한 것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김진호 선수. 이걸로 탈삼진 4개째. 1사 3루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무실점을 이어나갑니다. 5회까지 양팀 무득점. 팽팽한 투수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마운드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좀 다르죠?

-예. 투구수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지만 김진호 선수가 89개. 최태웅 선수가 50개. 최태웅 선수는 불펜에서 선발로 전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타일을 조금도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관중들이 기대한 그대로의 모습이죠.

-그에 비하면 김진호 선수는 위기가 벌써 두 차례 있었죠. 연이은 볼넷으로 자초한 위기였다 보니까 페이스를 많이 잃었단 말이에요. 팔꿈치가 내려가는 걸 보면 아마도 다음 이닝 정도가 한계라고 보는데요…….

타선이 두 바퀴나 돌아버린 7회.

드디어 하이에나즈의 타자들은 초조감에 휩싸였다.

구위보다 기교로 호투하는 투수에게 꽁꽁 묶이는 부담감은 무겁다. 뚜렷한 무기가 없다 보니, 정통파 투수와는 달리 공략하기 위해 쳐다볼 방향조차도 잡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김진호가 버텨줘서 다행이기는 한데…….’

하이에나즈의 캡틴이 착잡하게 입맛을 다셨다.

6회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했던 김진호는 놀랍게도 7회까지 119구를 던졌다. 점수는 변함없이 0대 0. 근성이라고밖에 표현 못 할 호투였다.

7이닝 무실점.

어지간한 경기라면 당연히 승리투수가 되는 성적이다. 선발투수가 잘 던졌는데도 못 이기는 경우야 흔하지만, 종종 있는 일이라고 해서 투수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계속 던지는 것처럼 위장할 상황도 아닌지라 김진호는 일찌감치 아이싱을 했다. 8회에도 삼자범퇴로 물러난 타자들은 머쓱해서 벤치에 앉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김진호는 평소의 성깔치고 썩 불만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돼서 조바심 나는 타자들과 달리, 투수는 순수하게 기록을 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악!

“그렇지! 뛰어! 뛰어!”

“세이프!”

서로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에, 불규칙 바운드를 틈타 선두타자 이규태가 1루로 슬라이딩을 했다.

야수에게 패스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깔끔한 2루 땅볼. 눈치가 쏟아지는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전력질주를 할 의욕도 안 보이는 코스였다.

흙먼지 속에서 일어난 이규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갓난아기라도 떨어뜨릴 뻔한 줄 알 정도로 커다란 안도의 한숨이었다.

‘재수 없게 투수 바꾸자마자……. 아니, 초조하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야. 조건은 똑같아.’

하이에나즈 포수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0대 0이라는 것은 상대 투수도 호투했다는 의미다. 심지어 저쪽은 노히트에 가까운 완봉 페이스가 아닌가.

그런 상황에, 만루 찬스까지 간 적이 있는데 여태껏 점수를 못 냈다? 호투한 투수가 신인인 만큼 야수들의 부담감은 훨씬 클 것이다.

장수를 노리려거든 말을 쏴라.

수비는 투수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었다.

퍼억! 퍼억! 퍼억!

“세이프!”

“세이프!”

“세이프!”

“……으음?”

엘리펀츠 선수들이 미간을 찌푸린 것은 다섯 번째 견제구가 1루로 날아들었을 때였다.

관중석에서는 두 번째 견제구부터 ‘우우, 앞으로 던져라!’ 하고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웬만하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투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꿋꿋하게 1루로만 공을 뿌렸다.

퍼억!

“세이프!”

거슬리는 것은 견제 자체가 아니었다. 주자인 이규태가 리드를 거의 포기한 뒤에도 견제가 계속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 새끼들이 진짜…….”

야수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투수가 견제를 남발하면 오히려 수비를 방해하는 꼴이 된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하는 견제에는 주자와 타자의 스트레스도 만만찮아지기 마련이다.

이제 슬슬 심판이 고의적인 지연이라고 판단해서 주의를 시킬 때도 되었지 싶을 때였다.

따악!

“……!”

끈질긴 견제구에 조바심이 났던 손철민이 정면으로 날아오는 초구를 무심코 건드리고 말았다.

문제는 타구의 코스. 빠른 타구가 라인을 살짝 스치며 다이빙한 3루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곡예 같은 동작으로 바닥을 구른 3루수가 어깨 힘만으로 공을 뿌린다.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2루수가 베이스를 찍고…….

“아웃!”

“아웃!”

“……!”

엘리펀츠와 하이에나즈의 관중석에서 제각기 폭탄이 터지는 듯한 함성과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경기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도 몰랐던 동점 8회 말의 무사 1루에 찬물을 끼얹는 병살타.

손철민의 얼굴이 하얘진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주자였던 이규태의 표정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치졸한 새끼들……!”

타구가 빨랐지만, 이만큼 깊은 코스라면 둘 중 하나는 세이프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2루에서의 아웃 판정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안 됐다.

딱히 날카로운 견제구도 아니었건만. 입지가 좁다 보니 만일의 대형사고 위험성을 도무지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드를 조금 줄였을 뿐인데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한 결과로 이어지다니.

손철민으로서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띵해질 수밖에…….

“정신 차려, 새꺄!”

완전히 얼이 빠진 손철민을 향해서 투수코치가 일갈했다.

“저 새끼들이 무슨 하느님인 줄 알아? 지금 상황에 기다렸다는 듯이 땅볼 뽑게?”

“그게…….”

“장사 하루 이틀 해? 어쩌다가 아다리 맞은 거야, 어쩌다가! 의미 같은 거 없어! 별 생각 없이 아무 데나 찔러봤는데 훅 들어간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

사소한 변덕으로 시프트를 조금 당겨봤는데 허구한 날 단타만 치던 놈이 딱 그때만 기막히게 외야 플라이를 때린다거나. 매주 같은 번호로 사던 복권을 딱 한 주 걸렀는데, 하필이면 딱 그 주에 당첨됐다거나.

리드를 좁혔으니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는 것은 맞다만, 그러자고 10개 넘는 견제구를 던졌다면 야수의 집중력 훼손이 더욱 클 수도 있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왔느냐 뒷면이 나왔느냐 하는 수준의, 사소하고 변덕적인 우연.

손철민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지만…….

‘왜’, ‘하필’, ‘딱’, ‘마침’, ‘그때’라는 이름의 망령을 떨쳐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망령은 다음 수비에서 곧바로 마성을 드러냈다.

미묘한 스피드로 굴러간 타구가 손철민의 글러브 안에서 크게 저글한 것이다.

‘나이스! 걸렸다!’

1루 베이스를 한 발짝 앞에 둔 순간. 타자는 갑자기 폭주하여 2루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못 잡을 주자라서 송구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던 손철민이 화들짝 놀랐다.

황급히 글러브에서 손을 뺐으나, 주자는 단순히 신경을 한 번 긁어본 것뿐이었다.

1루로 곧장 돌아가는 모습에 허탈해졌다가─ 뒤늦게 가슴이 철렁했다. 허겁지겁 빼낸 공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저만치 데굴데굴 굴러갔던 것이다.

“……!”

예상치 못한 사태에 페이크를 걸었던 타자조차 움찔했다.

하지만 펌블은 길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3루수가 바로 공을 주워서 대처한 덕분이었다.

“야이 썅! 정신줄 놨냐!”

“똑바로 못해? 미쳤냐!”

“…….”

다행스럽게도 별 탈이 없었지만 손철민의 머릿속이 재차 하얘질 수밖에 없었다.

앞선 플레이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선수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다만, 흐트러진 집중력이 당연하다는 듯이 실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멘탈이 깨진 선수한테 일부러 공을 보낼 수 있다면, 그냥 평범하게 안타를 칠 게 아닌가.

요컨대 이건 ‘운’마저 따라주지 않아서 빚어진 참사였다. 손철민으로서는 암담함에 울화통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오케이, 천천히 갑시다. 무사 1루. 번트 조심.”

“…….”

그때, 마운드를 발로 꾹꾹 누르던 최태웅과 손철민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는 건 착각일지 몰랐다. 나른한 듯이 살짝 하품이나 하는 얼굴을 순간적으로 스쳐봤을 뿐이니까.

‘저놈은 이 판국에 하품이 나오나…….’

새 공을 받은 최태웅은 태연한 기색으로 투수판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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