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82- >
082.
“스트라이크 아웃!”
홈 플레이트에 처박히리만큼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방망이가 바람을 갈랐다.
6구까지 물고 늘어진 것만 보면 나름대로 끈질긴 승부이기도 했다. 신인 상대로 6구 승부했다고 뿌듯해해도 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간닼ㅋㅋㅋㅋ 18.2이닝이욬ㅋㅋㅋㅋ
-이거 언제 끝나냐ㅋㅋㅋㅋㅋㅋ
-이제 고마해라, 마이 무우따 아이가;;;;;;;;
-존나 동업자 정신 없는 새끼ㅋㅋㅋㅋㅋ 저거 나중에 어떻게 깨라는 거야ㅋㅋㅋㅋㅋㅋ
-내야수들 창백한 거 봐라;;;; 말라 죽겄다;;;;
-그래, 투구수 안 아껴도 되니까 지금처럼 삼진 잡아라;;; 선배들 나이를 생각해야지;;;;;
이쯤에 이르러서는 엘리펀츠 팬들이 공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조차 않았다.
역대 최고 기록은 이미 저번 경기에서 달성한 뒤였다. 이제부터는 아웃 카운트 하나를 잡을 때마다 금자탑이 높아져갈 뿐이다.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자 싶으면서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다음 타석에 안타를 맞아도 역대 최고기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깥쪽! 빠지는 공을 타자가 참아냅니다! 이걸로 2볼 1스트라이크!
-이건 타자가 잘 참았다고 봅니다. 건드리려면 못할 것도 없는 코스였거든요? 하지만 가뜩이나 정타 내기 어려운 공을 무리하게 건드리면 좋은 결과를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이닝부터 투구수가 조금 늘어났죠? 그래 봤자 아직 13구째라 투구수가 늘었다고 표현하기는 민망하지만…….
-투구수보다는 볼이 비중이 늘어났다고 봐야지요. 7회에도 사실 4구 중에 2구는 빠지는 공이었거든요, 그런데 거의 스트라이크만 던진다는 이미지 때문에 휘두르고 만 거죠.
-기록을 의식한다고 봐야 할까요? 그러고 보면 재규어즈전에서도 피칭 스타일이 확 바뀌어서 강속구 비중이 늘어나기는 했는데요…….
-노히트는 안타만 안 맞으면 되니까요. 기록을 의식하고 있다면 지금처럼 빼는 공에 타자가 휘둘러주기를 바라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렵겠죠?
-사실 통계적으로만 봐도 도망치는 피칭이 투수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 경우는 적거든요. 계산적으로 공을 뺀다면 모를까. 조금만 집중해도 스트라이크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느린 공이라면 포석으로써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라이거즈 타자들도 최태웅의 피칭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점은 이번 이닝부터 바로 인지했다. 경이적일 정도로 적은 투구수는 이미 최태웅의 트레이드 마크였기 때문이다. ……데뷔한 날짜를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볼인데도 상대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도록 유도해내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대부분의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지나갈 뿐. 그러니 타자는 초구나 2구째라도 방망이를 휘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악!
“파울!”
신중하게 공을 주시하는 이형택도 처음에는 중계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히트 노런을 해나가다가 갑자기 도망치는 피칭으로 변해 자멸하는 투수는 얼마든지 있다. 퍼펙트와 달리 노히트는 볼넷도 허용되니까. 대부분의 투수는 빼는 공 던지는 걸 합리화하고 만다.
‘아니. 이놈은 도망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4구째를 건드린 순간. 이형택은 뭔가 제대로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많이 보면 안 되는 공이다.’
노히트 기록을 의식한다고는 생각하는데, 앞선 볼은 도망치느라 뺀 게 아니었다. 존에서 벗어난 공도 분명하게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의도는…… 공을 보는 것, 그 자체.
상대는 약 10km/h 단위로 다양한 구속 패턴을 구사하는 투수였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공을 많이 볼수록 속도감이 교란되고 마는 것이다.
‘아, 진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피칭 스타일 자체의 낯섦도 혼란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
솔직히 구속을 다양하게 조절하는 거야 아무 투수나 다 한다. 빠른 공인지 느린 공인지 금세 들통이 나서 아웃 카운트를 못 잡으니까 문제일 뿐이다.
절묘하게 싫어하는 코스만 골라서 던진다는 점은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정보가 부족한 신인이라고 해도, 이따위 똥볼로, 이렇게까지 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퍼억!
“스트라이크 아웃!”
전매특허가 되어버린 투 스트라이크 이후의 폭포수 체인지업에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짝짝짝!
-휘이익!
-짝짝짝짝!
이제는 새삼스럽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는 사람조차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조용히 일어나서 절도 있는 박수를 쏟아낼 뿐이었다.
이것은 이미 경의로 흠뻑 젖은 개가(凱歌)였다.
지면을 타고 흘러드는 장엄한 울림이 뼛속에 자근자근 배어들고 있었다.
한편으로 엘리펀츠의 야수들은 정말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경기는 벌써 8회 말.
야수라도 체력관리 차원에서 한두 명쯤은 교체해줬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유격수나 2루수처럼 체력 소모가 큰 포지션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백업 선수의 경험이 부족한 것은 야수도 마찬가지였다. 베테랑도 피가 바작바작 마르는 상황에 유망주를 대수비 요원으로 내보내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다.
‘아오, 저 물귀신 같은 새끼. 이만큼 해먹었으면 대충 좀 끊지……. 일단 기록이 끊어져야 다양하게 써 먹어볼 거 아니냐고…….’
유승혁 감독의 눈초리가 괜히 조금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농담 섞어서 눈치를 준다면 모를까. 잘못한 것도 없는 놈한테 정색하고 잔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어떡할래? 투구수 좀 늘었던데?”
“그래 봤자 스무 개도 안 되는데요. 전력투구한 것도 아니고……. 올려주시면 제가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유승혁 감독으로서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꺼내본 말이었고, 역시나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흔들린다면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렸겠지만, 그럴 정도의 상태도 아니었다. 노히트라는 건 애초에 실력만으로 달성할 수 없는 영역. 기록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해도, 게임 자체는 충분히 지켜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기록이 깨지자마자 무너지는 투수도 많으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는 해둬야겠지만.
***
-어쩌면 혹시나, 라고 생각은 했지만……. 후발투수라는 별명을 누가 처음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절묘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7이닝이건 4이닝이건 3이닝이건, 한 번 올라오면 중간에 내려갔던 적이 없죠?
-관중 여러분께서도 내심 기대하셨다시피! 최태웅 선수가 그대로 9회 초의 마운드를 지키러 직접 올라옵니다! 오늘까지 5경기 출장! 1승 3세이브! 현재 시점까지 19이닝 무실점! 단 한 번의 출루밖에 허용하지 않은 혜성 같은 신인이 갈 길 바쁜 라이거즈의 발목을 기어이 붙들러 나타났습니다!
8회 말 공격에서 기껏 추가득점한 타자들이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일은 이제 낯설지도 않았다.
야구선수에게 있어서 성적은 곧 관록이자 아우라.
지금에 이르러서는 새파란 신인과 마주선 베테랑의 이마에 진땀이 흐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그래도…… 이쯤하면 많이 해먹었잖아. 슬슬 터져줘야지.’
라이거즈의 4번 타자인 인용국이 배트 그립을 몇 번이고 신중하게 고쳐 잡으며 타석에 섰다.
최태웅이 노히트 기록을 의식하는 것은 분명했다. 의식하는 기록을 코앞에 두고 무기를 감춰두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원래 투수와 타자의 승부는 투수의 무기가 리그에 전부 드러난 뒤부터가 진짜다.
‘별별 잔재주를 다 부렸지만……. 결국은 마술 쇼처럼 속여먹는 거지.’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만 전력투구? 그 이전에는 일부러 살살 던지는 거라고? 멍청한 소리에도 정도가 있지. 잔머리 굴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것 같으면 누가 이 고생을 하면서 야구하나. 더 쉽게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안 한다면…….
‘그건 못하는 거지!’
따악!
홍포함마저 느껴지는 스윙이 초구를 짓이겨버릴 듯한 기세로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공이 시야에서 사라진 느낌이라, 최태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사적으로 뒤돌아서 외야 펜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말았을 정도다.
“플라이!”
“마이 볼! 마이 볼!”
여기가 돔 구장이라면 천장에 부딪혀서 떨어졌을지도 모를 만큼. 정말 어처구니없이 높게 치솟은 공.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비거리는 대수롭지 않았다.
위치로만 헤아리자면 외야와 내야 중간쯤.
공의 위치를 잃어버린 최태웅과 달리, 야수들은 정신없이 낙구 지점을 근처로 움직이고 있었다.
“큭……!”
그때, 제일 먼저 자리를 잡고 미세조정 하던 좌익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명 때문인지, 떨어지는 공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마이 볼! 마이 볼!”
유격수 주영호가 반사적으로 외야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좌익수 황민호가 공을 잃어버렸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주영호 뜁니다! 되나요? 되나요? 공이 높아서 아슬아슬할 수도…….
-아아, 잠깐만요! 황민호! 황민호!
콰아앙!
“……!”
한순간, 엘리펀츠 벤치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터졌다.
콜 사인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걸까? 낙구지점 근처에서 서성이던 황민호와 달려오던 주영호가 정통으로 부딪혀 나뒹굴었던 것이다.
“야……!”
“일단 공! 2루! 2루로!”
프로들은 가슴이 철렁한 와중에도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게 자기 일을 찾아 움직였다.
번개처럼 달려온 2루수가 데구르르 굴러가려는 공을 신속하게 낚아챈다. 원래 공을 주우러 달려왔던 중견수는 그 모습을 보고 황급히 2루 베이스를 커버하러 달려갔다. 복잡한 수비 상황 때문인지 최태웅이 우왕좌왕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2루 베이스 커버까지는 필요 없었다. 2루수가 공을 주운 시점에서 타자 주자도 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타임!”
“야, 괜찮아? 주영호! 황민호!”
기록이 연장되는 동안, 어떤 경건함마저 느껴지던 경기장이 벌집이라도 들쑤신 것 같아졌다.
허겁지겁 달려온 유승혁 감독은 바닥에 널브러진 둘을 보고서 표정이 굳었다. 어디가 찢어졌는지, 눈가를 감싼 주영호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 으아아…….”
“황민호? 너, 설마…….”
시뻘건 핏물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뒤늦게 황민호를 돌아본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무릎을 움켜잡은 모습에 유승혁 감독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황민호의 무릎은 일찍이 두 차례나 수술을 받은 부위였기 때문이 다.
“뭐해! 빨리 소독부터 안 하고! 지금 이게 들것으로 되겠어?”
“……!”
고성과 신음이 오가는 가운데 앰뷸런스가 그라운드까지 들어와서 두 사람을 싣고 나갔다.
이런 장면은 TV에서밖에 본 적이 없는지라, 최태웅은 뭘 하면 좋을지 몰라 적당히 떨어져서 멀뚱멀뚱 눈치만 살폈다.
“아…….”
그러던 최태웅이 한순간 흠칫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와중에도 몸이 식지 않도록 캐치볼하는 야수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확실히 여기가 프로는 프로네.’
엉뚱한 데서 자신이 프로라는 걸 새삼 실감하며, 최태웅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치 쪽을 힐끗 보았더니, 교체될 수비수 두 명도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1년에 150여 경기를 치르다 보면 선수의 부상 퇴장도 드물지 않을 거다. 익숙한 것은 둘째 치고, 걱정된답시고 괜히 끙끙거리고 있는 건 프로다운 행동이 아니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하네…….’
언뜻 보았더니, 유승혁 감독은 막막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황민호는 3할 2푼 7리에 6홈런을 때리고 있는 타선의 핵심. 주영호는 유격수 포지션에서 골든 글러브만 세 차례 수상한 수비의 핵심이었다.
포텐이 터진 이후로 한 번도 주전 자리에서 밀려난 적 없는 베테랑 들이 치열한 순위싸움 한복판에 이리 되었으니. 병원에서 하는 말을 들어봐야 알겠지만, 감독으로서 골치 아프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웬만큼 낯을 익힌 선배들이 부상으로 실려나갔으니 최태웅은 당연히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흔들린다거나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야구는 분명히 팀 경기지만. 각 포지션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된, 개인적인 스포츠이기도 하다.
기념할 일이 있다고 특별히 열심히 던지는 것도, 심란한 일이 있다고 대충 던지는 것도 아니다. 마운드에 있을 때는 어차피 하나라도 덜 맞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한다.
각자 자리에서 자기 할 일만 잘하면…….
“어라?”
그때, 최태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경기 결과를 표시해주는 대형 전광판.
아까까지만 해도 ‘8’이었던 라이거즈의 안타 숫자가 ‘9’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