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배터리-79화 (79/90)

< 괴물 배터리 -080- >

080.

그날의 최고 공로자와 나누는 수훈선수 인터뷰.

확실히 영광스러운 일이기야 한데, 출장할 때마다 해서 그런가? 이제는 조금 식상한 느낌도 있었다. 기념비적이라기보다는 경기 전에 하는 애국가나 시구처럼 뭔가 의례적인…….

“어휴, 웬만한 신인은 수훈선수 되면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어 있고 그러는데, 최태웅 선수는 서 있는 자세만 봐도 베테랑처럼 느긋하네요. 등판할 때마다 인터뷰하고 그러니까 이제 좀 담담하고 식상하고 그런가요?”

뜨끔.

“그럴 리가요. 수훈선수는 그날 가장 잘한 사람한테 돌아가는 영광이라……. 아, 카메라 좀 이쪽으로요. 저는 오른쪽 얼굴이 화면발을 잘 받더라고요. 몇 번을 받더라도 감개무량하고 긴장되지, 식상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참, 그런데 인터뷰 기념품은 건강 팔찌 말고 다른 거 없어요?”

뭐야. 왜들 쪼개냐. 내가 틀린 말 했어? 오늘도 건강 팔찌 받으면 네 개째인데. 그렇다고 발목에 차고 다니리? 여자들 기겁해서 도망치게? 다른 선수들은 만년필도 받고 그랬다더구만.

“최태웅 선수는 오늘 경기에서 역대 최다 이닝 노히트를 경신했는데요. 기분이 어떠신가요? 본인이 여기까지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나요?”

“기분은 조금 얼떨떨합니다. 프로로 뛰는 동안에 큰 기록 갈아엎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데뷔하자마자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더욱 기대되는 점은 이 기록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거죠. 안타를 맞을 때까지 던지는 족족 최고 기록이 경신된다는 말인데요. 몇 이닝까지는 노히트하고 싶다, 이런 목표가 따로 있나요?”

“목표라면 당연히 은퇴할 때까지 노히트하는 거죠.”

“……예? 은퇴요?”

“능력이 안 되고 운이 안 따라서 얻어맞는 거지, 일부러 얻어맞는 투수가 어딨겠어요. 투수한테 희망을 말하라면 당연히 평생 하나도 안 맞고 싶죠.”

“…….”

순간적으로 아나운서의 말문이 막힌 거야 이해하지만, 내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희망을 말하라면 당연히 전 경기 27K 퍼펙트게임이지. 세상 모든 선발투수는 ‘오늘 퍼펙트게임을 달성할지도 모르는 투수’라는 말도 못 들어봤나?

좌우간 그날 밤부터 스포츠 뉴스란 뉴스는 모조리 내 이름으로 도배가 되었다. 어했든 프로 스포츠로서는 국내 최고의 인기 종목에서 역대 기록을 경신한 거니까 뭐.

재능 하나만으로 앞서나가는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아니꼽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건 같은 무대에서 뛰는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

팬들은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을 원한다. 기왕이면 역대 최고 정도가 아니라, 치트키를 쓴 싱글게임의 캐릭터 수준의 절대적인 괴물을.

이길 게 뻔한 경기를 뭔 재미로 보겠는가 싶지만, 현실과 컴퓨터 오락은 다르다. 실제로는 ‘반드시 이기는 야구 경기’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자면 최태웅이라는 투수의 세일즈 포인트는 ‘노히트’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데뷔하자마자 다이렉트로 이런 기록을 달성했다는 점이 비싸지.

역경을 딛고 성공한다? 눈물 젖은 빵으로 경험을 쌓아가면서 결국 누구나 알아주는 베테랑이 된다?

그것도 물론 팔릴 만한 스토리이기야 한데, 팬들이 나한테 바라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본다.

완전무결.

아무런 굴곡도 없이, 혜성처럼 나타나서, 인간과는 애초에 종족이 다른 것처럼, 무쌍하게 설치는 것.

만화 같은 ‘먼치킨’을 실제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딱히 원정숙소 밖을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달라진 위상은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신인 최고’를 경신했을 때도 그랬지만, ‘역대 최고’를 경신했더니 핸드폰이 조용한 순간이 없었던 것이다.

-태웅아, 기록 축하한다! 그런 식으로 야구 그만둬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이제라도 제 길로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다. 언제 밥이라도 한 번 먹자?

-최태웅! 나 김현태인데 기억하지? 한석중 2학년 2반! 우리 조별과제도 같이 했었잖아! 나 지금 MT인데 너랑 친구라고 하니까 다들 안 믿네. 인증샷 하나만 찍어서 보내주라.

-수고했다, 아들. 사인볼 50개만 집으로 택배 부쳐라. 명단도 보내줄 테니까 이름 따로따로 적어서.

-태웅아, 오랜만이지? 나 현중인데 기억해? TV에서 너보고 깜짝 놀랐다. 오른팔 전향이라니… 네가 인간 승리하는 모습을 봤더니 게을렀던 지난 시간이 부끄러워지더라. 아직 새 출발 하기에 늦지 않았다는 교훈을 준 네게 감사 표시로 좋은 보험을 소개해줄까 해. 김윤아 같은 국가대표 선수도 많이 드는 신체 보험인데…

하하하. 그래도 내가 인생을 삐뚤게 산 건 아닌가 보네. 이깟 것도 경사랍시고 진심 어린 축하가 쏟아지는 걸 보니. 시발.

***

누군가에게는 다시없을 기념일도 누군가에게는 흘러가는 일주일 중 하루일 뿐. 대기록의 여운이야 남았으나, 페넌트 레이스 자체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엘리펀츠, 재규어즈 원정 3연전 싹쓸이!]

[시즌 두 번째 스윕 달성!]

[4연승 쾌속질주! 4연속 위닝 시리즈!]

[엘리펀츠, 3위 탈환! 3위와 6위의 승차 3. 남부리그는 지금 ‘혼돈의 카오스’!]

최근의 엘리펀츠는 호재로 가득했다.

정규 시즌의 4분의 1을 겨우 넘긴 시점이라 큰 의미는 없으나, 일단 가을야구 커트라인인 3위에 올라섰다. 불펜이 안정되면서 생겨난 상승세였기에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었다.

체감적으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나 다름없지만, 최태웅이라는 히트상품도 있었다.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가장 확실하게 흥행할 수 있는 무기는 신기록 도전이었다.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사실 평범한 노히트 노런보다도 강력했다. ‘오늘 이런 기록을 세웠다’로 끝나지 않고, 기록이 깨질 때까지 관중동원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장서서 최태웅을 데려온 강충식은 벌써 공로를 인정받아 성과급이 나왔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보기 좋은 것만 본’ 상황에 불과했다. 계약할 당시에 받은 미션이 있는 유승혁 감독으로서는 마냥 긍정적인 시점만으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최태웅이가 전천후로 이닝 먹어주면서부터 불펜에 숨통 트인 건 맞는데……. 문제는 이닝 소화하는 게 너무 많아.’

이상적인 세대교체 방법은 베테랑이 중심을 잡는 짬짬이 유망주가 투입되는 것이다. 그러면 베테랑은 체력 관리가 되고, 유망주는 경험이 쌓아진다.

승패를 도외시한 리빌딩이 편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망주가 쉽사리 폭발하지 못해도 몇 게임 줘버리면 되니까. 베테랑의 투입을 무리하게 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최태웅의 페이스 메이킹은 유망주가 폭발한 듯한 효과를 내기야 했다. 문제는 유망주 여럿에게 돌아갈 기회를 혼자서 돼지처럼 처먹었다는 것.

그렇다고 중간에 내리기에는 투구수가 너무 아까워서 탈이었다. 시험공부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머리 식혀야 한다는 건 아는데, 막상 시험이 내일이라서 책상 앞을 떠나기는 어려운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따악! 따악! 퍼억! 퍼억!

“아웃!” “세이프!” “베이스 온 볼스!”

라이거즈와의 홈 3연전, 첫 경기.

선발투수가 6이닝 3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고 내려가 3대 5로 앞서는 상황.

하지만 7회에 올라간 차형준이 대뜸 선두타자 홈런 뒤에 1사 1, 2루로 악화시키자, 유승혁 감독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두야…….”

교체할 투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을 의미 있게 소화할 투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역전을 허용할지 지킬지의 문제가 아니다.

실점하면 실점하는 대로, 막으면 막는 대로 그 경험을 자기 재산으로 만들 유망주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는 최태웅도 포함된다. 지금까지의 피칭과 인터뷰 태도 등을 봤을 때, 저놈은 유망주들과 반대 의미에서 얻어갈 게 없었다.

그렇다면 평범하게 생각해서 실속이라도 챙기는 게 맞는 거긴 한데…….

‘아, 안 돼, 저놈은. 이게 너무 패턴화되면 3년 안에 최태웅 원맨팀이 될 거야.’

저도 모르게 최태웅 쪽을 힐끗 쳐다보고 만 유승혁 감독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믿는 구석이 든든하면 실력 이상이 발휘되는 투수가 있고, 소방수를 너무 믿어서 오히려 느슨해지는 투수가 있다. 유승혁 감독이 판단하기에 엘리펀츠에 있는 유망주 대다수는 후자에 속했다.

자기 임기만 채우려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놈들도 결국은 다 후배가 아닌가? 흘러가는 대로 두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눈앞의 과실만 취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저놈을 선발로 한 번 돌려봐?’

팀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5일에 한 번씩 이겨주는 필승 에이스보다 긴박한 상황에 나와서 불을 꺼주고 여러 이닝 먹여주는 불펜이 보탬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영양분을 독식하는 몬스터 트리가 되도록 방치할 바에는 선발투수화도 괜찮은 발상 같았다.

지금의 투구가 유지된다면 선발투수로서 거의 불펜의 정기휴일을 보장하는 수준의 이닝 이터가 될 테니까. 이것도 분명히 팀 전체에 영향을 주는 페이스 메이크에 속하기는 한다.

타이밍만으로 승부하는 피칭이 선발투수로서도 여러 번 통할까 하는 걱정이 있기야 하지만…….

“최태웅이 스탠바이. 다음 타자 상대하는 것까지만 보고 바로 들어간다. 어깨 풀어.”

“예, 알겠습니다.”

건방진 놈이지만 마운드 욕심 하나는 일단 마음에 드는군.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는 최태웅을 보면서 유승혁 감독은 피식 웃었다.

그래 뭐. 이놈이 통할지 안 통할지 미리 알 수 있으면 누가 야구 감독을 하고 있겠나. 돗자리 깔았지. 놈의 피칭이 선발로서 안 통한다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다.

‘그렇다고 노히트 기록 중에 대뜸 선발로 바꿔서 깨먹을 수는 없으니까……. 노히트 기록만 깨지면 바로 한 번 돌려봐야겠군.’

***

“어? 최태웅? 진짜로?”

“와, 이제 롱 릴리프니 그런 거 말고 빠듯할 때도 재깍재깍 내보내고 그러려나?”

차형준의 두 타자 연속 스트레이트 볼넷.

느닷없이 찾아온 1사 만루의 위기에 욕지기를 삼키던 관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광판에 표시된 차형준의 이름이 대뜸 최태웅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만루라. 빡센 상황에 나오네.

-아무리 신인이라도 17이닝 넘게 노히트 찍은 놈을 다 끝난 게임에 롱 릴리프로 내보내는 게 오히려 이상했던 거임.

-패왕똥볼! 오늘도 7회부터 세이브 가나요?

-야, 재규어즈전 못 봤냐? 우리 형님 똥볼 졸업하셨거든? 파이어볼러라고!

-닥쳐, 그땐 잠깐 초심을 잃으셨던 거야. 이제 신기록 넘어갔으니까 원래의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실 거야.

-야수들은 솔직히 존나 짜증 날 듯. 노히트 노런이면 그냥 한 경기 피 말리고 마는데, 기록 깨질 때까지는 얘 나올 때마다 피 말려야 돼 ㅋㅋㅋㅋ

신기록이 진행 중이어서 그런지, 재규어즈전과는 다르게 홈경기라서 그런지. 화산이 폭발하듯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라이거즈 선수들이 몸이 짓이겨질 듯한 위압감에 웅크린 가운데, 최태웅이 나른한 표정으로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쳇, 또 불펜이네. 그렇게 바로 입질이 올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100km/h짜리 직구를 포수 미트에 퍽퍽 꽂으면서 최태웅은 작게 투덜거렸다.

임팩트 있는 기록을 남기면 싫어도 자신을 선발투수로 고려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툭 던졌던 말은 감독님 머릿속에서 지워진 걸까? 아니면 애초에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었거나? 설마 올해까지는 불펜 돌리고 내년부터 선발투수 시켜준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흥, 누구 마음대로.’

타석에 들어온 타자를 보면서, 최태웅은 싸늘하게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겠지. 특급 마무리가 생기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뭔가. 잘 던지는 투수는 대개 선발로 전향해버리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잘 던지는 투수가 많은 이닝을 던지는 게 팀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선발 안 시켜주고는 못 배길 때까지…… 노히트 기록은 무조건 끌고 간다.’

최태웅이 느릿하게 투수판을 밟았다.

왠지 독기가 느껴지는 눈빛에, 라이거즈 타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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