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 배터리 -081- >
081.
선수의 이미지나 명성이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50홈런 타자에게 유인구만 던진다거나, 벤치 클리어링을 자주 일으키는 타자에게는 몸쪽 공을 던지기 어렵다거나, 컨트롤이 나쁜 투수 상대로는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지 못하는 경우 등등이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최태웅의 명성은 이제야 비로소 개화하기 시작한 면이 있었다.
재규어즈야 프랜차이즈 스타의 기록이 걸렸기에 필사적이었던 거고. 신인치고는 펄펄 나니까 일찌감치 정밀분석에 들어갔을 뿐, 위기감이라고 표현할 정도는 못 되었다는 말이다.
의외로 파이어볼러라는 점이 밝혀지기야 했지만, 150짜리 한두 번 때려보나? 설마 아직도 변화구를 감추고 있을 리는 없으니, 무기라고는 완급 조절 뿐. 탈삼진 비율이 높은 것에 비해서 컨택 자체는 오히려 웬만한 투수보다도 쉬울 정도다.
건드리기조차 어려운 공이 아니라면, 사실 보통은 확률 문제이기 마련. 요컨대, 다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건데…….
-1, 2간 타구! 1루수가 직접 몸을 날려서 잡아내는데요! 베이스 커버! 베이스 커버하는 최태웅!
-최태웅 선수, 침착해야 하는데요! 공을 저글(juggle)!
-잡았습니다! 오른손으로 캐치! 그대로 타자 주자는 포스 아웃! 이닝 종료! 최태웅 선수의 노히트 기록이 18이닝으로 연장됩니다!
가까스로 반 발짝쯤 차이를 낸 간발의 승부.
타자의 전력질주에 안절부절 못하던 관중이 포탄 같은 함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라이거즈 응원석 쪽에 맥 빠진 기운이 내려앉은 거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거 진짜로 뭐가 있기는 한 거야?”
“완급 조절 하나만 가지고 이렇게까지 길게 해먹을 수가 있다고?”
합쳐서 4구만에 나가떨어진 라이거즈 타자들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싫어하는 코스만 집요하게 찔러오는 건 사실인데, 크게 당했다는 느낌도 안 들었던 것이다.
공 하나하나만 보면 정말로 시시했다. 타이밍을 잃든 헛치든, 그 나름대로 어떻게든 출루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느낌이다.
게임으로 예를 들자면, 한 대만 톡 건드려도 죽지만 공격력도 엄청난 원거리 딜러? 심지어 사정거리 이내에 있기까지 한데도 컨트롤 하나로 그 한 대를 절대로 안 맞아주는…….
***
“하, 죽겠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장기석은 진이 빠지는 얼굴로 벤치에 털썩 걸터앉았다.
딱히 체력 소모가 큰 포수 포지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기석을 제외한 수비수도, 특히 내야수들은 그리 한 것도 없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투수의 대기록? 그야 팀 전체의 경사이고,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도 생각하는데……. 이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어야지.
야수 입장에서는 사실 남는 것도 없었다.
정말 MLB 하이라이트급 호수비라도 해내지 않은 다음에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일도 없다. 잘하면 본전이고, 자기 실수로 주자가 나가면 온갖 욕설이 쏟아진다. 그로 인해서 투수가 흔들려 노히트 기록이 깨지기라도 하면 완전히 쳐죽일 역적이 된다.
그리고 2~3이닝 정도는 노히트를 하나 단순히 무실점을 하나 거기서 거기다. 경기에 대한 기여도는 결승타를 친 타자가 더욱 클지 모르는데, ‘연속 이닝 노히트’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수훈선수도 빼앗긴다.
퍼펙트 게임이나 노히트 노런이라면 한 경기 바짝 집중하고 말겠는데……. 이건 도대체 언제쯤에나 끝나는 건지…….
“안 되겠다. 너, 지금부터 아웃 하나에 20만 원씩 회식비 적립이야.”
“예? 아니, 갑자기 그런 법이 어딨어요!”
느긋하게 앉아서 호흡을 고르던 최태웅이 화들짝 놀라서 따지고 들었다.
“그런 법이 어딨긴 시발. 죽을 똥 싸기는 우리가 더하는 것 같은데, 좋은 건 너 혼자 낼름 다 처먹는 지금이 더 이상한 거지.”
“아니, 그래도 정도가 있지! 벼룩의 간을 빼먹어도 유분수지! 저, 최저연봉자거든요? 마른오징어 쥐어짠다고 물 나오는 거 봤어요?”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엑기스 나와. 그리고 시발 꼭 10이닝은 더 해처먹을 것처럼 말하네. 누구 죽는 꼴 보려고? 너 때문에 수비 나갈 때마다 피곤해서 뒤져버리겠다.”
“……!”
더그아웃의 선수들이 투닥거리는 장기석과 최태웅을 보면서 실실 웃었다.
사실 대기록 중인 투수에게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거는 것은 거의 비상식적인 일이다. 노히트 노런만 해도 7이닝쯤 되면 다들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투수 주위에 접근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이 새끼야 뭐 워낙에 멘탈 깡패니까. 저번에 마운드 올라갔을 때 보니까, 부담을 내려놔야 잘 풀리는 타입이기도 했고.’
장기석이 보기에, 지금 진짜로 긴장을 풀어야만 하는 것은 투수가 아니라 내야진이었다.
최태웅의 땅볼 유도 능력은 인정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무게감이 떨어졌다. 땅볼이기는 해도, 타구가 너무 강렬해지는 것이다.
야수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비에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다. 팽팽한 집중력을 너무 오랫동안 유지하면 체력적인 소모도 커진다.
가뜩이나 주전 선수의 평균 나이가 높아서 체력이 약점으로 꼽히는 팀이거늘……. 오늘만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사실 실속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기록에 체력을 갉아먹는다는 건…….
“절대로 내가 피곤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흠흠.”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야. 아무것도.”
***
‘부럽다…….’
백업 포수인 채영선은 어딘가 소외된 기분으로 화기애애한 더그아웃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나이로는 두 살. 최태웅의 중고등학교 시절 공백기를 생각하면 10년 가깝게 차이가 나는 경력.
저런 새파란 신인이 주전 선배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농담 따먹기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멜랑콜리했던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자기 기회 자기가 넙죽 잘 받아먹은 건데.’
마음껏 시기하기에는 데뷔하자마자 찍어낸 성적이 너무 무시무시했다.
특별히 혹사당하지 않는다면 불펜투수는 1년에 60이닝 정도를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태웅은 데뷔한지 2주일만에 3분의 1에 달하는 18이닝을 이미 무실점으로 소화해냈다.
그야말로 천재적인 ‘야구 센스’를 가졌으나, 재능이라는 말 하나로 시기하기에는 떨떠름한 부분도 있었다.
부상으로 야구를 그만 뒀다가 반대팔로 전향해서 프로에 입문한 놈이다. 선택받은 선수만 던질 수 있다는 150km/h의 영역에 있지만, 실제로 써먹는 공은 평균 100km/h조차 되지 않았다.
시기심이라는 게 물론 이성으로 조절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놈을 자기보다 앞서 나간다는 이유로 시기하면 정말 땅에 떨어져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진짜 세상에 더럽다고 생각했던 재능은 저놈인데…….’
무심코 불펜 한쪽을 쳐다본 채영선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서기찬이 또 수능시험 벼락치기라도 하는 기세로 온갖 서류를 늘어놓은 채 끼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맨날 열심히 해? 나중에 시간도 많을 건데 꼭 경기 중에만.”
“아,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깜짝 놀란 서기찬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료들을 가렸다.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한다기보다는 보여주기 껄끄러워서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뭘 또 그렇게 숨기기까지야. 역적모의했어? 누구 욕 쓰고 있었냐?”
“그, 그런 건 아니고요……. 태웅이가 보면 성질내서요…….”
“……너네 동갑 아니었어?”
“그렇기는 한데요……. 태웅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요…….”
얼씨구.
서기찬이 심하게 내성적인 거야 알았지만, 동기한테 무섭다 소리를 할 정도일 줄은 몰랐던지라……. 유치원생을 상대하는 기분에 한 순간 짜증마저 났다.
단순히 최고 구속으로만 따지면 현역 선수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이 서기찬이다. 자신감을 갖고 무식하게 쑤셔박기만 해도 구위가 나오는 역대급 재능의 보유자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도 최태웅이 따라해본 거라면서? 무슨 게임하는 것처럼 쿨존에만 디립다 쑤셔박던 거.”
사실 그때의 피칭은 나중에 포수인 장기석까지 포함해서 단단히 잔소리를 들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며, 포수는 어째서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혼구멍이 나고서도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이놈이 진짜로 소심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최태웅이랑 너는 스타일이 한참 달라서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왜 다른 투수 다 내버려두고 하필 걔냐? 경력은 너보다도 짧은 애를?”
“공이… 제일 느리잖아요…….”
“그게 뭐?”
“공이 느린데도 잘하니까……. 그것도 빠르게 던질 수 있는데도 일부러 느리게 던지는 거니까……. 볼 배합도 제일 좋은 걸 쓰고 있을 것 같아서요…….”
“…….”
분명히 바보스럽기 짝이 없는 말인데, 한편으로는 묘하게 일리가 있어서 뭐라고 반박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암, 그렇지. 다른 조건이 똑같다면, 강속구 투수보다야 저속구 투수가 볼 배합을 잘하는 거기야 하겠지.
채영선의 기이한 눈빛을 느꼈는지, 서기찬이 흠칫하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그래도 대충 건진 건 있어요. 적어도 태웅이 무기가 뭔지는…….”
“……!”
슬슬 끊고 일어나려던 채영선이 흠칫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도 최태웅이 제멋대로 던지는 공은 신통하기 그지없었다. 불펜에서는 아무리 봐도 똥볼일 뿐인데 현실적으로 미친 듯이 아웃을 잡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 비밀이 궁금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채영선은 태연한 표정으로 귀만 쫑긋 세웠……
“어, 우선은요……. 태웅이 수비가 별로예요.”
……다가 첫 마디부터 시간낭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누구 수비가 별로라고? 장난해?”
공을 던진 이후에는 투수도 어엿한 내야수.
분석팀의 자료에 따르면 최태웅의 내야 수비능력은 최상급이었다. 동영상을 본 선수들도 그런 평가에는 대강 공감했다.
실로 경악할 만한 타이밍의 번트.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는 건 최상급 수비전문요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
“그건 번트 수비였잖아요. 제가 말한 건 평범한 타구 수비나 베이스 커버예요. 오늘도 아까 저글한 거 보셨잖아요. 반사신경 빨로 수비하는 거지, 수비 동작 자체는 몸에 안 익었어요. 타구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평균보다 조금 이하예요. 야구 다시 시작한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당연하기는 한데…….”
“아니, 잠깐만. 그게 말이 돼? 수비 못한다는 놈이 번트 대응에만 신들렸다고?”
“그게……. 제 생각에는 번트가 나올 줄 미리 알고 움직인 것 같아요…….”
“…….”
웬만해서는 헛소리 그만하라고 핀잔 한 마디쯤 던져줬어야 하는 타이밍이다.
그럼에도 채영선은 말문이 막힌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짚이는 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약점이잖아?”
“제가 말하려는 무기는 타자 반응 읽어내는 걸 말하는 거라서요……. 이게 또 그럴 듯한 게 있어요.”
서기찬은 그러면서 자료 몇 장을 뒤적거려서 내밀어 보였다.
“제가 저번에 무식하게 쿨존에다가만 공 찔렀다고 혼났잖아요……. 그런데 사실, 태웅이도 85퍼센트는 집요하게 쿨존만 찔러요……. 구속패턴만 랜덤하게 바꿀 뿐이고…….”
채영선은 왠지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었다.
왜, 야구 게임의 초급자 모드에 보면 타자의 코스별 타율을 표시해주는 기능이 있지 않나. 기록지만 봐서는 그 기능에 의존해서 쿨존만 찌르는 초심자의 피칭과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유치한 리드는 오히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구구단만 외운다고 산수 시험을 만점 받을 리가 없지 않나.
이따위 무식한 짓거리가 통할 만큼, 야구가 손쉬운 것일 리가…….
“그러면 나머지 15퍼센트 패턴에 뭐가 있겠지.”
채영선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서기찬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거예요! 그런데 그 나머지 15퍼센트 부분이 심하게 이상하거든요?”
“이상하다고?”
서기찬이 이어서 보여준 기록지를 보고, 채영선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뭘 두고 이상하다고 표현했는지 너무나도 명확히 들여다보였던 것이다.
“한가운데?”
“맞아요!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얘는 가끔 한복판에다가 그 말도 안 되는 공을 던진다니까요?”
말하는 결에 흥분했는지 서기찬의 호흡이 조금 거칠어졌다. 채영선은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구위만 믿고 스트라이크존 한복판 승부를 벌이는 경우야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최태웅의 공은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뭣보다도…… 거의 다 루킹이야.’
느린 공이라고 한복판 승부가 전혀 통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너무 말도 안 되는 공이니까 오히려 허를 찔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고 한두 번이지.
아예 타자가 스윙을 한 적조차 거의 없다?
거기가 의식의 사각(死角)이라는 걸 미리 알고 던진 듯 하지 않은가.
채영선의 심장이 묘하게 고동쳤다.
자신은 아직 익힐 요건조차 안 되는 절세의 비급을 눈앞에 둔 심정이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결국? 이놈은 뭘 보고 이 한복판에 다가 던졌다는 건데?”
“그것까지는 아직……. 계속 관참하는 중이기는 한데요…….”
서기찬이 풀이 죽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는 사이에 엘리펀츠의 공격이 끝났다.
최태웅의 연습투구를 보는 채영선의 눈빛도 묘하게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